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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공죽리관중건일기(笑窩公竹裏館重建日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8+KSM-WM.1860.4777-20160630.0632102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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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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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일기
내용분류: 개인-생활-일기
작성주체 이학영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작성시기 1860
형태사항 크기: 29.3 X 18.9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 24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인량 재령이씨 충효당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소와공죽리관중건일기(笑窩公竹裏館重建日記)
『소와공죽리관중건일기(笑窩公竹裏館重建日記)』는 운악(雲嶽) 이함(李涵, 1554~1632)이 만년에 세상의 일을 사양하고 한적하게 거처하면서 후학양성에 힘쓰던 정자인 죽리관(竹裏館)을 후손인 소와공(笑窩公) 이학영(李學榮, 1821~1884)1860년 죽리관을 중건하는 약 넉 달간의 과정을 당시의 생생한 필체로 남긴 기록이다. 특히 중건하는 당위성과 의미를 설명한 서문을 붙이고 있어 단순한 생활 일기보다는 사실의 기록에 중점을 두고 있는 자료적 성격이 강하다.
『운악선생문집』 권3, 부록, 「죽리관기(竹裏館記)」,
1861년 김진림(金鎭林) 서간(書簡), 한국학자료센터, 영남권역 데이터베이스
1차 작성자 : 박세욱

상세정보

이학영(李學榮, 1821~1884)이 자신의 선조인 운악(雲嶽) 이함(李涵, 1554~1632)이 세운 죽리관(竹裏館)을 중건하면서 기록한 것으로 1860년 2월 4일부터 5월 28일까지 약 4개월 동안을 기록한 중건일기
개괄
이 일기는 총 24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표지에는 ‘笑窩公竹裏館重建日記’라고 적혀있으며 ‘庚申二月 日’ 이라는 연도와 월이 기록되어 있다. 그 안에는 죽리관중건일기 서문(3면~4면)과 경신년(1860) 2월 4일(5면)부터 5월 28일(22면)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다. 각 면은 대체로 13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문을 제외하면 행초(行草)로 쓰였고, 특히 초서(草書)의 비중이 높다.
이 일기는 이학영(李學榮)이 관사(館舍)의 터를 정하는 과정부터 중건 때의 분정과 목수들의 집역, 현판 글자 등의 부탁, 죽리관을 짓는 과정, 향중의 모임과 회계, 여러 사람들의 역소 방문, 그리고 기문을 새기는 것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록의 목적이 서문에 잘 나타나고 있으므로, 서문을 번역하여 해제의 중심으로 삼고자 한다.
죽리관은 우리 운악(雲嶽: 李涵) 선조이신, 증(贈) 참판공(參判公)께서 깃들어 사시면서 이름한 곳이다. 삼가 추념하건대, 참판공께서 인끈을 던지고 전원으로 돌아와 명리의 굴레에서 자취를 감추고 시(詩)와 예(禮)를 집안에 전하여 마침내 해동 문헌의 조종이 되었다. 규모는 검박(儉朴)하고 화치(華侈)하지 않아 이신양성(頥神養性)하고, 유한(幽閒)한 풍치가 있었다. 장경당(張敬堂), 김학봉(金鶴峯)등 제 선배들과 수창(酬唱)을 상고해보면 대강을 알 수 있다. 세대가 점차 혼미해지면서 훌륭하신 분들은 여전히 각처(各處)에 흩어져 계시니, 이 관(館)은 불행이도 중도에 폐해져 이미 백여 년이 되어 남아있는 것은 겨우 한 조각의 옛 터만 있을 뿐이다. 돌아가신 부형(父兄)들께서 매번 가리키며 탄식했었다. 지금에 이르러도 중건의 계획을 할 겨를이 없었으나 비로소 백원지세(白猿之歲)의 상원절(上元節)에 여러 종인(宗人)들이 건설을 도모하여, 지사(地師)가 땅을 살펴 온천정 유좌(酉坐) 임(壬)의 땅을 골라, 다시 새 터를 결정했다. 여러 친척들이 한 집안씩 임무를 담당하여, 각자 구관(句管)하게 하고 재물을 낼 방도를 짜게 했다. 읍중(邑中)의 신 리(申吏)의 집을 사서 철거하여 지었다. 원근의 사우(士友)들이 서신으로 안부를 묻거나 직접 와서 묻고 칭찬하는 걸음이 이어졌다. 자손된 자로서 더욱 감축됨을 이길 수 없다. 중수하는 규모를 생각건대 화려하게 고치면 선인의 뜻을 체득하지 못할까 두려워 옛 규모로 고쳐 만들었다. 서너 개월 안에 공사를 마쳤다. 여러 친족들의 불굴의 정성을 여기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친족들이 일제히 낙성(落成)한 뒤에 모여 각자 노정(奴丁)을 내어 정원과 담장을 만들었다. 대나무 뿌리를 캐어 사면에 둘러 심고 바깥 정면에는 백장미와 벽오동을 줄맞추어 심어 훗날 이 관(館)의 승경(勝景)을 삼고자 했다. 대나무를 심어 표상한 것은 선조(先祖)께서 대나무 속의 그윽한 취향을 숭상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정(亭), 관(館), 원림(園林)은 고금이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 관(館)의 원림이 점차 문물의 부흥을 이룬다면 염계(濂溪)의 서당, 회암(晦庵)의 고정(考亭)과 아름다움 명성을 나란히 할 것이다. 어찌 성도(成都)의 초당(草堂)처럼 한 때의 아름다움에 그치겠는가? 중추에 지례(知禮)의 상사 김대진(金大鎭)의 기문을 벽 위에 판각하여 표저(表著)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천전(川前)김진곤(金鎭坤)이 ‘죽리관(竹裏館)’이라 큰 글씨를 써서 판에 새겨 이 관(館)의 얼굴로 삼으니, 오호라! 성대하도다! 금고(今古)에 변하지 않을 것은 대나무와 관(館)이요, 금고(今古)에 없어지지 않을 것은 우리 선조(先祖)가 아니겠는가? 나는 재능이 없었으나, 외람되어 중수하는 임무를 맡아 한마디라도 사실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어, 당시 힘쓴 일들의 전말을 대략 기록하여 내세에 조상을 위한 일이 이와 같았음을 보여주고자 하노라. 경신년, 황월, 하완에 후손 학영씀.
작자 소개
여기에 보이는 이학영(1821~1884)은 본관이 재령(載寧), 자는 성우(聖優), 호는 소와(笑窩)이다. 영덕군 영해면에 거주하였으며, 유고 2권이 전한다. 이함은 본관이 재령(載寧), 자는 양원(養原), 호는 운악(雲嶽)이다. 160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의금부 도사, 사재감 직장, 의령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으로 『운악선생문집』이 있다.
이함의 후손 이학영이 쓴 이 일기의 서문과 외후손 김대진(金岱鎭)이 쓴 「죽리관기(竹裏館記)」에 따르면, 죽리관은 이함(李涵, 1554~1632)이 만년에 세상의 일을 사양하고 한가하게 거처하면서 후학양성에 힘쓰던 정자 이름이다. 대나무 숲 사이에 건물이 세워져 있어서 죽리관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예전의 정자 터에서 약간 서쪽으로 벗어난 온천이 나오는 지점에 몇 칸을 중건하였다고 하였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 소로 수장, 홑처마, 팔작기와집이다.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있으며, 현판은 서산정(西山亭) 편액과 나란히 걸려있다.
김대진(金岱鎭, 1800~1871), 자는 태수(泰叟), 호는 정와(訂窩), 서계(西溪), 또는 유산(酉山)이라 하였다. 김화(金華)김홍규(金弘規)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치명(柳致明), 조언관(趙彦觀), 이만각(李晩慤), 이수영(李秀榮)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정와집(訂窩集)』 20권 10책이 전한다.
『운악선생문집』 권3, 부록, 「죽리관기(竹裏館記)」,
1861년 김진림(金鎭林) 서간(書簡), 한국학자료센터, 영남권역 데이터베이스
1차 작성자 : 박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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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공죽리관중건일기(笑窩公竹裏館重建日記)
竹裏館重建日記序。竹裏館。卽我雲嶽先祖贈參判公棲息。命名之所也。竊伏念參判公之投紱歸園。斂跡名韁。以詩禮傳家。遂爲海東文獻之祖。其隨時行藏。甘隱肥遯。卜築是館。而當日寓趣之意。不啻若七賢之竹林。少蘇之筠軒。蓋其規模儉朴。不尙華侈。頤養幽閑之風致。考諸張敬堂金鶴峯諸先輩之酬唱。槪可見已。世代寢迷。雲仍散在各處。玆館之不幸中廢。已至百餘年之久。而所餘者。只是一片舊址而已。先父兄每指點興歎。迄今未遑其重建之計。始於白猿之歲上元節。諸宗人合謀設。而擇其地師相土于溫泉井西坐壬之地。更定新基。而與諸親排任一門。使之各自句管。兼爲措畫其出財之方。而買其邑中申吏屋子。撤來營建。遠近士友。或以書問。或以躬問贊賀踏至。凡爲子孫者。尤不勝感祝。竊念重修制度。改爲華麗。則恐非體先之志。故仍舊制修葺。而三四朔之間。工役告訖。其於諸親之殫心竭蹶之誠。於此可見矣。周親齊員。咸會落成之後。各出奴丁。修築園墻。採取竹根。而四面匝種墻。外前面則白薔薇碧梧桐。成行列植。以爲日後。玆館之勝景。蓋種以竹表。想尙其先祖竹裏幽趣之意也。亭館園林之尙古今所同。而玆館之園林。漸成文物復興。則直與濂溪之書堂。晦庵之考亭。幷美齊聲。豈但如成都草堂。爲一時觀美已哉。迺於仲秋。以知禮金上舍岱鎭記文。板刻于壁上。以爲表著之資。以川前金鎭坤書竹裏館三大字。幷刻于板上以顔其館。於乎。盛矣。今古不變者。竹與館也。則今古不泯者。非我先祖也耶。余雖不佞。忝在重修之任。不可無一言記實。故略撮其時敦事顚末。以示來世爲先之事如此云爾。庚申黃月下浣後孫學榮記。 二月初四日。晴。邀地師相土于溫泉井西坐壬之地。舘基則洞中廢田。廚舍基址則空閑之地矣。舊基在於宗家大廳後少西。而松栗薈蔚。地形破碎。故移建于此耳。 五日。雲陰峭寒。本村諸族。各出奴丁。始爲撤屋。而年少則身自夯。當不憚勞苦。其爲先誠力。是亦不易之事也。是日楮谷族叔相健做洞族兄箕燦來宿宗堂。仍與諸親排任一門。而使之各自句管。兼爲措畫其出財之方。都都監李相健李箕燦。都監李相儒李相彦李心燦李相勣李鉉發。運材都監李相侃李壽坤李奎榮李鉉德李燦堉。運瓦都監李躋榮李纘榮李斗榮李壽根李鉉國。董役都監李相善李富榮李鉉植李再榮李壽昌李壽松李德榮李壽寅李晃榮李鉉重李國榮李鉉夏李鉉珏。掌財李台榮李秀榮李敎榮。直日李喬榮李學榮李性浩。 六日。雲陰風寒。蚤朝董本洞大洞軍丁。或運材或運瓦。軍丁五十餘名。牛隻二十餘駄。午點床價決定四分。楮谷李敎榮來破屋役所。因監役而歸。 七日。連陰。東風刀割。各村公私作者。抄名招來。而或遺漏。然是日軍丁七十餘名。牛隻二十餘數。 八日。陰寒。李壽昌李壽松往董。槐市軍丁連日運致材瓦。而瓦甓則盡來。材木則未盡運來。軍丁三十餘名。 九日。風寒稍解。李再榮李壽根李性浩三人。往懇元邱軍丁于該洞。上有司朴後永南孝源白進士基東得頷而來。 十日。雨。李壽松李富榮李鉉植三人以待日晴。董出校村軍丁之故。仍宿邑中。 十一日。午晴。族家收丁及牛隻運致材木。申時開基。川前金兄效則來問役所。 十二日。晴。木手尹金同。蚤朝招來。始設木役。而棟材多有新以者。故看擇宗家後麓之松。斫取六七介。蓋由於從近取便矣。元邱校村軍丁畢運餘材。多至七八十名。房二間突骨石。亦盡運來。木手饋餉。亦以四分價決定。一日三時。使本村下人。排定日數。輪次主餉矣。酒草則各家分排隨其力。亦有定例。槐市南丈公壽來問。魯谷李晃榮留宿監役。是日木手金大哲更來。以金同漢同事責成矣。 十三日。乍陰乍晴。村內軍丁三十餘名。終日地砧。午餉及酒盆。亦自族家辦出。元邱朴鎭奎同里朴東燦鄭退默來問役所。 十四日。陰雨飄洒。構成假家。以爲避雨之計。鄭學默來問。 十五日。晴。是日列礎。房堂制度皆底措置。本村鄭退默朴淳春來問。因李學榮龜湖之行。請書竹裡館三字。於川前金鎭坤許而來。 十六日。晴。立柱在於是日午時。材木未及斲成。僅立二柱。夕後。行成造祭。製祝李秀榮學榮。獻官則李鉉發也。行祀後招致村內奴丁。餉酒一盆。同日上棵木手給二貫錢。 十七日。陰。木手金同以治棺從去元邱。不來材木多有改備者。使李壽栢李性浩二人。往于新里李成三家。借材木十餘株。又得宋仁國家松六七株而來。李壽松李壽昌李鉉植三人。以邑中屋價事。往于池洞申吏家。本村朱丈宗烈權永觀來問。元邱南有道來問。 十八日。陰。木手大哲。亦歸渠家。故停役。村人朴載萬來問。反浦朴賢秀問役所。 十九日。朝雨晩晴。木手之作輟。無常故監役之人。散亂無統。使諸員排日監役。罔或遠越。反浦朴三秀來問。而終日談話。有兩家世好之誼焉。 二十日。夜雨雪。沒脚。朝后始晴。使村內軍丁。更構假家。雖暫時假構之具。數次構成。亦有苦悶矣。 二十一日。晴。材木多有不足。年小諸員。以伐材事上去。新里又伐忠孝堂後山。大木一株。爲四介材木。 二十二日。雲陰。木手連日栽〖裁〗度材木。或準斫取其文飾。或鋸斲制其方圓。棟桷楹杙。次第合度。而以爲從速了。刷竪柱之具矣。 二十三日。陰雨夕霽。以運致新里材木事。發牌于佳山洞長處。元邱白徽東來問。 二十四日。午後雨。佳山軍丁數十名。運來新里材木二十餘介。 二十五日。晴。材木又有不足之患。故李壽栢李性浩李再榮李鉉夏上去于篤洞。使洞口居民伐材而還。年前宗家家役時。余峴〖見〗路邊留置材七八介。使本村奴丁運來日池。李躋榮李鉉錫來役所。 二十六日。晴。木手一漢尙不來。石浦李秀榮來。留楮谷。而有書問焉。馬洞李漢榮來見役所。午后轉向槐市。翊日回路又來焉。 二十七日。夜雨雪。午晴。木手二漢始爲執役。而篤洞材木。使本村奴丁運來。 二十八日。乍陰乍雨。邑中屋價之未盡收刷事。發賣其基址。僅捧十三兩而畢給焉。 二十九日。小盡陰雨飄洒。素山金地師。適有過去之便。故使之又相新址。而贊不容口矣。 三月初一日。雨雪。序屬氤氳之節大地皆白是。何乖候之甚也。寒風如刀。天地愁殺。令人懍怖無已。屋役如前。而看事之人各以排定之日。擔當躬勞。罔或闕廢然。日氣如此。多有妨碍於事役矣。又出牌于丹山。奴根述處使佳山軍丁之㫰日不赴者。運致新里未來之材。而日寒不解。未免如意容或無怪。 二日。陰寒雨雪。木役漸有就緖。而猶未至立柱之境矣。龜峴金鎭林時適留宗家而來問役所。 三日。陰寒。將以再明爲立柱計。然凡百材木亦未照鍊矣。楮谷李壽岱來見。 四日。大雨。川流忽漲。假家之滲漏。多妨於事役。然更無完覆之道矣。 五日。雲陰。午前老少齊會。始立四間屋子。而東西兩頭燠室。中間凉軒。方圓規制允好。百年興廢之理。有數存於其間。而抑亦吾門運氣之一大關歟。 六日。快晴。閱月雨雪之餘。披覩靑天。足以蘇人心。未知自此而或有天工之助佑耶。發牌于碧水洞長處。壁木五六駄。使之不日來納焉。朱丈宗烈來見。下村李氏年少一人。以有所觀於木手處。故來坐望雲亭之原。而不來役所。 七日。晴。工役已畢。下方及堂簾。而材木太半有不足之患。蓋由於舊材之多棄。而力勢未逮。可憫。下村南丈有元有栻李丈泰鉉白丈河運來於役所。是必意有所在。蓋自正月屋事之後。無一人來見。而至有㫰日。李氏咫尺之來。而不見今此三四老人之行。雖是慇懃。然可怪亦可笑。旣爲相對。則前日事有多般說話。而終無自咎之心矣。 八日。陰。工役漸成屋子模樣。而椽木之塵黑者。看事諸人。以井水洗之。而將爲準斫計。是亦一大苦役耳。 九日。晴。工役如前。而基址之前面石築。諸族年少。身操版鍤。瞬息間登登告功矣。廣皐李相善以漁臺醮行便。歷來觀役而歸。 十日。雨。薄虧木入立。亦盡爲新改。以八錢決價。於篤洞居民。而不日內欲爲伐木計矣。碧水李若榮李壽岐來見。仍留而歸。楮谷李壽岱來見。本村田厚坤來問。所言無非。下村人之往來行言矣。 十一日。土雨四塞。不分咫尺。本村軍丁及牛隻。又伐材運來於篤洞。其材卽廚舍道里木之。不足及門骨等材也。年少四五人往檢其事。 十二日。晴。篤洞伐材。略爲運來於昨日。而所餘者。將以葛面。余峴軍丁運致計。 十三日。晴。看事諸員遞番隨從。而如意無遠劃。信覺爲先之誠心。而木手以玩愒時日爲心。若此則事役延拖物力。從以經過於所料。不可一任。渠漢之所爲。故諸族合席。更爲董勅分付於木手處。松川權度欽來問。元邱朴{宀/最}永亦問役所。 十四日。晴。木手一漢。以渠所觀告歸。一漢亦稱病。立柱後已過七八日。而其間所役。不多可歎。 十五日。晴。葛面余峴軍丁運致篤洞餘材。薄虧。刀鋸之役。諸族連日親執而不倦。元邱朴鎭奎鎭珏本村南有樸來問。 十六日。晴。稱病木手。以官事招去。而遲速未可知。其間亦浪費時日矣。元邱南孝源來問役所。 十七日。晴。東風寒峭。房兩間散子之上。始爲壓土而掛椽。亦以是日爲計。然木手一漢尙不來。日寒亦如是多妨於事役矣。朴桂彬田文郁田厚坤鄭退默朴東燦朴尙烈來見役所。 十八日。雲陰。夕後命一村軍丁三十餘名。負運壁土於役所。而以酒一盆餉之。半夜不止矣。 十九日。午後雨。木役僅備延檻。薄虧等物而姑未盡。蓋瓦之具。邑內捉去。木手則尙不來。 二十日。晴。食前命村內軍丁三十餘名。運致中間積置之瓦於役處。而猶未盡焉。朴東燦來問。 二十一日。晴。木手一漢始來。執役而凡百一未如意。槐市南氏五人來見役所。 二十二日。陰冷。木手之懇乞無比。故僅備四兩錢以給之。以明日爲蓋瓦計。故夕後老少會于役所。敦束無遺漏之獘矣。 二十三日。晴。運瓦之未盡者。便奴丁終日畢運。招來土手。始爲蓋瓦。石浦李秀榮來宿。楮谷族人五六員來問。監役李相儒有書問焉。 二十四日。土風。瓦役方張而揚沙。竊眞之變今後見焉。蓋瓦僅僅過半。而日氣若此。多妨於屋上之事。碧水壁木五駄來納。是日三溪書院通文到付仁山。而付於役所。蓋以其蒼雪權先生廟合享之事也。相議以二緡銅傳送焉。鄭退默來見。役丁二十餘名午餉。則各家輪次主之。 二十五日。晴。風勢少解。然猶未安穩。土手之告功。似在於明日矣。村人朴載萬來問。 二十六日。晴。木手照鍊堂板。而堂板似無不足之患。蓋瓦則已盡。而仰壁則未下手矣。村人權永觀來問。 二十七日。晴。連日潦雨之餘。日氣似有旱徵。屋上之役畢。而四底翼如眼藏甚好。古人所謂飛甍夾馳道之句。可以模想於此屋矣。 二十八日。雲陰。木手與土手俱去。故停役而率其奴丁數十名。開拓廚舍基址。而慮其下濕。故負土爲高而以爲地砧計。 二十九日。雨。仍停役。本村朱在鳳來問。 三十日。晴。前日假家。構於廚舍之基矣。到是欲開基而毁掇。故無避雨之所。仍於館堂設木役之所。木手兩漢俱來。魯谷李相勣來見。仍留六七日監董其役事。 閏三月初一日。晴。木手始爲廚舍之事。謀欲從近立柱。而亦未預必矣。 二日。陰。東風。木役仍如前日。反浦朴英燦來問。半日娓娓。有長者之風度焉。朴桂彬來問。 三日。晴。木手又以官事招去。故止役定門會于石川。宗君及族內諸員往參。區畫其四派之錢。各派以二十緡銅。篤洞若所四十貫。合一百二十兩。以從近收捧之意。爲限而來。 四日。晴。木手不來。而土工來。始爲仰土之役。元邱南有悳楮谷族喪人溥榮燦溵兄弟來見。 五日。午後雨。魯谷李相樺。以上芳洞有司之。故芳齋卄貫錢持來問役。而仍留是日。下芳洞錢卄緡。亦辦備。而爲先出給其需用之物。而餘在不過四五貫。兩派錢姑未入來矣。 六日。雨。午晴。木手來而始役。仰土則似畢於今明矣。 七日。晴。土木手以渠所觀告去。故止役矣。 八日。晴。東風忽起。木手來。爲廚舍之役。而材木許多有未備者。是日列礎。土手工價則三量決給而去。 九日。陰。東風。食後。立廚舍四間堂室。廚帑制度。雖小。然甚精緻。所餘之瓦。太半不足。添備極艱。未知何以措辦也。 十日。細雨。木手一漢則永歸。而金同獨爲執役。東里申生家積聚新瓦。故招來申生。以賣買言之。 十一日。雨。木手歸家。故停役矣。 十二日。乍晴乍陰。木手來。厥漢之往來無常。故賣之以無據之理。甚憾之。廚舍中下方已了。而明日則將構館堂。堂簾一介在於篤洞。非健奴則重不可遷。故尙未運來。白喪人熹運來問。 十三日。晴。以鐵物事。李再榮李壽昌二人。往于林頭亭。冶工家終日看檢而歸。 十四日。晴。東風甚酷。廚舍蓋瓦甚急。而農務方殷。軍丁無暇矣。 十五日。晴。以瓦甓不足之故。數人又見申生。請買其瓦而許可矣。然價置無策。其何以措辦也。 十六日。晴。諸族年少。率其奴丁十餘名。始爲元屋下方版築。而事功無幾。楮谷李相健相儒相垕來宿問役。元邱朴後永白星東來問。楮谷東坡兩派錢四十貫。因便到付矣。 十七日。晴。始入堂板。而人心巧惡。或見失多。有不足。將新備計矣。本村朴尙烈朴東燦來見。 十八日。晴。買其新瓦一縷於申生家。而價則決以卄貫。姑未越價。使奴丁運致基址矣。 十九日。雨。木手告病去。停役。 二十日。午前雨。 二十一日。晴。木手不來。而門材刀鋸之役。年少相遞番。終日而巨役之苦。自不覺支離矣。 二十二日。雨。水漲。 二十三日。晴。伐其軒檻簾木於宗家後麓。而不遠之地。長簾生木之運致極難。奴丁十餘名。或因繩以牽之。或駕牛而遂之。運於當處。朱在龍田厚坤來見役所。 二十四日。乍雨乍晴。木手來執役。而斧斫其軒檻長簾焉。 二十五日。晴。金同漢之每日稱病。由於先不越價之。故不得已又給十緡銅。 二十六日。晴。東風忽發。木手所役。只是軒檻之具矣。權永觀來見。松川金吏專爲來賀。吏胥之知此道理。甚可感也。 二十七日。晴。凡干事役甚急而折草。迫近廚舍之告功。似無期限焉。朴載萬鄭學默來見。 二十八日。晴。 二十九日。晴。廚舍蓋瓦不可待。奴丁之有暇。而諸族各執泥土之役。是日內畢蓋瓦之事。午點則沙村宅宗家餉之。魚臺權永斗歷問。 三十日。晴。村內老少咸集。而各執版鍤築下。而木手則仍治元屋之事矣。午餉安溪宅玉峴宅。 四月初一日。晴。老少分黨。或執刀鋸之役。或執版築之役。終日不已。鄭退默來問。午餉則龜湖宅。 二日。晴。木手之役。如前門間將營立。而所餘瓦無幾。不得已收各家麻骨以覆之。田致坤來問。 三日。晴。老少咸集。盡爲遞番刀鋸。或結壁木。或助工役。期於速成。午點則安德宅餉之。南敎夏來問。 四日。晴。老少合力。始付壁土。而初壁之一日刷役甚難矣。木手以所觀歸渠家。反浦朴載衡來見。 五日。晴。木手不來。將始房突之役。而俱是生疎。其中擇可堪之人。使之主事。而諸族助之。 六日。晴。木手來。而始牕戶之役。刀鋸之事尙未盡。衆力之一合實難矣。玉今權丈度正南丈有奭扶筇來問。爲餉午點。而盡日族話以歸。 七日。晴。東風甚峭。木手仍執。牕戶之役。而年少則治其竈底階級之地。朴東燦朴尙烈來見。 八日。雲陰。東風未解。是日成兩房突以至面土之境。而前日生疎之慮。無關於燠突之甚好矣。 九日。陰。木手又歸家。故止役。魯谷李相勣因內行而來。因留觀役所。元邱朴運永朴施永來問。 十日。雨。本村軍丁三十餘名。或負土。或聚石。仍開拓廚舍前面沙堤。而鑿{吐/乙}以決水矣。 十一日。陰。木手來執役。長老以門會事。往于楮谷。年少各自監董焉。魯谷李相辟來見。 十二日。晴。門材有不足之慮。將欲往伐于篤洞。而用力稠疊。何以爲之也。石浦族祖光羽族叔相尹來宿宗堂。仍觀役所。嘆賞其地形之允好。慰言其族親之克殫誠力。仍又留宿而歸。 十三日。晴。木手大哲始與之同事。而中間告歸矣。是日來。與金同漢共役。木手告功。似在不遠。酬應之物。先故關心處。元邱白進士基東龜尾權錫萬壽洞朴世綸來問。稱歎。 十四日。晴。二木手仍執役。反浦朴南秀守一亭南大陽來問。佳山南有集來觀役所。 十五日。晴。始畢門役。所餘者。只是廚舍之事耳。 十六日。晴。董率族中年少。構廚舍壁木。而以爲付土及房突之役矣。朴東燦來問。 十七日。陰。木手之別供。未將稱其渠意。而爲打一狗。又買魚鮮以饋之。 十八日。晴。 十九日。晴。木手皆以所觀歸家不來。 二十日。晴。 二十一日。晴。木手一漢來。而又以官役招去邑中。朴尙烈鄭退默來見。 二十二日。晴。木手一漢來執役。而大哲之去邑內。遲速未知矣。 二十三日。晴。將以是日一村老人。以爲來遊云。而竟寂無聞。諸族合力。再付廚舍壁土。終日乃止矣。 二十四日。晴。蚤朝招致冶工。以爲元屋廚舍。未盡之鐵物。設其店所。備其㸑木。各自夯着焉。 二十五日。晴。日旱太甚。曾傷之㤼無比。年少合力。隨從於治木之工。而廐舍椽木又不足。請得於朴氏後谷之邱木。而使之運致焉。美谷申宅敬新川朴致麟致龜兄弟歷路來問。 二十六日。晴。木手掛門間椽木。而前所麻骨之覆者。將以瓦改之。而未果焉。朱在龍來問。 二十七日。晴。旱氣尤甚。峽中則全未移秧。而僅僅先移者。亦枯田苗亦難救。愁歎愁歎。木手去。故停役。 二十八日。晴。木手乍往乍來。木役之已至收畢者。不如意。冶工亦歸家夕來。 二十九日。晴。木手又以官役招去。而冶工則仍爲鐵物之役矣。南有釗權永觀鄭退默來見。 五月初一日。雨。旱餘得霈。人心快蘇。未知有快活之漸耶。木手仍不來。 二日。雨。 三日。晴。木手蚤來執役。冶工則畢役而去。決價七兩六錢。買魚鮮以爲膾烹作飯。以爲老少一番會話之資。年少躬親勞苦之餘。有意辦設矣。朴載萬朴淳春來問。元邱南上舍皐來問。 四日。雨。㫰日少雨之歎。今始快洽焉。自此而各家移秧之務方急。凡干看事之道。似不如前日。而各相勅戒。無亡懈怠矣。李敎榮李德榮來見役所。元邱南致和白來問。 五日。晴。是日迺天中節也。淸虛之想。異於凡他節日。鞦韆半仙之戱。紅綠遍野之行。亦足以添新亭之一時觀玩。未知東山之妓瑟。子夜之仙簫。果能以加於此哉。遂命酒女沽酒一壺而來。快飮滌胸。而老少紅潮。或偃臥或詼諧。終日以遊。信覺古人之破除萬事。無過酒之意也。 六日。晴。木手治軒檻未盡之役。而午後又歸家。 七日。晴。木手不來。 八日。晴。惠風和暢。暖日方長。木手尙不來。渠之所爲。極可駭惡。木役之所餘不過數三日事。而若此延拖者。苦憫苦憫。朴東燦朴亨燦權永觀來見。 九日。陰。 十日。大雨。川流忽漲。不得通涉。 十一日。雨。 十二日。晴。蚤朝招木手。而厥漢以渠之移秧方劇不來。又送使喚。而又不來。 十三日。雨。 十四日。雨。 十五日。雲陰。東風甚峭。空亭巋然。老少或出觀。而無看事之由。自七日以後延拖至今者。實由於木手之不來。且兼之以農務之方急矣。 十六日。晴。木手尙不來。槐市南有{金+宬}南朝漢來見。 十七日。晴。木手不來。反浦朴丈宗秀下村南丈有元李丈泰鉉白丈河運來見。 十八日。晴。木手始來而執役。年少諸員。或助木役。而或執土功。期以二三日內。爲斷手計矣。 十九日。晴。食後收合各家眞末。以前日所買紙。塗其牕戶及四壁。以爲防風之道矣。 二十日。雲陰。命村內軍丁。使之築階。而凡于土役之未盡者。看審其所役處。以爲稱意無疎漏矣。 二十一日。晴。木手近日之所役。只是些少等事。而不可一一枚擧。而告功似在於今明日間矣。 二十二日。晴。木役將放手。故老少啇量會計其前者。派前所用之餘。而凡干末梢都用下。似有不足焉。 二十三日。晴。木手始告成而歸。老少齊會。爲其設供億之物。而將論價渠以百數言之。而日中不決。又宿而無歸趣。午後始以五十五緡銅決送焉。遂使村居之沈厚邑是典守廚舍矣。 二十四日。晴。一村老少咸至。老成之人。看檢其事役。年少之人。躬親其勞苦。四面墻垣。連日築成。而以爲蓋覆。又築後面石築。而使兒少輩採取竹根。四面匝種。前面則白薔薇碧梧桐新枝。以爲眼藏之好景。蓋種以竹。表其竹館之意也。是日村人五六各姓人來見。 二十五日。晴。老少齊集。以爲此屋旣成。後不可無一番落成之會。故擬欲設白日場。而招鄕中儕友。以爲一日之遊。而無現在之物力。竟未果焉。諸族老少。是日夕食後以爲入宅。而皆集。達夜兩房亦狹隘矣。是夕本村他姓人亦來遊。而夜深後歸家。 二十六日。雲陰。老少看事之人齊會。會計其前後用下之數。而太半不足。果何以辦出酬用也。 二十七日。晴。諸族合議。以本村戶數爲先。收合牟數與秋穀。而量其勢力。以爲多小之冩出住幹。趁期収捧而滋殖之。又於明年春秋穀亦如之。使之遞任看撿焉。 二十八日。以後無事可記。而又於其時學榮。適値遠遊。從以闕焉。迺於仲秋。始刻竹裡館三大字。以顔其室焉。又以知禮金上舍岱鎭記文。幷刻付于壁上。以爲表著之資。自此以後。下村各姓老少諸員。或因公會來于此堂。或由洞事會也此室。吾姓之人。無後以此屋設施時。相持事對言。下村人亦無此等辭色。信覺居隣世如之間。前日之事。亦獨仁心哉。庚申黃鍾月下浣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