자료의 내용
1635년부터 1935년까지 역대 義興鄕校 교임을 수록해 놓은 자료이다. 의흥향교는 현재 慶尙北道 軍威郡에 소재한 곳으로 본 자료는 1935년 의흥향교에서 간행한 『義興校錄』에 「校任相遞錄」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한편, 『義興校錄』에는 역대 교임 명단 이외에도 「鄕校移創節目記」, 「重建鄕校頌幷序」, 「附重刱記後」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의흥향교의 이력을 살펴 볼 수 있게 해준다.
「校任相遞錄」의 교임 명단은 1635년부터 확인된다. 『義興邑誌』에는 訓長, 有司, 庫子, 校奴 등의 직임이 있다고 나타나 있으나, 본 명단에는 사족들이 맡으며 실제 향교 운영을 주도했던 都有司, 掌議, 齋有司, 祭享有司, 直員 등의 교임 명단만 수록하였다. 여러 교임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도유사와 장의라 할 수 있다. 도유사는 해당 향교를 대표하는 首任이며, 장의는 도유사를 보좌하던 副任이었다. 향교 수임과 부임의 명칭은 지역별로 차이가 나나 경상도 소재 향교의 경우 대부분 수임을 도유사, 부임을 장의라 불렀는데, 의흥향교도 이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齋有司는 校生들이 소속되어 있는 東齋와 西齋의 교생 가운데 선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校任相遞錄」에 기재된 교임은 대부분 도유사, 장의, 재유사의 교임을 역임했던 인사들이다. 다만 1885년 乙酉 8월부터 1903년 甲辰 8월까지 祭享有司 1인이 두어지고 있음이 나타난다. 제향유사는 18년 동안 전시기 두어진 것이 아니라 8회에 걸쳐 춘추향사가 있는 2월과 8월에만 간헐적으로 임명되고 있다. 그리고 제향유사가 두어질 때에는 재유사가 별도로 임명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 1921년 辛酉 8월 이후부터는 향교 수임을 도유사 대신 直員을 명기해 놓았다. 「校任相遞錄」에는 學府의 令으로 수임 명칭이 바뀌었다고 명기되어 있는데, 이때부터 의흥향교의 수임도 직원이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한말부터 일제는 지방의 향교를 통제하기 위해 향교 수임을 直員으로 통일하고 관리하였는데, 의흥향교는 공식적으로 1921년부터 직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것이다.
의흥향교 교임의 정원은 도유사 또는 직원 1인, 장의 1~3명, 재유사 1~2인으로 일률적이지 않다. 재유사는 보통 1명이 임명되었으나 17세기에는 2명이 임명되는 경우도 나타난다. 대개 도유사 1명, 장의 2명, 재유사 2명 체제로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재유사는 1914년 甲寅 이후로는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20세기 이후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완전히 유명무실해진 시점에서 교생을 대표하는 재유사를 임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1914년은 의흥향교가 새롭게 운영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校任相遞錄」에 따르면 1910년 庚戌부터 1913년 癸丑까지는 교임 명단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1914년 교임 명단 바로 앞에는 당시 義興郡守였던 金漢殷이 4년 동안 향교 재정을 학교 收入으로 돌려 闕享되었다고 명기해 놓았다. 명확한 사연은 확인되지 않으나, 의흥향교의 재정이 근대식 학교의 재정으로 전용되었으며, 이로 인한 향교 재정 부족으로 춘추향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4년 동안 향교 교임이 임명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향교 재정의 전용은 일제의 유림 통제 정책 및 교육 정책과 맞물린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향교 재정의 악화로 중단되었던 춘추향사는 1914년부터 재개되는데, 이때의 비용은 유림들의 모금으로 형성되었다. 덧붙인 기록에 따르면, 향사의 闕享을 미안해하며, 鄕員 열여섯 가문에서 자금을 모아 다시 奉享을 시작했다고 한다.
도유사를 비롯한 교임의 임기는 보통 1년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교임 임명 후 1년을 채운 경우는 드물게 나타난다. 1년을 채운 경우도 17세기 기록에서만 확인되고, 거의 대부분은 1년 미만으로 춘추향사를 기점으로 교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임기를 끝내지 않고 교체되는 경우도 많은데, 그럴 경우 ‘代’라고 명기하여 대리자를 기재해 놓았다. 한 임기 동안 두 차례 이상 대리자가 나타나는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 음력 2월과 8월의 춘추향사가 끝나고도 임기를 유지할 경우에는 ‘仍仕’라고 명기되어 있다. 한편 도유사의 경우 수령인 義興縣監가 맡기도 하였다. 그럴 경우 향사에서 初獻官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校任相遞錄」에는 수령일 경우 세주로 ‘官’, ‘本官’, ‘主倅’이라고 명기해 놓았다. 의흥현감 또는 義興郡守로 있으면서 도유사를 역임한 인물로는 1794년 3월의 李洛秀를 비롯하여, 1802년 壬戌의 鄭文綏, 1804년 甲子의 沈能秀, 1809년 己巳의 尹時東, 1823년 癸未의 洪義翼, 1831년 辛卯의 李能淵, 1836년 丙申의 任奭朝, 1841년 辛丑의 李龜遠, 1845년 乙巳의 鄭淳榮, 1853년 癸丑의 徐喆淳, 1854년 甲寅의 朴晉壽, 1858년 戊午의 李承白, 1862년 壬戌의 李能亨, 1867년 丁卯의 金熙永, 1868년 戊辰의 尹永善, 1872년 壬申의 趙夔熙, 1877년 丁丑의 閔泳學, 1881년 辛巳의 金明洙, 1882년 壬午의 權灝, 1884년 甲申의 尹敎正, 1888년 戊子의 趙重世, 1896년 丙申의 申泰哲, 1900년 庚子의 金榮灝, 1901년 辛丑의 金奎衡, 1903년 癸卯의 趙秉瑜가 있다. 이중 조병유는 1907년에 都執禮를 맡기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수령들이 향교의 도유사를 역임하는 것은 조선후기 수령의 향촌지배 강화와 향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관권의 힘을 빌리려는 지방 유림들의 요구가 절충된 것이다. 의흥향교도 수령의 권위가 강화되는 18세기 후반부터 이러한 수령의 교임 임명이 증가하고 있다. 그 외에 수령은 아니지만 生員, 進士이거나 參奉, 博士처럼 관직을 역임한자가 교임을 맡을 경우 세주로 이름 뒤에 해당 사항을 명기하였는데,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편이다.
역대 교임을 역임한 인사들은 성씨별 분류가 가능하다. 역대 교임을 역임한 인사를 중복 임명 및 ‘代’라 기재되어 있는 대리자를 포함하여 각 성씨별 역임 회수를 파악하면, 향교 운영을 주도했던 가문의 추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해를 넘겨도 계속 해당 교임을 계속 역임할 경우 ‘仍仕’라고 명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회수에 추가하지 않았다. 성씨별 의흥향교 각 교임 역임자 배출 회수는 세기 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1635년부터 1700년까지 도유사는 63회 임명되었는데 洪氏 22회, 李氏 20회, 朴氏 16회, 申氏 3회, 金氏 2회 순이다. 장의는 143회 임명되었으며 朴氏 52회, 洪氏 46회, 金氏 15회, 李氏 12회, 申氏 10회, 康氏 4회, 權氏 2회, 崔氏 2회 순으로 나타난다. 재유사는 朴氏 55회, 洪氏 28회, 李氏 9회, 康氏 5회, 金氏 5회, 申氏 3회, 權氏 2회, 崔氏 2회로 모두 109회 임명되었다. 이를 총합하여 성씨별로 분류하면, 17세기 동안 朴氏 123회, 洪氏 96회, 李氏 41회, 金氏 22회, 申氏 16회, 康氏 9회, 權氏 4회, 崔氏 4회 순으로 모두 314회의 교임 임명이 있었다. 17세기 동안 모두 8개 성씨가 교임을 역임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후에 비해 참여 성씨가 다양하지 않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수임과 부임인 도유사와 장의의 임명 회수 비중을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洪氏와 李氏는 다른 교임 임명 회수에 비해 도유사 임명 비중이 높으며, 金氏와 朴氏는 다른 교임 임명 비중에 비해 도유사 임명 비중이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1701년부터 1800년까지 의흥향교 교임의 임명 회수는 모두 607회이다. 65년간 315회였던 17세기와 비교한다면 임기가 많이 짧아 졌음이 확인된다. 성씨별 교임 임명 회수는 도유사의 경우 朴氏 52회, 洪氏 38회, 李氏 27회, 申氏 10회, 金氏 7회, 崔氏 5회, 都氏 1회 순으로 모두 142회의 임명이 있었다. 장의는 290회 임명이 이루어졌으며 성씨별로는 朴氏 123회, 李氏 58회, 洪氏 56회, 申氏 18회, 崔氏 17회, 金氏 15회, 康氏 1회, 都氏 1회, 陳氏 1회, 孫氏 1회 순으로 나타난다. 재유사는 175회 임명이 있었는데, 朴氏 73회, 洪氏 36회, 李氏 29회, 申氏 11회, 金氏 7회, 崔氏 7회, 陳氏 5회, 孫氏 3회 순이다. 이를 다시 성씨별로 종합하면 朴氏 248회, 洪氏 130회, 李氏 114회, 申氏 39회, 金氏 29회, 崔氏 29회, 康氏 7회, 陳氏 5회, 孫氏 4회, 都氏 1회 순으로 교임에 임명되었음이 나타난다. 전반적으로 朴氏와 李氏, 崔氏의 임명 비중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洪氏와 金氏는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교임으로 임명되는 성씨의 수가 증가하여, 17세기와 비교하여 權氏가 사라진 대신 都氏, 陳氏, 孫氏가 새롭게 확인되고 있다.
1801년부터 1900년까지 의흥향교의 교임 임명 회수는 모두 679회로, 앞선 시기에 비해 교임의 임기가 점점 단축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전히 朴氏, 洪氏, 李氏, 申氏, 金氏의 비중이 높으나 소수의 교임을 배출하는 성씨도 확인되는데, 이들은 의흥 지역의 신흥 사족 가문으로 생각된다. 먼저 도유사는 161회의 임명이 있었으며, 성씨별로는 朴氏 57회, 洪氏 35회, 李氏 17회, 金氏 13회, 申氏 13회, 崔氏 5회, 尹氏 5회, 趙氏 4회, 都氏 2회, 陳氏 2회, 鄭氏 2회, 蔣氏 1회, 徐氏 1회, 任氏 1회, 沈氏 1회, 閔氏 1회, 權氏 1회 순이다. 그런데 이중 徐氏, 鄭氏, 任氏, 沈氏, 尹氏, 閔氏, 權氏는 의흥의 사족이 아니라 수령으로서 도유사를 역임한 인물이며, 趙氏의 도유사 임명 4회 중 3회, 金氏 13회 중 3회도 수령의 도유사 임명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 외 李氏 5회, 朴氏 1회, 洪氏 1회, 申氏 1회가 수령의 도유사 임명이다. 장의는 333회 임명이 이루어졌으며, 성씨별로는 朴氏 140회, 李氏 56회, 洪氏 43회, 申氏 22회, 金氏 19회, 都氏 19회, 崔氏 13회, 蔣氏 4회, 陳氏 3회, 柳氏 2회, 孫氏 2회, 權氏 1회, 趙氏 1회, 丁氏 1회, 張氏 1회, 韓氏 1회, 任氏 1회, 嚴氏 1회, 吳氏 1회, 盧氏 1회, 文氏 1회 순으로 나타난다. 재유사는 180회 임명이 이루어졌으며, 성씨별로는 朴氏 66회, 李氏 36회, 金氏 19회, 洪氏 11회, 崔氏 10회, 都氏 9회, 申氏 8회, 孫氏 4회, 林氏 4회, 陳氏 3회, 蔣氏 3회, 趙氏 1회, 丁氏 1회, 吳氏 1회, 文氏 1회, 裵氏 1회, 禹氏 1회, 高氏 1회 순이다. 그 외 도집례를 朴氏가 1회, 제향유사는 洪氏, 申氏, 崔氏, 都氏가 각 1회씩 역임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 다시 성씨별로 종합하면 朴氏 264회, 李氏 109회, 洪氏 90회, 金氏 51회, 申氏 44회, 都氏 31회, 崔氏 29회, 陳氏 8회, 蔣氏 8회, 趙氏 6회, 孫氏 6회, 尹氏 5회, 林氏 4회, 柳氏 2회, 丁氏 2회, 鄭氏 2회, 任氏 2회, 權氏 2회, 吳氏 2회, 文氏 2회, 權氏 1회, 張氏 1회, 韓氏 1회, 徐氏 1회, 沈氏 1회, 閔氏 1회, 嚴氏 1회, 盧氏 1회, 裵氏 1회, 禹氏 1회, 高氏 1회 순이다. 18세기까지 확인되던 康氏가 소멸되었으며, 都氏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음이 주목된다.
1901년부터 『義興校錄』가 간행된 1935년까지의 교임 임명 회수는 152회이다. 18~19세기 보다 임기가 늘어나는데, 이는 향교 교임 권위 강화와는 무관한 것으로 파악된다. 해당 교임은 향교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진 시점에서 일종의 명예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도유사와 직원은 37회 임명되었는데, 성씨별로 洪氏 9회, 李氏 9회, 朴氏 9회, 申氏 4회, 金氏 3회, 都氏 2회, 趙氏 1회 순으로 나타난다. 장의는 102회 임명되었으며, 성씨별로는 朴氏 34회, 李氏 20회, 金氏 9회, 洪氏 8회, 崔氏 7회, 都氏 6회, 蔣氏 5호, 申氏 4회, 孫氏 4회, 陳氏 2회, 趙氏 1회, 任氏 1회, 黃氏 1회 순이다. 재유사는 李氏 2회, 朴氏 1회, 蔣氏 1회, 尹氏 1회, 裵氏 1회, 河氏 1회로 모두 7회만 임명되었다. 20세기 이후 향교의 기능이 약화됨에 따라 재유사 임명이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한편 도집례는 朴氏와 趙氏가 각각 1회씩, 제향유사는 洪氏, 朴氏, 金氏, 孫氏가 각각 1회씩 임명되었다. 이를 종합하여 다시 성씨별로 나열하면 朴氏 46회, 李氏 31회, 洪氏 18회, 金氏 13회, 申氏 8회, 都氏 8회, 崔氏 7회, 蔣氏 6회, 孫氏 5회, 趙氏 3회, 陳氏 2회, 尹氏 1회, 裵氏 1회, 河氏 1회, 任氏 1회, 黃氏 4회 순으로 나타난다.
이상 1635년부터 1935년까지 300년간 교임 임명 회수는 1753회이다. 도유사는 총 395회의 임명이 이루어졌는데, 성씨별로 朴氏 131회, 洪氏 102회, 李氏 71회, 申氏 29회, 金氏 25회, 崔氏 10회, 都氏 5회, 趙氏 5회, 尹氏 5회, 康氏 2회, 陳氏 2회, 鄭氏 2회, 蔣氏 1회, 徐氏 1회, 沈氏 1회, 任氏 1회, 閔氏 1회, 權氏 1회 순이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의 직원 임명은 8회로 朴氏 3회, 洪氏 2회, 李氏 2회, 申氏 1회 임명되었다. 장의는 868회 임명되었는데, 성씨별로는 朴氏 349회, 洪氏 153회, 李氏 146회, 金氏 58회, 申氏 54회, 崔氏 39회, 都氏 26회, 蔣氏 9회, 孫氏 7회, 康氏 5회, 陳氏 5회, 權氏 3회, 柳氏 2회, 趙氏 2회, 任氏 2회, 丁氏 1회, 張氏 1회, 韓氏 1회, 嚴氏 1회, 吳氏 1회, 盧氏 1회, 文氏 1회, 黃氏 1회 순으로 나타난다. 재유사는 471회 임명되었으며, 성씨별로는 朴氏 195회, 李氏 76회, 洪氏 75회, 金氏 31회, 申氏 22회, 崔氏 19회, 康氏 9회, 都氏 9회, 陳氏 8회, 孫氏 7회, 蔣氏 4회, 林氏 4회, 裵氏 2회, 權氏 2회, 趙氏 1회, 尹氏 1회, 丁氏 1회, 吳氏 1회, 文氏 1회, 禹氏 1회, 高氏 1회, 河氏 1회 순이다. 그 외 도집례는 朴氏 2회, 趙氏 1회로 3회 임명되었으며, 제향유사는 洪氏 2회, 朴氏, 金氏, 申氏, 崔氏, 都氏, 孫氏 각 1회로 모두 8회 임명이 확인된다. 이를 다시 성씨별로 종합하면 朴氏 681회, 洪氏 334회, 李氏 295회, 金氏 115회, 申氏 107회, 崔氏 69회, 都氏 41회, 康氏 16회, 陳氏 15회, 孫氏 15회, 蔣氏 14회, 趙氏 9회, 尹氏 6회, 權氏 6회, 林氏 4회, 任氏 3회, 鄭氏 2회, 柳氏 2회, 丁氏 2회, 吳氏 2회, 文氏 2회, 裵氏 2회, 徐氏 1회, 沈氏 1회, 閔氏 1회, 張氏 1회, 韓氏 1회, 嚴氏 1회, 盧氏 1회, 黃氏 1회, 禹氏 1회, 高氏 1회, 河氏 1회 순이다. 각 성씨별 교임 배출 회수를 살펴보면 朴氏, 洪氏, 李氏 세 성씨가 전체 교임의 절반 이상을 배출하며 꾸준히 교임을 역임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의 인적 구성과 의흥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의흥향교는 경상도의 일반 서원들처럼 都有司, 掌議 체제로 교임이 구성되었으며, 齋有司를 두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들 교임은 지역 내에서 향교 운영을 주도했던 주요 재지사족들로 임명되었는데, 19세기 이후에는 의흥현감이 도유사를 역임하는 사례가 증가한다. 이는 전반적인 향교 교임의 권위 약화에서 비롯되었다. 실제 교임 가운데 수임인 도유사 재임 기간은 평균 1년 이상은 17세기가 유일하다. 후기로 갈수록 임기가 줄어드는 것은 교임이 명예직화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의흥의 사족들은 수령에게 향교 수임을 맡게 함으로써 관권을 빌어 향교의 권위를 높이려 했던 것이다.
한편, 역대 교임을 역임한 성씨의 비중은 조선후기 의흥 지역 향권 주도 세력을 가늠케 해준다. 전반적으로 朴氏, 洪氏, 李氏의 교임 역임 비중이 매우 높게 나타나는데, 이들 가문은 龜山朴氏, 興陽李氏, 缶溪洪氏 등으로 17세기 이후 꾸준히 의흥 지역의 향권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星州都氏 등은 18세기 이후 의흥향교를 매개로 의흥 지역 향권의 전면에 등장했던 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