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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이동진(李鎭東)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6+KSM-XF.1797.0000-20140630.063525700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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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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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동진, 이우
작성시기 1797
형태사항 크기: 37.4 X 50.3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소호 한산이씨 소산종가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797년 이동진(李鎭東) 서간(書簡)
1797년 3월 21일, 이진동이 문묘 종향 청원 과정에서 촉발된 유림 시비(是非)에 대해 적극 조정해 달라고 청하기 위해 이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진동은 무술난(戊申亂) 때 이인좌에게 저항한 영남 사대부의 절의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후 모든 사림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 신중하게 처신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회연서원과 동락서원이 문묘 배향의 논의를 제기하였고, 중간에는 4선생을 한꺼번에 거론하자는 의논이 제기되었다고 하였다. 이때 노성들과 함께 모임에 가서 생각한 바를 전하려고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결국 상소한 결과가 실패로 끝나고, 서애계(西厓系)와 학봉계(鶴峯系) 간에 서로를 공격하는 문서가 왕래하는 등 두 진영이 당으로까지 변질되어 결국 분열과 파탄의 장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이진동은 사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이우가 조정해 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하였다.
1차 작성자 : 김순주

상세정보

1797년 3월 21일, 姨從인 欲寡齋 李鎭東이 문묘 종향 청원 과정에서 촉발된 儒林 是非에 대해 적극 調停해 달라고 청하기 위해 俛庵 李㙖에게 보낸 편지
1797년 3월 21일에 姨從인 欲寡齋 李鎭東(1732~1815)이 문묘 종향 청원 과정에서 촉발된 儒林 是非에 대해 적극 調停해 달라고 청하기 위해 俛庵 李㙖(1739~1810)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는 장문의 편지에 속하는데, 핵심은 4先生 즉 西厓 柳成龍과 鶴峯 金誠一, 旅軒 張顯光, 寒岡 鄭逑를 文廟에 從享하기를 청원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儒林 是非의 내막, 그리고 이에 대한 李鎭東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李鎭東은 戊申亂 때 李麟佐에게 저항한 嶺南 士大夫의 節義를 주장하는 上疏를 자신이 올렸던 1788년 이후로 모든 士林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 굳은 신중론을 견지해 왔다고 하였다. 이런 선상에서 檜淵書院과 東洛書院이 文廟 從享의 논의를 제기하였을 때 마음속으로 편치 못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며 南山의 張氏 어르신을 만났을 때에도 품은 생각을 피력한 가운데 權襄仲(權思贊)도 곁에서 자신의 얘기를 다 들었다고 하였다. 몇 년이 지난 뒤에 列邑에 通文이 활발하게 돌려지고 道會가 해를 거듭하여 열렸어도 자신은 한 번도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중간에는 또 4先生을 한꺼번에 거론하자는 의논이 제기되어 자신의 근심이 더욱 깊어진 가운데 약간의 老成들과 함께 모임에 가서 소회를 진달해 보려고도 하였으나 지난가을에 사적인 일로 인해서 그러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결국 上疏한 결과가 실패로 끝나 분위기가 좋지 못한 상황에서, 西厓系와 鶴峯系 간에 서로를 공격하는 문서가 왕래하는 등 두 진영이 黨으로까지 변질되어 결국 분열과 파탄의 장으로 귀결되게 생겼다고 하였다. 이에 李鎭東은 사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極力으로 調停해서 保合하여 그 흐름을 끊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런 입장에서 자신이 바래미에 調停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답장조차 받지 못했다고 하였다. 결국 李鎭東은 이 시기의 第一義는 調停 한 가지 일뿐이라는 전제 하에, 李象靖의 우뚝한 제자이자 李光靖의 아들인 李㙖가 평소 익숙하게 강론했던 無偏無黨, 周而不比의 가치에 따라 적극 調停해 주기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참고로, 李鎭東李㙖는 모두 竹所 金良鉉의 외손이다. 李鎭東1788년 戊申亂 60주년을 맞이하여 李麟佐에게 저항한 嶺南 士大夫의 행적을 기록한 『戊申倡義錄』과 그들의 節義를 주장하는 嶺南 儒生의 上疏를 대표로 올린 바 있다.
1차 작성자 : 김장경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97년 이동진(李鎭東) 서간(書簡)

蘇湖 靜几 回納。
新厓姨從謝狀。 省式謹封。
昨日故土還。聞尊勤訪。到此又留數語於兒口。至親闊別
之餘。恨未從容握敍也。將欲得便致書。以道此區區意。兼謝
遠訪勤意。而未果。此際又承專伻問書。感荷尤深。卽惟
靜攝起居晏重。玉眷輩皆無{虫+恙}。此時消息。有加於此乎。姨從。
命道奇薄。昨冬所遭。可謂得姓後未有。捨峽就野。豈意當如此
變耶。一子三婦。逐年而哭。老去窮懷。尤有所難堪。然命也奈何。
所遭如此。衰病又侵之。加以百里搬移。萬事茫蒼。而先事未了者。髮
短愈長。日前緊急。亦多闕漏。況門外事。其敢開口犯手耶。且自
戊申以後。凡於士林間事。畏約罙甚。戒存懲吹。雖尋常鄕曲間
論說。皆用此法。然而秉彛所存。智竅未昏。至於爲先輩爲世道。
一念終驗滅他不得。閑居之暇。時時慨惋。而繼之以流涕。固知韋布漆
室之憂。無所用處之日。有所不禁者矣。年前聞檜淵東洛有陞
廡之議。而吾心竊有所未安者。非止一二。其後漆邑之行。歷拜南山
丈。因所問說盡懷。權友襄仲在傍參聽。數年後。列邑通文蝟起。
道會連歲。而鄙見。則終不釋。而一不參會者。蓋爲先時之動。致有不瑕之慮
耳。中間又有四先生。幷擧之議。而此憂益深。將與此中老成
若干人。齊進會所。畢陳所懷。以聽進退之論。而昨秋私故多掣。有意
未就。疏行已發去云。稽延不及之責。吾南中如吾者。當首伏其罪矣。
畢竟此疏良貝。而自中氣像。又從以不佳。往來文字言說。是何等變
怪。門內同人之義。換作眇孤張弧之象。一是一非。轉成彼此之黨。袒右
袒左。相軋黨伐之釁。意中之戈矛。有甚於芟夷之勍敵。則嶺中兩大
事。便作笆籬底物。而了無究竟。自相枝梧。三十年沫血之心。數百年
公共之論。終歸於分裂破碎之場矣。夫如是。則自處以義理者。未必
非打壞義理之人。咎人以斥享者。亦將自歸於斥享之科。玆豈非大可恐懼處
耶。同舟共濟。獨不念胡越之一心。而先出後讐。亦不愧相如之引車耶。
一人一家之迷惑。亦不是異事。而道內僉君子。卽當極力調停。
趁時保合。無使皮膚之症。轉入於膏肓矣。區區此念。日月彌切。
欲作書權友。以爲調停之地。而此友鬱憤。公共一道。則寂寥
一書。不足以解輿憤矣。海底則吾所親知。自別於他。且本事
解聽似易。故自不量其輕淺。而妄有一書矣。至今尙未見答。
至於鄙書辭意。則何可掛人耳目耶。左右雖我至親。而元不
欲使之聞耳。左右自是讀書人。箕範之無偏無黨。吾夫子周
而不比。想熟講之矣。君子處身。自有平坦地頭。一言之差。墮
在一邊。戒之戒之。愼之愼之。俾無後悔。千萬千萬。此時第一義。是調
停一事。吾南之以鄒魯得名於一邦者。先輩之功何如也。其可
忘乎。聖上之眷顧我全嶺。而毛髮皆君賜也。義理之疏。其
可已乎。彼二人之是非。姑置忘域。或有言此事者。飮以醇醪。以完
成此二大事。千萬千萬。示中有權友之病。未必不由於憤惋云。果然。則
尊爲家傳一語於權友如是者爲病。則不如是者爲藥。吾友頓忘前憤。姑
作癡愚人對人。則曰皆是吾過。事定後。當有公論。何乃不勝一朝之憤。而自
苦如是也。切望大放下。一不掛念。謹藥餌善調攝。無負故人之望云。如何如何。
餘。不宣。伏惟
情照。
丁巳三月念一日。姨從。鎭東。頓。

康津書。本無以此事相問。故
無答書耳。成川令送
武夷書。甚張皇云。而尙未
得見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