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괄
『모당일기(慕堂日記)』는 일직 손씨(一直孫氏) 대구종중 소장본으로 손처눌(孫處訥, 1553~1634)이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 1월 8일부터 1629년 12월 26일까지, 즉 30년 동안을 기록한 생활일기이다. 원래는 필사본 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후 후인들에 의해 6책으로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각 권은 150면-180면의 분량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권은 1600년 1월 8일에서 1605년 7월 25일까지, 2권은 1605년 7월 26일부터 1610년 12월 29일까지, 3권은 1611년 1월 9일부터 1613년 12월 19일까지의 기사를 적어 놓고 있다. 마지막(6) 권의 끝부분에 약간의 낙질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 매우 완정한 자료이다. 용지는 10행의 놋쇠 줄이 있으며, 글씨는 매우 반듯하게 정서되어 있으며 간혹 행서로 쓴 부분도 보인다. 년과 월은 독립된 한 행을 차지하고 있으며, 기사는 대체로 날짜별로 줄을 바꾸어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짧을 경우 죽 달아 쓴 경우도 상당부분 보인다. 자간의 여백을 두어 높임을 표현하는 것도 잘 지켜지고 있지만, 생각이 나지 않거나, 민감한 내용인 경우 오려 내거나 배워둔 경우도 있다. 교정부호, 오른쪽에 추기한 글자, 음가의 혼동으로 인한 오기도 눈에 띈다.
이 모당의 일기가 친필의 필사본인 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몇 가지 사실들만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상당부분 저자의 부연설명(주)이 두 줄의 작은 글씨로 삽입되어있다. 이러한 주석들은 일기를 쓸 당시에 추가된 것인지, 아니면 초고들을 본인이 다시 옮겨 쓰면서 생각나는 대로 부연설명을 가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각 면은 10행의 놋쇠 줄이 있는 용지를 사용하고 있는데, 기사가 다음 줄로 넘겨쓰기 애매한 경우는 마치 주처럼 작은 ‘쌍행소자’로 기록하고 있다. 둘째 기사의 내용들을 보면, 간혹 하루의 기사 속에 이틀의 기사가 섞여있는 경우를 만날 수 있다. 즉 시간적 시점이 중복되는 경우가 있으며 공간적 시점이 일치하지 않는 곳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셋째 6권까지의 필체가 서로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사람의 손으로 필사되었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사람의 이름을 거명할 경우 대부분 자(字)로 표기하고 본명을 주석 처리한 경우가 많은데, 전후가 일관적이지 않고 중복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서사원(徐思遠)을 부르는 명칭은 행보(行甫), 낙재(樂齋), 이천(伊川), 행보형(行甫兄), 서형(徐兄) 등으로 통일되지 않았다. 넷째, 난외 주석이 거의 없다. 한편 주인공은 1612년 하반기부터 일기를 직접 편수하고 있고, 위의 네 가지 근거를 토대로 저자의 친필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한편 임인년(壬寅年, 1602)년의 일기는 12월 5일로 끝나는데, "이하는 기록을 잃어버렸고, 계묘년(癸卯年)의 일기도 모두 잃어버렸다.(已下失錄, 癸卯日記亦全失)"라고 한 것이라 했고, 제 1책이 끝나는 시점인 을사년(乙巳年, 1605년, 53세) 7월 25일의 마지막을 보면 "이 다음 다섯 달 일기는 다음 권에 상세히 기록했다(此下五月記詳次卷)."라는 부연설명이 추가되어 있다. 하지만 제 2책이 끝나는 곳과 제 3책이 끝나는 곳에서 이러한 언급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저자가 일기가 끝나는 시점인 1629년 12월 26일부터 1634년 6월 15일 몰한 시기 사이에 산재된 일기 자료들을 수합하여 다시 편집하였다고 볼 수 있고, 낙질된 부분을 추가하여 다시 필사했을 것이다.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1612년 하반기부터 자신의 일기를 꾸준히 편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다시 필사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대로 썼을 것이기 때문에 필체가 다른 것 또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일기가 소개된 경위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다. 일반적으로 『연보』는 일기를 기준으로 작성된다. 모당의 몰년은 1634년 6월 15일이므로, 모당은 약 3년 반 동안 일기를 쓰지 못한 셈이다. 일기 이외에 모당의 전반적 행적을 알 수 있는 소상한 자료는 모당의 재종질인 졸암(拙庵) 손단(孫湍, 1626-1713)이 쓴 「유사(遺事)」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기록은 『모당집』이 1784년 목활자본으로 처음 간행될 때, 수록되었다. 이 유사는 손단이 고성현령(固城縣令)을 지낼 당시에 쓴 것으로 서명되어 있는데, 손단은 1668년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내고 있었으므로 그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 잠(潛)이 구당을 수리하고 유문(遺文)을 수록하여 삼가 가장(家狀)을 엮었는데 들은 바를 참고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손단의 「유사」는 모당의 일기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초간본(1784)에는 연보가 수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만 해도 모당의 연보는 편찬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모당집은 1849년 목판본으로 중간되는데, 바로 이 중간본에 연보가 실려 있다. 따라서 연보 편찬 작업은 1784-1849년 사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당일기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연보 작성에 참고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모당일기(慕堂日記)』는 대구지역에서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유학의 학풍을 재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학문적 영향력, 학맥 형성 과정 속에서 손처눌(孫處訥)의 역할을 조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일기는 임진왜란 직후 이 지역 한강 학맥의 결집과 분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모당 손처눌의 소실(燒失)된 자료를 보완하고 확충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평가한다.
작자 소개
일기의 작성자 손처눌(孫處訥)은 명종 8년(1553) 6월 25일 대구부도호부 수성리에서 태어나, 갑술년(甲戌年) 1634년 6월 15일까지 살다가 고종(考終)한 조선 중기, 17세기 대구지역 유학의 기틀을 새롭게 연 학자로 큰 족적을 남겼다. 자(字)는 기도(幾道)이다. 임진왜란 당시 양친을 연이어 잃고 예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황청동(黃靑洞, 오늘날 황금동) 묘소아래 집을 짓고 평생 시묘살이를 한다는 뜻으로 당호를 ‘영모당(永慕堂)’이라 붙이고, 여기에서 평생 공부와 강학에 힘썼기 때문에 그를 모당(慕堂)선생이라 칭했다. 1685년(숙종11)년 황청동에 기리는 사당을 지었고, 1694년에는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한강예설중찬(寒岡禮說重纂)』, 『가례의절전서(家禮儀節傳書)』은 소실(燒失)되었고 다만 후세에 자료들을 모아 편집한 『모당집』 3권과 이제 소개할 『모당일기』만이 전한다.
1) 출생과 가족관계
부친(父親)은 선무랑(宣務郞) 손수(孫遂, 1523-1598)이고 어머니는 한산(韓山) 이씨 이단(李但)의 딸로, 명종 8년(1553) 6월 25일 대구부 수성리에서 태어났다. 17세(1569년) 3월 광주 이씨 송암(松巖) 이원경(李遠慶, 1527-1571)의 딸과 결혼하는데, 장인 이원경은 한강 정구 선생과 망년지교를 맺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모당은 35세 되던 해(1587)에 후사 없이 아내를 잃었다. 이듬해 하성(夏城) 조씨 조응의(曺應義)의 딸과 재혼한다. 이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나이 47세(1599)가 되어서야 첫아들 손첨(孫添)을 얻고, 50세 되던 해(1602)년 둘째 아들 손잠(孫潛)을 얻었으며, 55세 되던 해(1607) 9월 셋째 아들 손침(孫沈)이 태어났다. 이후 67세가 되던 해(1619) 조씨 부인을 잃게 되는데, 그 사이에 여식 3을 두었다. 맏아들 손첨은 서희득(徐熹得)의 딸과, 둘째 손잠은 전귀당(全歸堂) 서시립(徐時立, 1578년생)의 딸과, 막내 손침은 권기종(權起宗)의 딸과 혼인을 했고, 세 딸은 순서대로 장선득(張善得), 이경진(李景鎭), 김순대(金順大)와 결혼했다.
부친 형제 중에 손회(孫廻), 손적(孫迪)은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세 명의 고모는 순서대로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 1535-1612), 이운배(李雲培), 이례복(李禮福)에게 시집갔는데, 모당의 일기에는 영천에 사는 첫째 고모부가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복례는 팔거(八莒) 고모부로 추정된다. 모당의 형제는 동생 1명뿐이다. 3살 아래인 그는 오매정(五梅亭) 손처약(孫處約, 1556-1618)으로, 모당과 상당히 긴밀한 형제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모당과는 달리 1613년 진사에 급제하였고, 모당과 함께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에게 수학하며, 동생으로서 친구로서 제자로서 모당을 그림자처럼 따랐다.
이외에도 언급할 만한 친지는 손린(孫遴, 1566-1628)으로 저자보다 13살 연하의 숙부이다. 자는 계진(季進), 호는 문탄(聞灘)으로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문인이다. 160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이후 저자와 함께 회재(晦齋)와 퇴계(退溪)선생을 위해 「부정척사문(扶正斥邪文)」을 써서 내암(來巖)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을 논척하여 벼슬길이 막혔다가, 1615년 안동교수 (安東敎授)가 되고, 1618년 예문관봉교를 거쳐 1623년 인조반정 뒤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 병조좌랑, 단성현감을 지내면서 저자의 강학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따랐다. 마지막으로 아우 손처약의 사위인 이응기(李應祺) 또한 모당을 측근에서 모시며 종유(從遊)했다.
2) 배움과 강학
『연보(年譜)』에 따르면, 이미 9살 때부터 『소학(小學)』을 읽기 시작하여 13세에는 『대학(大壑)』을 읽었다. 14세(1566년) 가을부터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1532-1585)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16세에는 처음으로 향해(鄕解)에 합격하여 향인(鄕人)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스승을 따라 팔공산 파계사에서 수학하였고, 20세 되던 해(1572)년에는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 ?-1593)선생과 학문을 강론하기도 했다. 이후 31세(1583년)에는 인동(仁同)에서 1살 아래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과 경학을 강론하였다. 1855년 스승 전경창이 죽고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과 심학을 강론하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비록 한강선생과의 만남은 늦게 이루어졌지만, 낙재 서사원에 버금가는 사제의 정을 나누고 있다. 일기는 이러한 두 사람의 내적 관계를 고스란히 기록해 두고 있다.
1599년에는 임진왜란으로 망가진 대구 향교의 재건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1601년 영모당 곁에 두 칸의 재사(齋舍)를 두어 동쪽은 ‘산택재(山澤齋)’, 서쪽은 ‘풍뢰헌(風雷軒)’이라 이름 지어 강학의 장소로 삼았고, 이듬해 2월에는 경산 동학산(動鶴山)에 있는 암자를 중수하여, 강학장소로 활용하여 임진왜란 이후 황폐화된 강학의 길을 열었다. 이러한 토대마련을 위한 노력의 결과는 임인년(1602) 연경서원(硏經書院)의 중수로 결실을 맺게 된다. 이는 당시 전경창(全慶昌)의 계동정사(溪東精舍),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1529-1584)의 압로정(狎鷺亭),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의 선사서당(仙査書堂)이 있어 그런대로 소규모의 강학활동을 이어갔지만, 개인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연경서원은 향교와 더불어 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명실상부한 사적 교육의 장을 형성했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3) 충효의 실천
임진왜란 와중에 연이어 잃은 부모님에게 자식으로서 상례를 다하지 못한 마음에 경자년(1600) 묘소아래 평생 시묘살이를 한다는 뜻으로 "영모당(永慕堂)"을 지어 못 다한 효를 종신토록 실천했다. 이로서 사람들은 그를 ‘모당선생’이라 일컬었다. 이후 그의 일과에는 제사뿐만 아니라, 선조의 사당에 배알하는 것, 부모님들의 생신제사, 계절제사까지 한 차례의 거스름도(역병이 돌 때에는 제례를 그침) 없이 정성을 다한 모습이 그의 일기에는 여실히 새겨져 남아있다. 특히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1545-1609)과 의례에 관해 논한 기록, 한강 정구선생께 제례에 관해 여쭌 내용 등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임진왜란에 당시 수성지역 의병대장을 맡으며 적극적인 구국활동을 했으나 1593년 2월 19일 부친을 잃었고, 이듬 해 1594년 2월 14일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일선 활동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정유재란에서는 다시 의병을 일으켜 달성(達成)지역을 지키는데 공을 세웠으며,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아우 손처약(孫處約)을 화왕산으로 보내 창병활동을 돕게 했다. 일기에 나타난 인물들은 대체로 이 당시 의병활동을 함께한 사람들로 끈끈한 인적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후 갑자년(1624) 이괄(李适)의 난에도 당시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군량조달에 적극 가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묘호란(1627)에서도 마찬가지로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 조달에 힘썼다. 이러한 충효의 실천 그리고 늙음을 잊은 학구열과 강학활동은 그를 대구 지역의 큰 인물로 자리매김 시켰을 것이다.
4) 교우관계
모당은 비교적 많은 친족 구성을 가지지도 못했고, 벼슬살이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실천에만 전념했지만, 임진왜란의 구국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좌도(左道) 도유사(都有司), 서원장, 유사(有司)를 지냈으며, 한강 정구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영남 전역에 걸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모당일기』에서는 이러한 폭 넓은 인적관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데, 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삶의 가장 가까이에서 교제한 인물로는,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 1550-1611), 태암(苔巖) 이주(李輈, 1555-1604),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 1547-1615), 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 1561-1638),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1569-1634)등이 학문과 강학활동에 긴밀하게 힘을 나누고 있고, 남간(南澗) 최흥국(崔興國)은 일상에서 가장 오래 시간을 모당과 함께한 친구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부강정(浮江亭)의 주인으로 한강(寒岡), 낙재(樂齋), 모당(慕堂) 그리고 영남의 선비들의 연결고리로서 지리적 중심에 있는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 1566-1639)을 들 수 있고, 이 밖에서도 많은 일상의 시간들을 함께하며 이웃형제로 살았던 전계신(全繼信, 1562년생), 이경배(李景培, 1558년생) 등은 전란 때부터 구국활동에 함께 참여했던 친구들로 언급할 만하다. 지리적 활동범위는 자신의 집을 중심으로 황금동, 파동, 팔공산, 금호강, 연경동, 불로동, 이천(伊川), 경산, 영천, 인동, 청도, 고령, 성주, 밀양, 안동, 상주, 창원 등을 들 수 있겠다.
상세 내용(1책에서 3책까지)
1책(1600년 1월 8일에서 1605년 7월 25일까지)
경자년(庚子年, 1600년, 48세) 1월 8일부터 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48세의 해는 4월 3일까지의 기록만 남아있다. 이해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 2월에 영모당(永慕堂)을 낙성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일기에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 다만 피난 때문에 영천의 고모댁에 맡겨 두었던 조부모의 신위를 1월에 가져오는 기사들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영모당이 거의 준비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보』에 따르면 1599년 봄에 오야(梧野)에 집을 짓고 『근사록(近思錄)』을 읽었으며, 7월에는 첫째 아들 손첨(孫添)이 태어난다. 여기에서 말하는 오야(梧野)는 대구시 수성구 파동의 법이산(法伊山)을 말한다. 이 해 일기 기사에서 많이 보이는 "산에 있었다(在山)"란 표현은 이 오야(梧野)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사를 지낸 일, 오고간 친구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축년(辛丑年, 1601년, 49세) 역시 지난해와 비슷한 내용으로 시작한다. 향교 재건을 위한 움직임들, 전란으로 단절되었던 관례(冠禮)와 향례(享禮)의 재연을 계기로 왕래한 사람들과의 기록과 개인 일상을 기록하였다. 『연보』에 따르면 3월 영모당의 협실인 산택재(山澤齋)와 풍뢰헌(風雷軒)을 증축했다고 하는데, 일기에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4월의 일기는 공교롭게도 지난해처럼 3일까지만 남아 있다. 5월에는 서사원(徐思遠)이 중심이 된 뱃놀이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잘 알려진 "금호선사선유(琴湖仙査船遊)"를 묘사하고 있다. 전해지는 「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에 모당의 이름은 올라 있지 않지만, 당시 나눈 운(韻)자로 시가 『모당집(慕堂集)』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모당 또한 이 뱃놀이에 참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기록이다. 『근사록(近思錄)』을 읽은 모당은 『주역』의 건괘와 곤괘를 반복하여 읽으며 『주서(朱書)』를 꾸준히 읽어가고 있다. 10월에는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을 신구(伸救)하는 움직임이 눈에 띄고, 몸이 좋지 않다는 언급이 많이 보인다. 지인들과의 만남과 음주, 그리고 아우 손처약(孫處約)은 물론 그의 사위 이응기(李應祺)가 자주 등장하며, 생질 정수번(鄭守藩)과의 접촉도 잦게 나타난다.
임인년(壬寅年, 1602, 50세)은 1월 1일부터 기사를 적고 있다. 영천을 거처 영일(迎日)로 추노(推奴)하러 간 일, 강학의 장소로 활용되었던 경산 동학산(動鶴山)의 암자를 중수하기 위한 움직임, 성의를 다해 임하는 각종 제사들, 관례(冠禮), 벗들과의 봄나들이, 농사일, 천렵, 향교의 석전제 등등 일상의 왕래, 만남, 술자리가 기록되어 있다. 이 해 읽은 책으로는 『성리군서(性理群書)』, 『격양집(擊壤集)』, 『주서(朱書)』, 『주역(周易)』가 있다. 참고로 이 해 모당은 강좌(江左) 도유사(都有司) 맡았기 때문에 성주(城主)의 영접과 전별이 기사에 자주 등장했다. 특히 또한 『연보』에 따르면 2월 한강정사(寒岡精舍)에 가서 정구(鄭逑) 선생을 뵈었다고 했으나, 일기에는 2월 7일 기사에 가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해 연경서원(硏經書院)이 중수되었음에도 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계묘년(癸卯年, 1603년, 51세)의 일기는 완전히 잃었다고 기술했다.
갑진년(甲辰年, 1604년, 52세)도 1월 1일부터 일기를 쓰고 있고 이전보다 기록의 내용도 훨씬 많아졌다. 이제부터 주인공의 일과는 사당에 배알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삭망례(朔望禮)와 망참례(望參禮)가 성실하게 이행된다. 일의 중심에는 연경서원을 중심으로 한 강학(講學)에 있었다. 강학하는 일정과 방식이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일상적인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4월에 접어들면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문묘배향을 문제 삼는 의론에 대한 반응, 고대했던 정구(鄭逑) 선생과의 만남, 한강(寒岡)의 천상정(川上亭)과 오창정(五蒼亭)을 유람하고 함께한 문인들과 시를 지었던 일이 상당히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 속에서 선생과의 첫 만남과 그를 향한 존경심이 잘 나타나있다. 또한 7월에는 사명대사 유정(惟政)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기록들도 눈길을 끈다. 11월 20일부터 12월 14일까지의 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자료의 일실로 보인다. 이 해 모당은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과 『소학(小學)』을 읽었다.
을사년(乙巳年, 1605년, 53세)은 『소학(小學)』을 읽으며 시작된다. 먼저 세상을 떠난 전 부인의 집안일에도 성의를 보이고 있으며, 전란으로 불효했다고 생각하며 제사를 지내는 축문에서 ‘효(孝)’자를 뺐다는 기록 또한 인상적이다. 3월은 한강선생을 모시고 선사재(仙査齋)에서 강론하고 부강정(浮江亭)을 중심으로 선유(仙遊)했던 일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고, 선생의 움직임을 모두 의미 있게 기록하고 있다(3월 8일에서 12일까지). 이는 지난 1601년의 모임에 비견될 정도로 성대했고, 한강선생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임과 종유(從遊)를 묘사한 유일한 기록으로는 이 일기가 유일할 것이다. 6월에는 한강 선생을 모시고 현풍 연지(蓮池)를 유람할 마음으로 장차 선생을 모실 행와(行窩: 임시 서재)로 향했으나, 서재가 완성되지 않아 선생과의 만남은 불발되었지만, 일행들과의 유람은 수일간의 기록을 채우고 있다. 결국 다음 달에 한강(寒岡)으로의 행차로 이어지게 된다. ‘한강(寒岡)’이란 지명의 의미, 선생의 의연한 풍모가 잘 기록되어 있다. 모당은 이 해 『소학(小學)』 이외에 『심경(心經)』, 『훈몽절구(訓蒙絶句)』을 독서했다. 7월 25일을 기점으로 분권(分卷)되었고, 이에 대한 주석이 달려 있다.
2책(1605년 7월 26일에서 1610년 12월 29일까지)
을사년(乙巳年, 1605년, 53세) 7월 26일 기사로 시작하는데, 이 해 하반기는 향교의 사당을 짓는 준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미 북인(北人)들이 권력을 농단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있다. 사당을 짓는 부판(浮板)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사로이 전용한 사건이 발생하여, 책임을 맡았던 아우 손처약(孫處約)에 대한 질책과, 이를 수습하는 모당의 포용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편 10월에는 인동(仁同) 외가에 가서 전소하고 친지들을 찾아 본 일, 몸이 아픈 일로 아내를 대신 시켜 제례를 지낸 일을 기록하고 있으며, 『계몽(啓蒙)』을 읽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다.
병오년(丙午年, 1606년, 54세)은 사당 공사와 『심경질의(心經質疑)』를 교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인들의 왕래, 부고, 각종 제례, 시작(詩作)등이 여느 때처럼 기록되어 있고 3월 28일에는 한강 선생이 서사원의 병문안을 와서 만난 자리에서 늦은 학문에 대한 자책을 선생으로부터 위로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0월에는 도동서원(道東書院)에서 한강 선생을 모시고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묘사를 지낸 일을 추억하고 있으며, 『소학(小學)』과 『주서(朱書)』를 다시 읽는 독서 행보를 보이면서 『훈몽절구(訓蒙絶句)』를 읽으며 54세의 해를 마감했다.
정미년(丁未年, 1607년, 55세)는 숙부 손린(孫遴)이 신은(新恩)하고 영분(榮墳)하는 일로 시작된다. 그에 따른 선조의 묘가 있는 밀양행차를 통해 만난 친족들의 정황, 팔거(八莒: 칠곡)에 사는 고모의 위독해진 병세와 그에 따른 약 처방과 의원을 부르는 일, 사당 공사를 감독하는 일, 강학, 시작(詩作), 안질(眼疾), 고모의 장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해 모당은 『퇴계집(退溪集)』을 여러 달 동안 읽었고 연말에는 다시 『심경(心經)』을 읽고 있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56세)은 세배를 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로 부산하게 시작한다. 2월 향교 사당이 낙성되어 고유(告由)하고 이안제(移安祭)를 지낸 일, 향임(鄕任)으로 차임되었으나 다음 달 사임하고 체임된 일, 임해군(臨海君)이 역모가 누설되었다는 소문, 아내가 말을 타고 오다가 떨어져 심하게 고생한 일, 회재(晦齋)를 문묘제향에서 빼고 성혼(成渾)을 올리자는 움직임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리는 일, 내암(來巖) 정인홍(鄭仁弘)의 권력 장악과 한강선생과의 대립, 손기업(孫起業, 1565년생) 일파와 대립, 정인홍에 배척된 한강선생을 찾아뵙고 위로한 일, 선사재(仙査齋)의 모임을 대신해 부인사에서 모여 강론하고 운(韻)을 나눠 시를 지은 일, 한강 선생을 위한 상소 모임 등이 차례대로 일상들과 더불어 기술되어 있다. 한편 읽고 있던 『근사록(近思錄)』을 주인이 가져가는 바람에 읽지 못하고 다시 『격양집(擊壤集)』과 『심경(心經)』을 읽고 있는 안타까운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을유년(乙酉年, 1609, 57세)은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해로, 주인공은 서원의 사당을 건립하는 일에 전념한다. 현풍으로 여종을 잡으러 간 일, 『주서(朱書)』를 교정한 일, 2월 한강선생이 연경서원을 방문한 일, 류요신(柳堯臣)의 아내 장례를 성주(城主)가 막은 일, 7월 한강선생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고, 사제(師弟)의 정을 확인한 일, 9월 한강선생이 상처(喪妻)하여 조문한 일, 부사(府使)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서원 방문 등이 기술되어 있는데, 특히 7월 한강선생과의 만남이 가장 소상하게 5일 동안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성주(城主)가 태실(胎室) 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통정대부에 올랐다는 소식으로 한 해를 마감하고 있다. 이 해 모당은 『자양문집(紫陽文集)』,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심경(心經)』을 읽고 있다.
경술년(庚戌年, 1610년, 58세)은 광해군 집권 2년째로 박이립(朴而立, 1577년생)의 무고를 입은 한강선생의 신원(伸寃)하는 움직임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손기업(孫起業)을 중심으로 한 향전(鄕戰)의 조짐이 커가고 있었고, 서원 사당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특기할 만한 일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서원을 방문하여 그를 모시고 강론하고 팔공산을 종유한 기록이 여행기처럼 기술되어 있다. 6월 들어 아내의 병이 심각해지면서 아무런 차도를 보이지 않고 연말까지 고통이 이어지고, 박이립(朴而立)이 아무런 제재 없이 풀려난 일에 대한 분노, 한강선생 신원하는 상소로 상산(商山: 상주)에 가서 상소문을 결정하고 일행을 떠나보낸 일이 기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10월 부모님 묘소를 개장하는 일에 착수하여 동원된 일꾼들과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그런 와중에 말에 떨어져 고생한 일과 아내의 병이 심화된 일이 고통스럽게 그려져 있다. 개장(改葬)은 12월 28일이 되어서야 우제(虞祭)를 지내고 복을 벗는 것으로 끝나며, 2권도 종결된다. 모당은 이렇게 바쁜 한 해에도 틈틈이 『심경(心經)』을 읽고 있다.
3책(1611년 1월 1일부터 1613년 12월 19일까지)
신해년(辛亥年, 1611년, 59세)은 이전의 기록보다 훨씬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일기는 1월 9일 여동생의 복통을 걱정하면서 시작된다. 증세에 대한 걱정, 향교 사당을 완공한 일, 산택재를 수리한 일, 역병, 심해지는 누이의 병세에 대한 걱정, 시문(詩文) 원고를 고치는 일, 감사 이정신(李廷臣, 1559-1627)에고 고언(苦言)한 일, 가난으로 제수마련에 성의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고모부 정세아(鄭世雅)를 병문안 한 일, 정인홍(鄭仁弘)과 한강선생이 대립하게 된 배경, 회재(晦齋), 퇴계(退溪)선생을 위한 「부정척사문(扶正斥邪文)」을 지어 통문을 돌린 일, 정인홍을 비판하는 소(疏)를 올리기 위해 안동에서 소회(疏會)를 가지고 돌아오는 여정, 맏아들 첨(添)이 병을 앓은 사실,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의 전횡, 대북(大北), 소북(小北), 그리고 서인(西人)과의 대립(사화로 비화될 조짐), 종기로 고생한 일과 아내의 병세가 매우 심해져 약을 쓰고 간호한 일, 향교의 오현(五賢) 봉안, 퇴계선생이 남명(南冥)의 노장사상 숭상을 지척했던 일에 대한 견해, 역병으로 인해 참례(參禮)를 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재개한 기록, 한강선생의 무고를 변호하기 위한 문제를 둘러싸고 모당과 낙재 서사원의 미묘한 갈등, 회재(晦齋), 퇴계(退溪) 선생의 퇴출문제에 대해 당시 이판(吏判) 정창연(鄭昌衍, 1552-1636)과 이참(吏參) 조정(趙挺, 1551-1629)의 태도, 우도(右道) 세 서원(書院)에서 한강선생을 삭적한 사실,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을 놓고 우도(右道)와 좌도(左道)의 입장 차이를 세세한 일상 속에 넣어 기술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10월 22일부터 29일까지 밀양을 찾아 조상들의 묘를 돌아보고 청도 운문에 들려 명승지를 유람하고 시작(詩作)을 즐겼는데, 일기의 상당부분이 할애되어 있고, 특히 지명의 유래에 대한 민간 전설 등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59세의 마지막 달은 산과 당(堂)을 오가며 『심경(心經)』을 읽고 있으며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소신 있는 사임 소식과 그에 공감한 문탄공(聞灘公) 손린(孫遴)의 물러날 의사표명으로 마감하고 있다. 이 해 모당은 『주역(周易)』, 「역전서(易傳序)」, 「역서(易序)」, 「택(擇)」, 「귀(歸)」, 『격양집(擊壤集)』, 『회재연보(晦齋年譜)』, 『심경(心經)』등의 독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임자년(壬子年, 1612년, 60세)은 1일부터 새해 인사를 주고받으며 선사재(仙査齋)에서의 강학(講學)으로 시작된다. 친족모임을 위해 용천사(湧泉寺)에 간 일, 한강선생이 대곡(大谷)에 정사(精舍)를 짓는 일, 강학모임의 참여가 저조한 것을 개탄한 것, 아들이 독서하지 않아 회초리를 치고 측은해 하는 아비의 심정, 한강 선생의 노곡(蘆谷) 이주, 김직재(金直哉)의 역모, 만년에 병으로 시달리는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의 노환에 대한 걱정, 아비의 첩과 불륜을 저지른 문홍도(文弘道)의 아들 이야기, 병을 털고 일어난 고모부를 찾아뵙고 돌아오는 여정, 김직재의 역모를 빌미로 벌어지는 숙청, 정경세(鄭經世, 1563-1623)가 유배될 지경에서 방면된 일, 정경세가 사판(仕版)에서 삭제된 일, 노곡(蘆谷)에 선생을 찾아뵙고 오는 길에 서사원을 문병한 일, 제광정(霽光亭) 역사(役事)를 주관한 것, 류영경(柳永慶, 1550-1608)의 추형이 거론되고 전은(全恩)을 주장한 대신들을 문책하려는 조짐, 환갑을 맞은 저자의 생일잔치, 한강선생의 생일에 예물을 들고 정성을 보인 일, 종숙(從叔) 손선(孫選)의 죽음, 좋지 않은 작황, 9월 들어 병이나 앓아 누워있는 와중에 명나라 장수를 접대할 준비를 한 일, 제물(祭物) 창고를 짓는 일, 정인홍이 우의정직을 다시 맡은 것에 대한 조롱, 김직재 역모의 결말, 채몽연(蔡夢硯)이 첩을 산 일로 한강선생에게 절교를 당한 사건, 존경하고 따랐던 고모부의 죽음과 장례, 그리고 예에 맞지 않은 장례에 대한 아쉬움, 손선(孫選)의 장례, 좌수(座首) 손기업(孫起業)의 경거망동 등이 일상생활 속에서 잔잔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12월 중순부터 저자는 일기를 편수(編修)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문적 움직임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주선생행장(朱先生行狀)」, 『황명이학록(皇明理學錄)』, 『이학통록(理學通錄)』 『주서(朱書)』교정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61세)은 양전(量田)하는 일과 그에 따른 손기업(孫起業)의 작태를 비판적 어조로 바라보며 시작된다. 한강선생께 새해 인사를 드리고 담소한 내용, 전임 순사(巡使) 류영순(柳永詢)의 추태와 음행과, 그와 서사원(徐思遠)사이에서 『소학(小學)』 추천을 놓고 야기된 에피소드, 이천(伊川)에 들러 쾌차한 서사원과의 유쾌한 시작(詩作) 놀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좋지 않았던 증세가 이어져 고생한 일, 일기를 편수하는 일, 양전(量田)의 불공정성, 희한한 병에 걸린 손린(孫遴)을 병문안 간 일, 대랑연(大浪淵)의 석정(石井)을 청소하며 깨달은 내용, 성주(城主)의 장례를 주관한 일, 좌도(左道)의 초시(初試) 답안지를 보고 인재가 없음을 탄식한 기사, 한강선생의 방정한 품행과 덕을 칭송한 것, 선생에게 제례(祭禮)에 관해 물은 내용, 이상신(李尙信) 등과 같은 탐관오리들에 대한 개탄, 종이를 마름질하며 이심(利心)을 경계한 이야기, 제광정(霽光亭) 곡회(曲會), 공공연히 자행되는 동당시(東堂試)의 파행, 여강칠현(驪江七賢)의 역모사건, 아우 손처약의 과거급제 소식에 기뻐하는 마음, 향인(鄕人)들에게 논박당하는 손기업, 향전(鄕戰)으로 번진 향인(鄕人)들의 화해 모임에서 화해를 이루지 못한 일, 서사원과 가례(家禮)를 논한 사실, 순사(巡使)가 서원에서 『소학(小學)』을 강한 기록, 강학, 아픈 와중에도 학문에 대한 한강선생의 열정에 감탄한 일, 서원 사당 봉안(奉安)을 준비하는 과정이 일상생활과 더불어 여느 해처럼 일관되게 자신만의 필치로 기록되어있다. 특히 11월과 12월은 봉안(奉安)행사 준비를 하는 과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있는데, 각 향교에서 부조한 것들, 고유문(告由文)은 서사원이 썼고, 기문(記文)은 이숙량(李叔樑, 1519-1592)이, 발문(跋文)은 퇴계선생이 짓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쓴 것이며 편액의 글씨는 도경익(都慶益, 1558년생)이 모사한 것임을 밝혀두고 있다. 또한 서사원의 부(賦)와 모당 자신의 부(賦)를 비교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독서와 저술활동으로는 『춘추(春秋)』, 『소학(小學)』을 읽고 있으며, 『주서(朱書)』를 교정하고 일기를 편수하고 있다. 이상 12월 19일가지의 기록으로 3권은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