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齊淵(1807-1890)이 1860년 3월 30일부터 그 해 12월 30일까지 기록한 생활일기
개괄
이 서행일기(西行日記)는 반남(潘南) 박씨 판관공파(判官公派)의 박제연(朴齊淵, 1807-1890)이 1860년 3월 30일부터(4월 8일 한양도착) 그 해 12월 30일까지 기록한 생활일기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양 반촌(泮村)에서의 관직생활 기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전체 자료는 총 24면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제 일기는 3면에서 시작하여 13면까지, 모두 11면으로 끝난다. 이후 14면부터 21면까지는 북한산에 친구들과 놀러 갔던 짧은 기행문과 지인들이나 친척들에게 쓴 편지 그리고 북한산을 유람하며 지은 시편들을 모아두고 있다. 표지에 "庚申閏三月三十日西行日記"와 "補聰"이라는 기록에 따라 본 일기의 제목은 『경신서행일기 보총(庚申西行日記 補聰)』라고 명명한다.
작자 소개
저자 박제연(朴齊淵)은 1875년(고종 12) 8월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6)가 쓴 당호편액이 남아있어(국학진흥원 소장)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박제연(朴齊淵), 정묘년(1807)년 12월 6일에 태어나 경인년(1890) 윤2월 22일에 졸하니 84수를 누렸다. 자(字)는 성원(聖源)이요, 호는 오헌(吾軒)이다.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 1764-1842)에게 경전공부를 배웠으며 경자년(1840)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1847년 연이은 부모상을 당했다. 이후 임자년(1852)부터 16년 동안 전적(典籍), 지평(持平), 감찰(監察), 정언(正言), 장령(掌令), 장악원정(掌樂院正), 군자정(軍資正), 좌·우통례(左·右通禮)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병술년(1886)에는 가선대부에 올라 병조참판에 제수되었고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의금부도사를 겸직했다. 학봉(鶴峯)선생 후손인 김한수(金漢壽)의 따님과 결혼하여 두 아들 좌양(左陽)과 우양(右陽)을 두었다. 저서로는 『오헌유고(吾軒遺稿)』 3권이 전한다고 한다.
상세 내용
1면 표지에 따르면 "庚申閏三月三十日西行日記"라고 되어 있고 오언율시가 1수가 희미하게 보이고 다시 큰 글씨로 "補聰"이란 두 글자가 보인다. 9월26일 조목에는(10면) "원임대신과 각신(閣臣)들이 승후(承候)차 입시하여" 임금에게 아뢴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비변사등록』(247책 9월 27일 조목)에서 보이는 "진면(陳勉)하는 영부사(領府事) 정원용(鄭元容, 1783-1873) 등의 계(啓)"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표지에서 말한 "경신년"은 1860년(철종11)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기의 제목은 경신년(1860) 윤 3월 30일부터 쓴 서행일기(庚申閏三月三十日西行日記)가 되는 셈이다. 한편 큰 글씨로 표지에 쓰인 두 글자 "補聰"은 글자그대로 "들은 것을 보충한다."는 뜻으로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얻는 견문들을 문서로 기록해 둔다는 의미의 부제목으로 추정된다.
일기 저자에 관하여 반남박씨 무섬마을 오헌(吾軒) 박제연(朴齊淵, 1807-1890)고택에 소장되어 있던 필사본이고, 일기의 내용에는 법전(法田)과 하상(河上)등의 지명으로 보아 반남박씨 판관공파(判官公派)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특히 7월 25일 기사에서는 자신이 장령(掌令)에 제수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자신의 이름은 "○○"로 처리하였다. 다시 『일성록』의 1860년 7월 25일 조목을 찾아보면 "박제연이 장령이 되었다(朴齊淵爲掌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서행일기는 박제연(朴齊淵)의 친필 일기로 추정한다. 또한 일기에서 나타난 친인척들의 관계 그리고 강이서(姜而瑞), 안치묵(安致黙, 1826-1867), 조병악(趙秉岳)등과의 친밀한 교우관계는 이를 잘 방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3면에서 13면까지의 일기는 상경하는 여정을 도착하는 4월 8일까지 묘사하고 있으며, 이후는 서울에 사는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인사한 일들, 찾아온 지인들에 관한 기록이 중심을 이룬다. 여느 일기에서 보이는 것처럼 본가와 주고받은 편지 내용, 유행병, 설사로 인한 고생 등을 기록하고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도목정사에 따른 이사 이동을 기록해 두고 있으며, 특히 철종이 이어하는 날(철종 11년 9월 27일) 정원용(鄭元容)등이 올린 계(啓)를 그대로 필사하고 있는 점이다. 일기와는 별도로 14면부터 21면까지에 수록된 자료들은 박제연 연구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박제연(朴齊淵)의 이 서행일기는 비록 1860년 한해의 짧은 기록이지만 철종시대 반남박씨의 정계 진출현황을 파악할 수 있으며, 관직생활을 하며 쓴 일기이기 때문에 정사에서 볼 수 없는 소상한 조정의 인사이동을 보충할 수 있고, 또한 영남 남인들의 한양생활에 대한 고뇌와 열정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다. 마지막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박제연의 삶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영주지역 반남박씨들의 당시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가치 있는 자료라고 하겠다.
『영주금석문전집』 II, 「嘉善大夫兵曹參判 吾軒朴齋洲墓碑」,
『西山先生文集續集』 권6, 「嘉善大夫兵曹參判朴公行狀」,
1차 작성자 : 박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