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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정세용(鄭世容) 외 1인 위장(慰狀)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F.1867.4723-20150630.K27140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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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정세용, 정태용, 최시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작성시기 1867
형태사항 크기: 32.5 X 36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대구 칠계 경주최씨 백불암종중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67년 정세용(鄭世容) 외 1인 위장(慰狀)
1867년 9월 8일 鄭世容鄭泰容이 査丈의 襄禮를 조문하기 위해 崔峕敎에게 보낸 慰狀이다. 査丈의 襄禮가 닥쳐 殯墓를 열게 된 것을 위로하며 조부모와 형제들의 건강을 걱정하고 혼가의 관계인 자신들의 애끓는 심정을 말하였다. 자신들 또한 부모상을 당한 처지이고, 3개월 동안 분주하다가 달초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 나머지이며 또한 重慈의 병이 심해 가지 못함을 전했다.
1차 작성자 : 김정민

상세정보

1867년 9월 8일, 鄭世容, 鄭泰容이 査丈의 襄禮를 조문하기 위해 崔峕敎에게 보낸 慰狀
1867년 9월 8일 鄭世容鄭泰容이 査丈의 襄禮를 조문하기 위해 崔峕敎에게 보낸 慰狀이다.
査丈의 襄禮가 닥쳐 殯墓를 열게 된 것을 위로하며 조부모와 형제들의 건강을 걱정하고 혼가의 관계인 자신들의 애끓는 심정을 말하였다. 마땅히 달려가 상여 줄을 잡아야 하나 자신들 또한 부모상을 당한 처지이고, 3개월 동안 분주하다가 달초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 나머지이며 또한 重慈의 병이 심해 가지 못함을 전했다. 예를 잘 치를 것과 슬픔을 조절해 어버이의 심정을 위로하기를 바라였다.
수신인인 최시교(1844~1918)는 본은 慶州이며, 字는 子順, 號 漆滸이다. 백불암 최흥원의 5대손으로 대구 漆溪(옻골)에 거주하였다.
1월 21일, 아들 崔周鎭(1724~1763)이 아버지 崔興遠(1705∼1786)에게 가족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먼저 아버지가 보내신 편지를 받아서 할머니와 아버지께서 병이 심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걱정이 된다고 하고 있다. 이어서 여러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외지에 지내고 있는 자신과 여러 족숙들의 상황을 알리고 있다. 편지의 내용 중에 승려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최주진은 절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기는 먹는 일을 간소히 하여 하여 승려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있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끝으로 문희(文喜)의 혼례 준비가 잘 되고 있는 지를 물으며 편지를 마치고 있다. 추록에는 자신이 지내는 곳에 삼이 적어서 집에서 부탁한 미투리를 짜서 보내지 못한다고 하고 있다. 이어서 사교(沙橋)의 행차가 오늘 있다고 하는데 그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고 종숙께서 오산(吳山)의 행차에서 돌아오셨다고 하니 혹시 들은 일이 있으신지 묻고 있다. 또한 이곳에 한 중이 몸이 안 좋아서 우선 막으로 내보냈는데 혹시 유행병이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하고 있다.
발급자 최주진는 자는 공보(公普), 호는 동계(東溪)이고 양진당(養眞堂) 류영(柳泳)의 딸과 결혼하였다. 대산(大山) 이상정(李相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종덕(金宗德)김강한(金江漢)이종수(李宗洙)정충필(鄭忠弼)이천경(李天慶) 등 과 교유하였다. 선조였던 대암(臺巖) 최진중(崔鎭仲)의 ‘용연정’을 중수한 뒤 그곳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수취자 최흥원은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초(太初) 또는 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 이다. 대구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최수학(崔壽學)이고, 아버지는 최석정(崔錫鼎)이며, 어머니는 진사 조화(趙崈)의 딸이다. 1782장악원주부·공조좌랑을 거쳐 1784세자익위사좌익찬(世子翊衛司左翊贊)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대대로 달성칠계에 살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이 편지는 외지에서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집안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는 등 과거 양반 가문의 가족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한 중이 병에 걸려서 막으로 내보내는 모습을 통해 과거 전염병에 대처하는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1차 작성자 : 김정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67년 정세용(鄭世容) 외 1인 위장(慰狀)

崔 生員 僉苫前。
疏上。稽顙謹封。
稽顙言。日月不爲孝子留居。頃
先府君査丈襄禮已迫。蒭靈將啓。
孝思罔涯。何以爲心。伏惟
重堂筋力。易致疚損。
聯棣哀侯。難以支將。居在知舊尋常地。猶不勝悲溸怛怛。矧吾姻
婭之誼。不得一番進哭於
几筵者乎。世容等。卽當匍匐。而爲虞憂所沮。今又當執紼。而三朔
奔迸。初生始歸敝廬。序節興觸。萬事疚心。且重慈添患。筋力
奄奄。情私若玆。人事遂廢。不敢於廬下者。以爾非或飭詐。悲愧
一倍。餘伏祝
襄事利行。節哀順變。以慰
親志。荒迷不備。伏惟
哀察。疏上。
丁卯 九月 八日。罪弟 鄭世容 泰容 疏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