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李學榮, 1821~1884)이 자신의 선조인 운악(雲嶽) 이함(李涵, 1554~1632)이 세운 죽리관(竹裏館)을 중건하면서 기록한 것으로 1860년 2월 4일부터 5월 28일까지 약 4개월 동안을 기록한 중건일기
개괄
이 일기는 총 24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표지에는 ‘笑窩公竹裏館重建日記’라고 적혀있으며 ‘庚申二月 日’ 이라는 연도와 월이 기록되어 있다. 그 안에는 죽리관중건일기 서문(3면~4면)과 경신년(1860) 2월 4일(5면)부터 5월 28일(22면)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다. 각 면은 대체로 13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문을 제외하면 행초(行草)로 쓰였고, 특히 초서(草書)의 비중이 높다.
이 일기는 이학영(李學榮)이 관사(館舍)의 터를 정하는 과정부터 중건 때의 분정과 목수들의 집역, 현판 글자 등의 부탁, 죽리관을 짓는 과정, 향중의 모임과 회계, 여러 사람들의 역소 방문, 그리고 기문을 새기는 것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록의 목적이 서문에 잘 나타나고 있으므로, 서문을 번역하여 해제의 중심으로 삼고자 한다.
죽리관은 우리 운악(雲嶽: 李涵) 선조이신, 증(贈) 참판공(參判公)께서 깃들어 사시면서 이름한 곳이다. 삼가 추념하건대, 참판공께서 인끈을 던지고 전원으로 돌아와 명리의 굴레에서 자취를 감추고 시(詩)와 예(禮)를 집안에 전하여 마침내 해동 문헌의 조종이 되었다. 규모는 검박(儉朴)하고 화치(華侈)하지 않아 이신양성(頥神養性)하고, 유한(幽閒)한 풍치가 있었다. 장경당(張敬堂), 김학봉(金鶴峯)등 제 선배들과 수창(酬唱)을 상고해보면 대강을 알 수 있다. 세대가 점차 혼미해지면서 훌륭하신 분들은 여전히 각처(各處)에 흩어져 계시니, 이 관(館)은 불행이도 중도에 폐해져 이미 백여 년이 되어 남아있는 것은 겨우 한 조각의 옛 터만 있을 뿐이다. 돌아가신 부형(父兄)들께서 매번 가리키며 탄식했었다. 지금에 이르러도 중건의 계획을 할 겨를이 없었으나 비로소 백원지세(白猿之歲)의 상원절(上元節)에 여러 종인(宗人)들이 건설을 도모하여, 지사(地師)가 땅을 살펴 온천정 유좌(酉坐) 임(壬)의 땅을 골라, 다시 새 터를 결정했다. 여러 친척들이 한 집안씩 임무를 담당하여, 각자 구관(句管)하게 하고 재물을 낼 방도를 짜게 했다. 읍중(邑中)의 신 리(申吏)의 집을 사서 철거하여 지었다. 원근의 사우(士友)들이 서신으로 안부를 묻거나 직접 와서 묻고 칭찬하는 걸음이 이어졌다. 자손된 자로서 더욱 감축됨을 이길 수 없다. 중수하는 규모를 생각건대 화려하게 고치면 선인의 뜻을 체득하지 못할까 두려워 옛 규모로 고쳐 만들었다. 서너 개월 안에 공사를 마쳤다. 여러 친족들의 불굴의 정성을 여기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친족들이 일제히 낙성(落成)한 뒤에 모여 각자 노정(奴丁)을 내어 정원과 담장을 만들었다. 대나무 뿌리를 캐어 사면에 둘러 심고 바깥 정면에는 백장미와 벽오동을 줄맞추어 심어 훗날 이 관(館)의 승경(勝景)을 삼고자 했다. 대나무를 심어 표상한 것은 선조(先祖)께서 대나무 속의 그윽한 취향을 숭상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정(亭), 관(館), 원림(園林)은 고금이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 관(館)의 원림이 점차 문물의 부흥을 이룬다면 염계(濂溪)의 서당, 회암(晦庵)의 고정(考亭)과 아름다움 명성을 나란히 할 것이다. 어찌 성도(成都)의 초당(草堂)처럼 한 때의 아름다움에 그치겠는가? 중추에 지례(知禮)의 상사 김대진(金大鎭)의 기문을 벽 위에 판각하여 표저(表著)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천전(川前)의 김진곤(金鎭坤)이 ‘죽리관(竹裏館)’이라 큰 글씨를 써서 판에 새겨 이 관(館)의 얼굴로 삼으니, 오호라! 성대하도다! 금고(今古)에 변하지 않을 것은 대나무와 관(館)이요, 금고(今古)에 없어지지 않을 것은 우리 선조(先祖)가 아니겠는가? 나는 재능이 없었으나, 외람되어 중수하는 임무를 맡아 한마디라도 사실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어, 당시 힘쓴 일들의 전말을 대략 기록하여 내세에 조상을 위한 일이 이와 같았음을 보여주고자 하노라. 경신년, 황월, 하완에 후손 학영씀.
작자 소개
여기에 보이는 이학영(1821~1884)은 본관이 재령(載寧), 자는 성우(聖優), 호는 소와(笑窩)이다. 영덕군 영해면에 거주하였으며, 유고 2권이 전한다. 이함은 본관이 재령(載寧), 자는 양원(養原), 호는 운악(雲嶽)이다. 160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의금부 도사, 사재감 직장, 의령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으로 『운악선생문집』이 있다.
이함의 후손 이학영이 쓴 이 일기의 서문과 외후손 김대진(金岱鎭)이 쓴 「죽리관기(竹裏館記)」에 따르면, 죽리관은 이함(李涵, 1554~1632)이 만년에 세상의 일을 사양하고 한가하게 거처하면서 후학양성에 힘쓰던 정자 이름이다. 대나무 숲 사이에 건물이 세워져 있어서 죽리관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예전의 정자 터에서 약간 서쪽으로 벗어난 온천이 나오는 지점에 몇 칸을 중건하였다고 하였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 소로 수장, 홑처마, 팔작기와집이다.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있으며, 현판은 서산정(西山亭) 편액과 나란히 걸려있다.
김대진(金岱鎭, 1800~1871), 자는 태수(泰叟), 호는 정와(訂窩), 서계(西溪), 또는 유산(酉山)이라 하였다. 김화(金華)와 김홍규(金弘規)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치명(柳致明), 조언관(趙彦觀), 이만각(李晩慤), 이수영(李秀榮)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정와집(訂窩集)』 20권 10책이 전한다.
『운악선생문집』 권3, 부록, 「죽리관기(竹裏館記)」,
1861년 김진림(金鎭林) 서간(書簡), 한국학자료센터, 영남권역 데이터베이스
1차 작성자 : 박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