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괄
『모당일기(慕堂日記)』는 일직 손씨(一直孫氏) 대구종중 소장본으로 손처눌(孫處訥, 1553~1634)이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 1월 8일부터 1629년 12월 26일까지, 즉 30년 동안을 기록한 생활일기이다. 원래는 필사본 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후 후인들에 의해 6책으로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각 권은 150면-180면의 분량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권은 1600년 1월 8일에서 1605년 7월 25일까지, 2권은 1605년 7월 26일부터 1610년 12월 29일까지, 3권은 1611년 1월 9일부터 1613년 12월 19일까지의 기사를 적어 놓고 있다. 마지막(6) 권의 끝부분에 약간의 낙질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 매우 완정한 자료이다. 용지는 10행의 놋쇠 줄이 있으며, 글씨는 매우 반듯하게 정서되어 있으며 간혹 행서로 쓴 부분도 보인다. 년과 월은 독립된 한 행을 차지하고 있으며, 기사는 대체로 날짜별로 줄을 바꾸어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짧을 경우 죽 달아 쓴 경우도 상당부분 보인다. 자간의 여백을 두어 높임을 표현하는 것도 잘 지켜지고 있지만, 생각이 나지 않거나, 민감한 내용인 경우 오려 내거나 배워둔 경우도 있다. 교정부호, 오른쪽에 추기한 글자, 음가의 혼동으로 인한 오기도 눈에 띈다.
이 모당의 일기가 친필의 필사본인 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몇 가지 사실들만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상당부분 저자의 부연설명(주)이 두 줄의 작은 글씨로 삽입되어있다. 이러한 주석들은 일기를 쓸 당시에 추가된 것인지, 아니면 초고들을 본인이 다시 옮겨 쓰면서 생각나는 대로 부연설명을 가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각 면은 10행의 놋쇠 줄이 있는 용지를 사용하고 있는데, 기사가 다음 줄로 넘겨쓰기 애매한 경우는 마치 주처럼 작은 ‘쌍행소자’로 기록하고 있다. 둘째 기사의 내용들을 보면, 간혹 하루의 기사 속에 이틀의 기사가 섞여있는 경우를 만날 수 있다. 즉 시간적 시점이 중복되는 경우가 있으며 공간적 시점이 일치하지 않는 곳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셋째 6권까지의 필체가 서로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사람의 손으로 필사되었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사람의 이름을 거명할 경우 대부분 자(字)로 표기하고 본명을 주석 처리한 경우가 많은데, 전후가 일관적이지 않고 중복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서사원(徐思遠)을 부르는 명칭은 행보(行甫), 낙재(樂齋), 이천(伊川), 행보형(行甫兄), 서형(徐兄) 등으로 통일되지 않았다. 넷째, 난외 주석이 거의 없다. 한편 주인공은 1612년 하반기부터 일기를 직접 편수하고 있고, 위의 네 가지 근거를 토대로 저자의 친필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한편 임인년(壬寅年, 1602)년의 일기는 12월 5일로 끝나는데, "이하는 기록을 잃어버렸고, 계묘년(癸卯年)의 일기도 모두 잃어버렸다.(已下失錄, 癸卯日記亦全失)"라고 한 것이라 했고, 제 1책이 끝나는 시점인 을사년(乙巳年, 1605년, 53세) 7월 25일의 마지막을 보면 "이 다음 다섯 달 일기는 다음 권에 상세히 기록했다(此下五月記詳次卷)."라는 부연설명이 추가되어 있다. 하지만 제 2책이 끝나는 곳과 제 3책이 끝나는 곳에서 이러한 언급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저자가 일기가 끝나는 시점인 1629년 12월 26일부터 1634년 6월 15일 몰한 시기 사이에 산재된 일기 자료들을 수합하여 다시 편집하였다고 볼 수 있고, 낙질된 부분을 추가하여 다시 필사했을 것이다.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1612년 하반기부터 자신의 일기를 꾸준히 편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다시 필사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대로 썼을 것이기 때문에 필체가 다른 것 또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일기가 소개된 경위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다. 일반적으로 『연보』는 일기를 기준으로 작성된다. 모당의 몰년은 1634년 6월 15일이므로, 모당은 약 3년 반 동안 일기를 쓰지 못한 셈이다. 일기 이외에 모당의 전반적 행적을 알 수 있는 소상한 자료는 모당의 재종질인 졸암(拙庵) 손단(孫湍, 1626-1713)이 쓴 「유사(遺事)」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기록은 『모당집』이 1784년 목활자본으로 처음 간행될 때, 수록되었다. 이 유사는 손단이 고성현령(固城縣令)을 지낼 당시에 쓴 것으로 서명되어 있는데, 손단은 1668년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내고 있었으므로 그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 잠(潛)이 구당을 수리하고 유문(遺文)을 수록하여 삼가 가장(家狀)을 엮었는데 들은 바를 참고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손단의 「유사」는 모당의 일기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초간본(1784)에는 연보가 수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만 해도 모당의 연보는 편찬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모당집은 1849년 목판본으로 중간되는데, 바로 이 중간본에 연보가 실려 있다. 따라서 연보 편찬 작업은 1784-1849년 사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당일기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연보 작성에 참고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모당일기(慕堂日記)』는 대구지역에서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유학의 학풍을 재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학문적 영향력, 학맥 형성 과정 속에서 손처눌(孫處訥)의 역할을 조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일기는 임진왜란 직후 이 지역 한강 학맥의 결집과 분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모당 손처눌의 소실(燒失)된 자료를 보완하고 확충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평가한다.
작자 소개
일기의 작성자 손처눌(孫處訥)은 명종 8년(1553) 6월 25일 대구부 수성리에서 태어나, 갑술년(甲戌年) 1634년 6월 15일까지 살다가 고종(考終)한 조선 중기, 17세기 대구지역 유학의 기틀을 새롭게 연 학자로 큰 족적을 남겼다. 자(字)는 기도(幾道)이다. 임진왜란 당시 양친을 연이어 잃고 예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황청동(黃靑洞, 오늘날 황금동) 묘소아래 집을 짓고 평생 시묘살이를 한다는 뜻으로 당호를 ‘영모당(永慕堂)’이라 붙이고, 여기에서 평생 공부와 강학에 힘썼기 때문에 그를 모당(慕堂)선생이라 칭했다. 1685년(숙종11)년 황청동에 기리는 사당을 지었고, 1694년에는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한강예설중찬(寒岡禮說重纂)』, 『가례의절전서(家禮儀節傳書)』은 소실(燒失)되었고 다만 후세에 자료들을 모아 편집한 『모당집』 3권과 이제 소개할 『모당일기』만이 전한다.
1) 출생과 가족관계
부친(父親)은 선무랑(宣務郞) 손수(孫遂, 1523-1598)이고 어머니는 한산(韓山) 이씨 이단(李但)의 딸로, 명종 8년(1553) 6월 25일 대구부 수성리에서 태어났다. 17세(1569년) 3월 광주 이씨 송암(松巖) 이원경(李遠慶, 1527-1571)의 딸과 결혼하는데, 장인 이원경은 한강 정구 선생과 망년지교를 맺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모당은 35세 되던 해(1587)에 후사 없이 아내를 잃었다. 이듬해 하성(夏城) 조씨 조응의(曺應義)의 딸과 재혼한다. 이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나이 47세(1599)가 되어서야 첫아들 손첨(孫添)을 얻고, 50세 되던 해(1602)년 둘째 아들 손잠(孫潛)을 얻었으며, 55세 되던 해(1607) 9월 셋째 아들 손침(孫沈)이 태어났다. 이후 67세가 되던 해(1619) 조씨 부인을 잃게 되는데, 그 사이에 여식 3을 두었다. 맏아들 손첨은 서희득(徐熹得)의 딸과, 둘째 손잠은 전귀당(全歸堂) 서시립(徐時立, 1578년생)의 딸과, 막내 손침은 권기종(權起宗)의 딸과 혼인을 했고, 세 딸은 순서대로 장선득(張善得), 이경진(李景鎭), 김순대(金順大)와 결혼했다.
부친 형제 중에 손회(孫廻), 손적(孫迪)은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세 명의 고모는 순서대로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 1535-1612), 이운배(李雲培), 이례복(李禮福)에게 시집갔는데, 모당의 일기에는 영천에 사는 첫째 고모부가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복례는 팔거(八莒) 고모부로 추정된다. 모당의 형제는 동생 1명뿐이다. 3살 아래인 그는 오매정(五梅亭) 손처약(孫處約, 1556-1618)으로, 모당과 상당히 긴밀한 형제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모당과는 달리 1613년 진사에 급제하였고, 모당과 함께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에게 수학하며, 동생으로서 친구로서 제자로서 모당을 그림자처럼 따랐다.
이외에도 언급할 만한 친지는 손린(孫遴, 1566-1628)으로 저자보다 13살 연하의 숙부이다. 자는 계진(季進), 호는 문탄(聞灘)으로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문인이다. 160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이후 저자와 함께 회재(晦齋)와 퇴계(退溪)선생을 위해 「부정척사문(扶正斥邪文)」을 써서 내암(來巖)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을 논척하여 벼슬길이 막혔다가, 1615년 안동교수 (安東敎授)가 되고, 1618년 예문관봉교를 거쳐 1623년 인조반정 뒤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 병조좌랑, 단성현감을 지내면서 저자의 강학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따랐다. 마지막으로 아우 손처약의 사위인 이응기(李應祺) 또한 모당을 측근에서 모시며 종유(從遊)했다.
2) 배움과 강학
『연보(年譜)』에 따르면, 이미 9살 때부터 『소학(小學)』을 읽기 시작하여 13세에는 『대학(大壑)』을 읽었다. 14세(1566년) 가을부터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1532-1585)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16세에는 처음으로 향해(鄕解)에 합격하여 향인(鄕人)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스승을 따라 팔공산 파계사에서 수학하였고, 20세 되던 해(1572)년에는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 ?-1593)선생과 학문을 강론하기도 했다. 이후 31세(1583년)에는 인동(仁同)에서 1살 아래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과 경학을 강론하였다. 1855년 스승 전경창이 죽고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과 심학을 강론하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비록 한강선생과의 만남은 늦게 이루어졌지만, 낙재 서사원에 버금가는 사제의 정을 나누고 있다. 일기는 이러한 두 사람의 내적 관계를 고스란히 기록해 두고 있다.
1599년에는 임진왜란으로 망가진 대구 향교의 재건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1601년 영모당 곁에 두 칸의 재사(齋舍)를 두어 동쪽은 ‘산택재(山澤齋)’, 서쪽은 ‘풍뢰헌(風雷軒)’이라 이름 지어 강학의 장소로 삼았고, 이듬해 2월에는 경산 동학산(動鶴山)에 있는 암자를 중수하여, 강학장소로 활용하여 임진왜란 이후 황폐화된 강학의 길을 열었다. 이러한 토대마련을 위한 노력의 결과는 임인년(1602) 연경서원(硏經書院)의 중수로 결실을 맺게 된다. 이는 당시 전경창(全慶昌)의 계동정사(溪東精舍),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1529-1584)의 압로정(狎鷺亭),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의 선사서당(仙査書堂)이 있어 그런대로 소규모의 강학활동을 이어갔지만, 개인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연경서원은 향교와 더불어 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명실상부한 사적 교육의 장을 형성했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3) 충효의 실천
임진왜란에 와중에 연이어 잃은 부모님에게 자식으로서 상례를 다하지 못한 마음에 경자년(1600) 묘소아래 평생 시묘살이를 한다는 뜻으로 "영모당(永慕堂)"을 지어 못 다한 효를 종신토록 실천했다. 이로서 사람들은 그를 ‘모당선생’이라 일컬었다. 이후 그의 일과에는 제사뿐만 아니라, 선조의 사당에 배알하는 것, 부모님들의 생신제사, 계절제사까지 한 차례의 거스름도(역병이 돌 때에는 제례를 그침) 없이 정성을 다한 모습이 그의 일기에는 여실히 새겨져 남아있다. 특히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1545-1609)과 의례에 관해 논한 기록, 한강 정구선생께 제례에 관해 여쭌 내용 등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임진왜란에 당시 수성지역 의명대장을 맡으며 적극적인 구국활동을 했으나 1593년 2월 19일 부친을 잃었고, 이듬 해 1594년 2월 14일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일선 활동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정유재란에서는 다시 의병을 일으켜 달성(達成)지역을 지키는데 공을 세웠으며,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아우 손처약(孫處約)을 화왕산으로 보내 창병활동을 돕게 했다. 일기에 나타난 인물들은 대체로 이 당시 의병활동을 함께한 사람들로 끈끈한 인적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후 갑자년(1624) 이괄(李适)의 난에도 당시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군량조달에 적극 가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묘호란(1627)에서도 마찬가지로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 조달에 힘썼다. 이러한 충효의 실천 그리고 늙음을 잊은 학구열과 강학활동은 그를 대구 지역의 큰 인물로 자리매김 시켰을 것이다.
4) 교우관계
모당은 비교적 적은 친족 구성을 가지지도 못했고, 벼슬살이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실천에만 전념했지만, 임진왜란의 구국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좌도(左道) 도유사(都有司), 서원장, 유사(有司)를 지냈으며, 한강 정구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영남 전역에 걸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모당일기』에서는 이러한 폭 넓은 인적관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데, 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삶의 가장 가까이에서 교제한 인물로는,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 1550-1611), 태암(苔巖) 이주(李輈, 1555-1604),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 1547-1615), 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 1561-1638),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1569-1634)등이 학문과 강학활동에 긴밀하게 힘을 나누고 있고, 남간(南澗) 최흥국(崔興國)은 일상에서 가장 오래 시간을 모당과 함께한 친구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부강정(浮江亭)의 주인으로 한강(寒岡), 낙재(樂齋), 모당(慕堂) 그리고 영남의 선비들의 연결고리로서 지리적 중심에 있는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 1566-1639)을 들 수 있고, 이 밖에서도 많은 일상의 시간들을 함께하며 이웃형제로 살았던 전계신(全繼信, 1562년생), 이경배(李景培, 1558년생) 등은 전란 때부터 구국활동에 함께 참여했던 친구들로 언급할 만하다. 지리적 활동범위는 자신의 집을 중심으로 황금동, 파동, 팔공산, 금호강, 연경동, 불로동, 이천(伊川), 경산, 영천, 인동, 청도, 고령, 성주, 밀양, 안동, 상주, 창원 등을 들 수 있겠다.
상세 내용(4책에서 6책까지)
4책(1614년 1월 1일부터 1616년 12월 30일까지)
총 152면(앞뒤표지 포함)으로 분권되어 있다. 표지 오른편 상단에는 갑인(甲寅), 을묘(乙卯), 병진(丙辰)등 3년의 간지를 기록하여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614, 62세)은 평년과 같은 새해인사, 서신왕래, 와병으로 인해 17일 예정되었던 한강 정구선생의 손자인 정유희(鄭惟煕)의 관례에 빈으로 참석하지 못한 일, 학생들을 공부시킨 것, 그리고 일상적인 의례들이 행간을 채우며 시작된다. 이때 한강선생의 노곡(蘆谷)정사가 불타 2월에는 낙재 서사원이 중심이 되어 사수(泗水)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일을 처리하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3월에 들어서며, 한강선생과의 교왕(봄나들이, 강론)과 움직임이 중심에 기술되어 있고, 시론(時論) 즉 대북파와의 대립과 갈등을 언급한 기사가 많아진다. 4월에는 『가례의절(家禮儀節)』을 베껴 쓴 일, 선사재(仙査齋)에서 한강선생과 대규모 강회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계속하여 모당은 『주역』 건괘를 읽고 있다. 농사일, 향변, 우도에서 정온(鄭蘊, 1569~1641)을 신원하는 움직임, 성주의 생일잔치 등 일상적인 행동들이 5월에 언급되어 있다. 6월에는 『가례의절(家禮儀節)』을 교정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하순에는 이수(二水)를 방문한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7월은 한강 선생의 생일을 맞아 회원들이 모여 잔치하고 외유를 즐긴 기록과 퇴계 향립조약서 발문에 이름을 올린 것이 눈에 띈다. 8월은 서신왕래, 손설(孫渫)의 구설, 일기 편수, 『주역』을 읽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9월의 기록은 일실되었다는 언급도 없이 사라지고, 10월이 이어지는데, 성주와 함께 동화사에 유람한 일, 서시립(徐時立)의 효행 등이 특기 되어있다. 11월에는 한강 선생의 아들인 정장(鄭樟, 1569~1614)의 죽음이 가장 큰 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어지는 마지막 달은 역시 『주역』과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을 읽으면서 일상적인 모습으로 62세의 한 해를 마감한 기록은 남겼다.
을묘년(乙卯年, 1615, 63세)는 이수(二水: 영천)에 계시는 고모를 찾아뵙는 것으로 시작하며 18일까지만 기록하고 있다. 일기는 2월 6일부터 다시 시작되는데, 대북정권의 영수인 정인홍(鄭仁弘)이 체임되었다는 소식과 한강 선생에게 『주역』의 글귀로 가르침을 받았다는 기록을 특기하고 있다. 3월에는 고모의 축수연에 다녀 온 일, 정계의 움직임들, 그리고 계속하여 『이락연원록』을 읽고 있다. 4월은 동반자였던 낙재(樂齋) 서사원의 죽음이 가장 큰 일로 기록되어있고, 주자서(朱子書)와 『주역』 독서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며, 서사원의 행록을 초했다는 사실도 눈에 띈다. 낙재 죽음의 여파가 이어지는 5월에는 아들 서항(徐恒)을 위로하고 한강 선생을 찾은 일과 학질에 걸려 고생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6월에는 또 다른 동지인 곽재겸(郭再謙)의 죽음이 이어지고, 한강 선생을 병문안한 것, 낙재를 위한 제문과 만사를 지은 일 그리고 이수 고모의 생신에 가서 축하를 드린 일들이 행간을 채우고 있다. 7월은 비교적 조용하고 일상적이다. 가뭄과 선생의 생신에 찾아 뵌 일, 손첨(孫添)을 보내 창산(昌山)에 사는 누이를 찾아보게 한 것이 눈에 띈다. 8월은 향교에서 벌어진 소동에 대한 처벌한 기록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고, 특히 품관(品官)들이 사문을 능멸하는 태도를 비판적으로 기사화하고 있다. 청도에 방문한 것과 「부정척사문」을 짓게 된 배경이 기술되어 있다. 윤 8에는 통문한 내용 때문에 경상 우도 사람들의 지척을 받았는데, 바로 임금을 범하고 좌상(左相)을 핍박했다는 오해를 받게 되어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9월에는 낙재의 발인으로 시작하여 한강 선생과 박이립(朴而立)이 상소하여 대립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10월에는 자천서원(紫川書院)의 봉안제에 관한 일들과 인동(仁同) 수씨(嫂氏)를 모셔오는 일들이 기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어지는 달도 일상적인 모습, 말하자면 한강선생을 병문안한 일, 집안의 대소사, 자신의 병치레 같은 것들이 행간을 차지하며 일기의 면모를 보여준다. 을묘년의 마지막 달은 이종문(李宗文) 집안과의 통혼(通婚) 경위가 언급되어 있고, 조카 정호인(鄭好仁)이 장가드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병진년(丙辰年, 1616, 64세)은 이지파(李之葩)를 사위로 얻는 일로 즐겁게 시작되며, 예전처럼 신년인사들이 오고가며 이수 고모께 세배하는 행차가 기록되어 있다. 2월에는 문필사건으로 중문(中門)에서 삭제된 일과 삼촌 손린(孫遴)이 상주제독에 제수된 일이 기사화 되어있다. 이어지는 달은 모당의 몸이 좋지 않아 한강선생을 찾아보지 못하고 서신으로 왕래하고 지인들의 병문안이 언급되어 있다. 4월에도 몸은 완쾌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일상적인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특기할만한 것은 손기양(孫起陽, 1559~1617)과의 만남과 그에 따른 차운시를 주고받은 일에 주목할 만하다. 5월에도 일상적인 기사들로 이어지지만, 손기업(孫起業, 1565~1626)과의 갈등, 한강 선생이 손린을 칭찬한 일이 눈에 띄고, 황해감사 윤조원(尹調元)이 고변한 사건이 언급되어 있으며, 계속하여 『이락연원록』을 읽고 있다. 6월에는 형장을 남용했다고 파직된 해주목사 최기(崔沂, 1553~1616)에 대한 후문, 고모님의 생신잔치, 정사진(鄭四震, 1567~1616)의 죽음이 기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어지는 달은 오랜 친구였던 전계신(全繼信)의 죽음과 숙질(叔姪)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에 대해 간접적인 언급으로 채워졌다. 8월에는 영천에서 풍을 치료하고 돌아오는 한강선생을 찾아 뵌 일과 조카 정호인이 별시(別試)에 합격한 것이 중요하게 언급되어 있다. 9월에는 선생의 새로운 서재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축하와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고 회원들과 회합을 가진 일이 두드러지게 기술되어 있다. 이어 전계신의 만사를 짓고, 여헌 장현광의 사위인 박홍경(朴弘慶)의 인사를 받은 일, 마천령이 무너져 많은 사람이 압사한 소식으로 10월을 마감했고, 11월은 일상적인 기사들로 15일까지만 채워져 있다. 그 중에서 남산 누이의 병세를 지켜보고 그 차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마지막 달은 감기로 가래가 끓고 천식을 앓고 있다. 그 와중에 선생의 안부를 묻고 「석세(惜歲)」 2수와 입춘에 관한 시를 지어 64세의 한 해를 마감하고 있다.
5책(1617년 1월 1일부터 1620년 12월 29일까지)
전체 140면(앞뒤표지 포함)으로 분권되어 있고, 표지 오른편 상단에는 정사(丁巳), 무오(戊午), 기미(己未), 경신(庚申)등 4년의 간지를 표기하여 두었다.(내지에도 동일하게 보임)
정사년(丁巳年, 1617, 65세)은 친인척들과 지인들의 인사와 서신 왕래를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2월에는 역시 이수(二水)에 계시는 고모를 찾아뵙는 성실함을 보이고 있고, 한강 선생을 병문안한 일, 그리고 졸고를 수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주역』을 읽고 있다. 3월에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선생을 찾아 뵌 일, 한양 소식(경운궁 투서)가 기록되어 있다. 4월에는 아우 손처약(孫處約)의 딸의 초례(醮禮)를 언급할 만하고 나머지는 일상적인 모습니다. 5월에는 노곡(蘆谷)에서 불타 소실된 예설(禮說)을 다시 성책(成冊)함으로써 그에 따른 축하가 기록되어 있고, 조카 정호인(鄭好仁)이 하도회시에 합격한 일을 특기하고 있다. 6월에는 주인이 죽자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전주 나씨의 개에 관한 일화가 눈에 띄고, 7월에는 좌도(左道) 시소(試所)에서 벌어진 소동과 그에 따른 뒷수습, 선생의 생신 잔치에 간일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일상적인 기사들로 채워진 8월에는 합천의 상소모임에 관한 기사가 눈의 띈다. 9월에는 동래온천에서 돌아오는 한강 선생을 교외에서 영접한 일이 기록되어 있고, 사위인 이지파(李之葩)가 북평사로 차임된 일이 언급되어 있다. 이어지는 달은 『계몽(啓蒙)』을 읽으면서 자신의 일기를 편수하는 일에 할애하고 있다. 낙재 부인의 축수연 그리고 아내의 치통, 특히 한강 선생과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선생의 일화에 대한 기록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11월 모당은 고산서원(孤山書院)과 사빈(泗濱)으로의 행차가 가장 큰 움직임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그 나머지는 매우 평범한 기사들로 채워졌다. 마지막 달은 인동(仁同) 행차와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의론과 한강 선생의 전은설(全恩說)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무오년(戊午年, 1618, 66세)의 1월은 여느 해처럼 일상적인 인사들이 기록되어 있고, 한강 선생의 손자인 정유희(鄭惟煕)의 가례(嘉禮)와 곽종경(郭宗慶)의 딸을 친영한 사실이 눈에 띈다. 2월에는 한강 선생의 무고를 중심으로 작성되어 있고, 다음 달은 역병(疫病)이 돌아 조용하게 『주역』을 읽으면서 보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4월에는 채몽연(蔡夢硯)을 변호한 일이 특기 되어 있고, 윤 4월에는 손첨(孫添)의 연부례, 장현광(張顯光)의 방문에 관한 기사가 채워져 있다. 5월에는 요동지방의 군사적 충돌에 대한 소식이 이외에 별다른 특별한 기록은 없다. 6월에는 이이첨(李爾瞻)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옥중에서 죽은 곽영(郭瓔: 일기에는 ‘泳’자로 되어 있음)에 대한 소식에 주목할 만하며, 고모를 찾아뵙는 성실함도 기록되어 있다. 7월에는 한강 선생을 위한 축수연이 특기 사항으로 매우 일상적인 기사로 채워져 있다. 8월은 선생과 위급한 시국에 위기감 없는 세태를 비판하는 기사가 눈에 띄는데, 모당의 성실하고 원칙론적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9월에는 이지영(李之英, 1585~1639)이 부친(이종문)을 위해 마련한 잔치에 초대 받아 간 일, 허균(許筠)의 흉악한 술수가 특기되어 있다. 10월에는 남원에 『예경』 인쇄를 요청한 일, 역병이 돌아 손첨(孫添)이 천연두에 걸린 것이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이어지는 달은 손첨의 병이 나은 일과 『주서(朱書)』를 읽은 것이 주된 기사거리로 자리하고 있다. 12월에는 다시 손잠(孫潛)이 역병에 걸려 고생한 일, 「부정척사문」으로 야기된 우도(右道)와의 갈등과 대립, 채몽연(蔡夢硯) 부자를 변호한 일을 기록하며 66세의 한 해를 마감하고 있다.
기미년(己未年, 1619, 67세)에 모당은 『예기』를 읽고 있으며 새해 친지와 지인들의 왕래로 인한 접대로 분주하게 시작된다. 그리고 「부정척사문」의 파장이 2월 기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3월에는 박회무(朴檜茂, 1575~1666)와의 만남, 적진에서 투항하지 않고 싸우다 전사한 김응하(金應河, 1580~1619)에 관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4월에는 현내(縣內) 제원들과 수암(燧巖)으로 춘유한 일을 기록하면서 아내의 병환 속에 『예기』를 읽고 있다. 달이 바뀌어도 특이한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고 이어지는 6월에도 학질을 앓아 일기의 내용이 매우 빈약하다. 절의를 지켜 전사한 김응하를 위한 만사를 지었다는 기사가 주목된다. 7월은 손설(孫渫)과 이응기(李應祺)가 향시에 합격한 기쁜 일로 시작하지만 결국 아내의 죽음(7월 16일)을 맞게 되어 일기는 9월에야 다시 시작된다. 9월에는 아내의 장사를 준비하는 과정과 일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10월은 10일부터 기록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달을 표기할 때는 한 행을 할애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바로 9월 25일자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편수상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20일간의 기록에는 묘역을 조성한 일과 참여한 일꾼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11월에는 동화사(桐華寺)에 들어온 박치의(朴致義, 박충간의 서자) 사건에 대한 기술과 한강 선생과 이수의 고모를 찾아 뵌 일을 기록하고 있다. 12월은 감기에 걸려 집안의 대소사를 기록하며 조용하게 한 해를 마감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경신년(庚申年, 1620, 68세)은 한강 정 선생의 죽음으로 시작되며, 그 슬픔으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모당은 심하게 몸살을 앓아 18일까지밖에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2월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선생의 만사를 짓고 있으며 조세에 대한 걱정 등이 사실 그대로 기술되어 있다. 3월에도 몸은 완쾌되지 않아 기사가 누락(잃어버림)된 곳이 많이 보이며, 안타깝게도 병 때문에 선생의 장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심경이 기록되어 있다. 4월에는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을 낙재 서사원과 함께 병립하는 문제를 논한 기록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기록의 대부분을 잃었다고 모당은 토로하고 있다. 5월에는 송영구(宋英耈, 1556~1620)의 몰락에 관한 소식이 가장 눈길을 끌고 있다. 6월은 여느 해처럼 이수(二水)의 고모님을 찾아뵙고 축수한 일을 기록하고 있으며 7월은 한강 선생의 손자 정유희(鄭惟煕)의 죽음이 주요기사로 자리하고 있다. 8월 역시 각종 집안의 대소사와 주변 지인들의 소식이 여느 때처럼 나열되어 있다. 다음 달인 9월은 4일까지만 기록되어 있고, 그 이후 29일의 기사만 남아 결국 도합 5일간의 일상적인 기사만 남아있다. 10월에는 최동률(崔東嵂, 1585~1622)의 향사에 관한 의론이 눈에 띄고, 이 달 또한 24일까지만 기록된 불완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11월의 기록은 일실되었다고 언급하고 있고, 이어지는 68세의 마지막 달은 아들 손잠(孫潛)의 불길한 꿈에 따라 소천(小川)에 나가 우거하며 전전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6책(1621년 1월 1일부터 1629년 1월까지)
이 『모당일기』 마지막 권은 모두 152면(앞뒤표지 포함)으로 분권되어 있으며, 표지 오른편 상단에는 신유(辛酉)에서 경오(庚午)까지의 연간지를 표기해 두고 있다. 139면부터 상단 여백부분의 손상이 심해져 끝으로 가면서 내용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이 심하다. 내용은 모당이 69세 되던 해인 1621년부터 78세가 되는 1630년 1월까지의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신유년(辛酉年, 1621, 69세)은 소천(小川)에서 우거생활을 하면서 맞는다. 1월 13일까지의 기록만 남아있고 2월과 3월의 기록은 없어졌다. 이후 정안번(鄭安藩)의 투옥과 정병을 선발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기사만을 기록해 두었고, 8월과 9월의 기록은 없어졌다. 10월 모당은 이수(二水)로 고모를 찾아뵙고, 인동(仁同) 묘사에 참석하고 있으며, 11월에는 9일까지의 기록만 남아 있다. 12월은 낙재 서사원(徐思遠) 종사(從祀) 논의가 시작되고 향현사의 위차(位次) 논의가 심화된다. 명나라 군대가 후금(後金)을 크게 물리쳤다는 기사로 69세를 마감했다.
임술년(壬戌年, 1621, 70세)은 새해 인사하는 풍경으로 시작되고 있으며 콧병을 앓고 있다. 이수(二水)에 있는 고모님에 대한 문안이 각별해진다. 영천 향교에 중들이 방화한 사건,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의 입사(立祀)를 주장한 내용, 신구임 수령에 대한 기대와 실망, 『예기(禮記)』를 베낀 일, 6월 고모의 죽음 등이 기술되어 있다. 7월은 아들에 관한 기록이 많이 보이고 21일 이후에는 기록이 없다. 9월에 대성전(大成殿)의 담장을 개축하는 일, 10월 고모님의 최사(衰事)와 이종문(李宗文)이 벼슬살이에서 귀향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11월 12월의 기록은 없다. 따라서 70세 되던 해의 기록은 9개월 남짓한 기록이 지면을 채우고 있다.
계해년(癸亥年, 1622, 71세)은 3월의 기사부터 시작된다. 지난해 11월부터 없었던 기록이 1, 2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3월은 『주서』를 강질하면서 시작되는데, 사우(祠宇)를 짓는 일, 정원군(定遠君) 둘째 아들을 임금으로 추대한 일, 이이첨(李爾瞻)의 네 부자가 복주(伏誅)된 일, 기자헌(奇自獻)이 좌상이 되고 정경세(鄭經世)가 부제학이 된 시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4월에는 성주의 파직과, 사우 축성, 창녕(昌寧)의 통문과 상소가 언급되어 있고, 23일부터 기록된 5월에는 손린(孫遴)의 병과 그를 문안한 사실들이 들어있다. 또 6월은 11일까지만 기록되어 있는데, 신임태수 박명부(朴明溥)의 부임, 세자 폐위, 손린이 전적(典籍)에 올랐으나 병 때문에 나아가지 못한 일 등 중요한 기사만 추려 써 놓은 듯 한 인상이 짙다. 7월부터 10월까지 성실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윤우(李潤雨, 모당의 처종질)이 남궁랑(南宮郞)으로 나간 것, 손린이 사헌부 감찰이 된 것, 채몽연(蔡夢硯)과 신원하는 통문을 보낸 일, 향공사(鄕貢士) 시험, 손기업(孫起業)이 좌수가 된 일, 정병(精兵) 징발, 성주(城主)가 외손자들을 데려와 가르침을 청한 일, 도망 간 여종을 성주에게 부탁한 일 등의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지는 윤 11월은 4일까지만 기록되어 있는데, 손린이 전적으로 사은숙배하러 감에 전별한 일만 기록학고 있다. 지난해처럼 11월 12월의 기록은 없다. 전체 약 8개월간의 기록인 셈이다.
갑자년(甲子年, 1623, 72세)는 6권의 기록 중에서 가장 성실하게 채워져 있다. 1월은 7일까지만 보이는데, 예년과 같은 새해 인사에 따른 왕래이므로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때 원장 망기(望記)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2월부터 9월까지, 대성전(大成殿)에 지의(地衣)를 갈고자 한 일, 이괄(李适)과 한명련(韓明璉)의 거병, 그에 따른 창의(倡義), 종군과 군량을 결정한 일, 이괄의 참수(이상 2월), 역병, 순사(巡使) 민정징(閔星澄)의 파직, 망사암(望思庵) 공사를 마친 일, 위안제, 많이 노쇠해진 몸, 『포은선생문집』을 읽은 일(이상 3월), 서원 청액(請額), 낙재(樂齋)의 종사(從祀), 청액소을 올리는 과정(이상 4월), 이지영(李之英)이 북청(北靑) 통판이 된 일, 소를 올린 결과, 사우(祠宇)를 짓는 논의를 시작한 일(이상 5월), 선사(宣賜)를 청하는 소와 생일을 전후로 오고간 사람들과 일상의 기록(6월), 향현사(鄕賢祠) 위차(位次)문제를 논의하는 모임, 장현광(張顯光)과의 논의를 기록하고 있고, 9월에는 손린(孫遴)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것과 같은 중요한 일만 기록하고 있다. 10월은 기록이 없고, 11월 마을의 불화와 손설(孫渫)이 마련한 축수연 자리를 언급하고 있으며, 12월 모당은 『퇴계집(退溪集)을 읽고 있으며 홍역 발생을 끝으로 72세를 마감했다.
을축년(乙丑年, 1624년, 73세)은 도경유(都慶兪)가 사마시에 합격하여 그에 따른 잔치로 시작하고 있다. 수학하러 오는 학생들, 성주를 전송하고 맞이하고 서신의 왕래를 3월까지 기록하고 있으며, 4월에는 채몽연(蔡夢硯)과 함께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의 행록을 논하고 있고, 이수(二水)의 행차가 기술되어 있다. 특히 한강(寒岡)이 계동을 인정한 기록이 눈에 띈다. 5월에는 이지파(李之葩)가 북청에서 돌아온 일을 비롯하여 일상적인 일들이 기록되어 있고 6월은 5일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새 수령 조국빈(趙國賓)의 부임이 특기되어 있다. 7월에도 손린(孫遴)의 축수연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이후 일기는 기록되지 않았고, 12월 1일이 되어서야 시작되는데, 호패법, 낙재(樂齋)와 계동(溪東)의 우열과 위차와 관련된 이야기들, 정원군(定遠君)의 죽음, 조형도(趙亨道)에게 장자(障子)를 받은 일들이 기록되어있으며, 특히 계동을 ‘충청효우(忠淸孝友)’라고 표현하고 있다.
병인년(丙寅年, 1625, 74세)의 1월은 간단하게 손님맞이와 장현광의 편지를 받은 것에 대해 한 줄로 기록하고 있다. 2월 들어 자신이 열흘 동안 아팠던 일을 기록하고 11일에는 한강선생의 시호를 문목공(文穆公)으로 개판한 것을 특기하고 있다. 조임도(趙任道, 1585~1664)의 사람됨, 사당에 현자를 모시는 일에 유보적 자세를 취한 서시립(徐時立)에 대한 기록이 이어지고 있고, 4~5월에는 화암(畵巖)에 나가 서원의 사당 건립을 감독한 일과 그에 따라 왕래한 사람들, 손기업(孫起業)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지는 6월은 개와(蓋瓦)를 마치고 당계(黨契)를 마련한 일, 장현광이 가선대부에 오른 일을 9일까지만 특기했다. 이어지는 윤 6월에는 부강정(浮江亭)에 행차하여 류위중(柳衛仲)의 연꽃을 감상한 일, 성주가 계동선생을 몰라본 것에 대해 미안해 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7월에는 처남 이심민(李心慜)이 첩을 구하는 일, 정온(鄭蘊)의 파직, 계동의 행록을 산삭하고 교정하기 위해 인동(仁同)을 다녀온 일을 기록했다. 이후 5개월은 아무런 기록이 없다.
정묘년(丁卯年, 1626년, 75세)의 1월은 1일만 기록하고 병 때문에 15일이 되어서야 시작된다. 이후로 일기를 거르는 일이 많아진다. 중요한 사건들만 기록하고 있는데, 정묘호란이 발발하여 의병을 모집했으며, 장현광이 호소사(號召使)가 된 것, 손린(孫遴)이 의병장이 되고 자신이 모량유사로 차임된 일, 이어지는 화의 소식, 손린을 대신하여 의병장이 된 일, 화의에 따라 군병을 해산하고 평소생활로 돌아온 것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4월에는 손잠(孫潛)의 혼기를 잡은 일, 경산 안흥사(安興寺) 행차, 납폐 등이 기록되어 있고, 5월에는 도경유(都慶兪)가 의금부 도사가 된 사실만 특기되어 있고 빼먹는 날이 유난히 많아지고 있다. 6월에는 손린이 병조좌랑에 제수된 일, 생일을 맞아 연경서원 임원들의 위로를 받은 일이 언급되어 있고, 7월에는 연지(蓮池)에서 벗들과 꽃을 감상한 이후로 아들들을 데리고 망사암(望思庵)에 우거하기 시작한다. 8월에는 사고(私稿)를 쓰기 시작하며 손설(孫渫), 손린(孫遴), 서립지(徐立之) 집을 왕래하며 우거하고 있다. 이후 9, 10, 11, 12월의 기록은 병인년처럼 아무런 언급도 없다.
무진년(戊辰年, 1627년, 76세)은 지진과 손님맞이로 시작되며, 며느리의 병을 돌본 일, 손린이 예조정랑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임한 일과 채선길(蔡先吉)이 보낸 선물이 기록되어 있고, 2월에는 4일 간의 기록만 보이는데, 감기 때문에 이어지는 약방문이 고작이다. 3월은 기록이 없고, 4월 친구 최강후(崔康侯)의 생일에 초대되어 남곡(南谷) 행차, 파계정(巴溪亭), 소유정(小有亭), 동화사(桐華寺) 등지로의 나들이가 언급되어 있다. 10일부터 시작한 5월은 서립지(徐立之)의 옥사와 손린의 병이 재발한 일이 행간을 차지하고 있고, 6월에는 서립지가 석방되어 동료들과 도리동(道理洞)에 들어가 위로한 11일의 기사를 마지막으로 일기는 11월이 되어서 다시 시작된다. 사람과 서신의 왕래, 손잠이 임수사(臨水寺)에서 독서한 일이 기록되어 있고, 12월에는 몸이 불편한 일이 더욱 많아지고, 인적·물적 왕래가 지면을 차지하고 있고, 뿔이 난 말이 나타났다는 기록으로 76세의 해는 마감되었다.
기사년(己巳年, 1628년, 77세)의 기록들은 유난히 고르지 못하다. 13일까지만 기록된 1월은 이수(二水)의 조카들이 다녀간 것과 용천사(湧泉寺)에서 공부하는 손잠(孫潛)에게 쌀을 보낸 일을 기록하고 있다. 윤 4월에 시작되는 기록은 왜놈 사신이 온 것과 우순필(禹舜弼)이 좌수가 되고, 양경수(楊景洙)가 별감이 된 것, 경성에 가뭄이 들었다는 소식이 언급되어 있다. 5월에는 이어지는 가뭄으로 손처약(孫處約)이 조족산(鳥足山)에 기우제를 지낸 일과 식솔들의 동태를 많이 기록되어 있다. 생일이 들어 있는 6월에는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가는 성주를 전별한 일, 생일에 찾아준 사람들이 행간에 쓰여 있다. 7월 들어 왜 사신이 부강(浮江)에서 동래로 돌아가는 기록을 시작으로 중요한 사실들만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노비에 관한 일로 경산에 행차한 일, 도리동(道理洞)에 간 아들 손잠을 기다린 일이 많이 노쇠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8월에는 감시(監試)가 있어 지장사에 들어가 종이 만드는 것을 감독한 일과 주변에 입격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기사를 차지하고 있다. 9월은 1일과 2일의 기록뿐으로 손설(孫渫)이 아비를 위해 축수연을 연 것이 기록되어 있다. 10월에도 겨우 5일간의 기록만 보이는데, 17일 인동(仁同) 행차가 10월의 중요한 일정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145면부터 자료의 상단 훼손이 심해지면서 정확한 일자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27일 장경우(張慶遇)의 집에 있고, 다음 날은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에 묵은 사실이 분명하게 보인다. 11월에도 날짜가 훼손되어 정확성을 기할 수는 없지만 1일 장내범(張乃範), 이충민(李忠民)의 집을 거쳐 당(堂)으로 돌아 온 여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15일에는 망참례(望參禮)를 지내는 기록, 손잠이 아들을 얻는 일이 기록되어 있는 가운데 갑자기 4일로 바뀌는 것으로 보아 12월로 추정된다. 5, 8, 9, 11, 13, 15일의 기사가 남아 있고, 날짜 없는 기사가 이어지며, 30일 정호인(鄭好仁)이 부(府)에서 와 묵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다음 기사는 "절사(節祀)를 지냈다. 손님을 접대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해가 바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오년(庚午年, 1629년, 78세)은 1월의 기사들만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7, 9, 14, 19, 24, 26일이며, 마지막으로 "양천(陽川) 사람 오징(吳憕)이 보러왔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이후 일기가 더 남아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지만 앞서 본 것처럼 노쇠하여 일기 쓰는 일이 힘들어진 것으로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