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괄
『김중휴일기(金重休日記)』는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위치한 국가지정 문화재 풍산김씨 "학암고택"에 소장된 익명의 일기로 알려져 있었다. 이 일기는 김중휴(金重休)가 1857년(61세)부터 1860년(64세)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일기의 표지에는 『일기-정사시(日記-丁巳始)』로 적혀 있으나, 일기의 작성자가 김중휴로 밝혀짐에 따라 『김중휴일기(金重休日記)』로 명명한다. 1857-1858년의 기사는 중요한 집안의 일들과 행사만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이후 1859년-1860년의 기사는 매일의 기록이 꼼꼼하다. 특히 마지막 두 해는 임시 관직으로 한양에서의 객지 생활과 귀향한 이후의 삶의 궤적을 그려두고 있다. 전체 분량은 160면으로 구성된 필사본의 일기로, 1면에는 각각 11행으로 일관적이며 종종 사족(蛇足)들이 작은 글씨로 달려있다. 초반 2년의 기록은 반듯한 행서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후반 2년의 기록은 초서로 쓰인 부분이 많아진다. 일기의 처음 세 장은 약 처방이 쓰여 있고, 중간에는 5, 7언의 절구시편들과 글쓰기를 연습한 것으로 보이는 두 장의 첨지(籤紙)가 함께 제본되어 있으며 일기의 마지막 장에는 흥미롭게도 정종(正宗), 효의왕후(孝懿王后), 순종(純宗)과 인원왕후(仁元王后) 등 왕실 13명의 기일, 능의 위치, 거리 등을 별도로 기록해 두고 있다.
작자 소개
일기의 주인공 김중휴(金重休, 1797-1863)는 조선 중기의 저명한 문신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 1467-1535)의 11대 후손인 부친 김종석(金宗錫, 1760-1804)의 둘째 아들로, 자(字)는 현도(顯道), 호(號)는 학암(鶴庵)["암(庵)"자는 풍산 김씨 세보(世譜)에 따름.]이다. 41세 때인 1837(헌종 3)년 식년시(式年試)에 참방(參榜)하는 영광을 안았지만 실직(實職)이 있는 관직에 제수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858년(61세) 12월 20일 송경(松京) 풍덕현(豊德縣)에 있는 태조대왕비(太祖大王妣), 한씨(韓氏)의 능을 담당하는 "재릉참봉(齋陵參奉)"에 제수되었다가 나이와 거리를 고려하여 곧바로 계체(啓遞)되었다는 기록을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중재 역할은 일기에서 호칭한 "가질(家姪)"로 보이는데, 그는 저자의 사촌(四寸) 동생 중남(重南)의 맏이로 태어나 저자의 형인 김중우(金重佑)에 양자로 간 김두흠(金斗欽, 1804-1877)으로, 당시 현풍 현감(玄風縣監)과 숭릉별검(崇陵別檢)을 지내고 있었다.
한편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신원을 위하여 자손들이 노력하는 과정을 기록한 이상채(李相采, 1787∼1854)의 『소청일록(疏廳日錄)』, 1852년 7월 3일 조목에 보면 "公事員進士金重休"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858년까지 아무런 벼슬을 맡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단지 그가 진사에 급제한 이듬해 1837년 병산서원(屛山書院)의 도유사(都有司)를 맡은 것을 『원임록(院任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작자가 1858년(62세) 12월 20일 재릉침랑(齋陵寢郞)에 제수되었다가 계체되고 8개월 뒤인 1859년 8월 11일에 임시관직인 감조관(監造官)에 제수되어 사은숙배 길에 오른다. 하지만 한 달도 채 못 된 9월 9일에 실직(實職)이 없는 정9품의 사용(司勇)에 임명되었다는 교지를 받은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그는 한양에서의 생활을 접고 낙향하지 않았다. 일기에 따르면 이듬해 2월 21일 고향으로 돌아오므로 그의 한양생활은 7개월 정도이다. 일기 속에 나타난 갖은 고생에도 객지생활을 고집하며 사람들과 교유한 것은 바로 조상인 잠암(潛庵)을 추숭하는 일에 근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물론 실직(實職)을 얻어 이 일을 처리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저자의 문집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그는 특이하게 서화와 조상들의 문집을 초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일기는 증언한다. 특히 일기의 기사에서 배접하여 서화첩을 만들었다는 기록들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 결실이 바로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상 19명 행적에서 본보기로 삼을 만한 것을 31개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관련 시문을 덧붙인 서화첩으로, 영남 남인들의 학술적 활동을 조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주인공에게는 을사사화 이후 고향으로 낙향한 자신의 조상인 잠암(潛庵) 김의정(金義貞, 1495-1547)의 신원을 회복하고 시호를 다시 받기까지인 1818년부터 1861년까지의 전후사정 및 연관 문서들을 등사하고 기록한 『청사명원록 (靑蛇明冤錄)』이 전해지고 있다.
상세 내용
정사년(丁巳年, 1857년 61세)의 기록은 기상의 관찰로 시작하며, 매일 쓴 일기가 아니라 중요하고 기억할 만한 기사들만 날짜 별로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한양 진출에 큰 힘이 된 가질(家姪) 김두흠(金斗欽)이 보낸 편지를 특별히 언급하고 있고, 조상들의 기일에 가지 못하는 마음, 중아(仲兒) 김수흠(金守欽), 계아(季兒) 김우흠(金宇欽)의 과거에 대한 관심과 걱정, 안동 김씨 순원황후(純元王后)의 죽음, 영천(榮川) 송림원(松林院)의 투매(偸埋) 사건, 지병으로 약을 복용한 것, 소실(少室)이 아들을 낳은 것(이름과 사주까지 적어둠), 친척들과 지인들의 부고에 가지 못하는 미안함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무오년(戊午年, 1858, 62세)는 손자 채아(蔡兒)가 돌림병에 걸려 거의 죽다 살아나는 과정과 그에 따른 약 처방, 이어지는 가뭄으로 인한 농사 걱정, 손부(孫婦)의 근행(勤行), 소실 자식의 백일, 방천(防川)에서의 공사, 친인척들의 안타까운 부고, 가질(家姪)이 무계(誣啓)된 일과 풀려난 일, 중아(仲兒)와 계아(季兒)가 과거에 응시한 일, 원자(元子)의 탄생, 세 형제, 즉 수흠(守欽), 우흠(宇欽), 관흠(寬欽)이 과거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나 지재(枝齋)로 옮겨 간일, 자신이 고환(羔丸)을 복용한 것과 같은 일상사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12월 25일에는 도목정사에서 "재릉참봉(齋陵參奉)"에 제수 되었다는 소식과 반촌(泮村)에 있는 여러 인척들의 축하 편지와 문안을 기록하면서 한 해를 정리하고 있다.
기미년(己未年, 1859, 63세)의 1월의 기록은 이전처럼 기억할 만한 사실들만 기록하고 있는데, 재릉참봉(齋陵參奉)에 제수되었지만 노구에 송경(松京)까지 이동해야 하는데 정조(正朝)의 제향(祭享)에 미치기 어렵다는 조정의 판단에 따라 김희영(金熙永)으로 대체되었다는 소식으로 시작한다. 재릉(齋陵)의 망기(望記)가 그대로 등사되어 있으며, 대체된 사실을 모르는 친인척들과 지인들의 축하와 문안, 일상으로 돌아온 주인공의 달성(達城) 감시(監試) 감독, 원자(元子)의 백일이 기록되어 있다. 2월은 이제(姨弟) 소수(邵壽)의 안타까운 사연으로 시작하며, 향촌 유생들의 거듭되는 경과(京科)에서의 낙방, 달성(達城) 감시(監試)에서 참방한 사람들의 출신지, 남서인을 구분하여 기록해 두었고, 반포(反浦)에 사는 족제(族弟) 중유(重裕)의 방문과, 집안 아이들의 참방소식, 세자 백일과(世子百日科)에 향유(鄕儒)들을 발탁한 일, 도성에서의 변괴, 보리 심기, 지난달부터 복용한 고환(羔丸)의 결과, 중부(仲婦)와 계부(季婦)의 해산, 영천(榮川) 투매사건의 추이, 손자로 보이는 용아(用兒)의 혼담, 농사일과 연관된 긴장된 관찰이 이어지고 있다.
친척들의 방문과 전별, 계속되는 축하편지의 왕래로 이어지는 3월에는 공부하러 떠났다가 돌아 온 손자(孫子), 봄 농사의 시작, 유곡(酉谷) 며느리의 해산과 산후증, 동당(東堂) 회시(會試) 감독, 지는 매화에 대한 감회, 상놈들의 매과(買科)하는 과거시험의 부조리, 평안도 여씨 과부를 둘러싼 변고, 병·호(屛·虎)의 알력관계, 계속되는 비에 늦어지는 봄 농사에 대한 걱정, 지인들의 참방 소식, 지방관들이 탐장(貪贓)으로 탄핵된 일, 방광의 통증과 처방, 육로회(六老會), 지구(知舊)들의 내방, 건강과 관련된 다양한 민간요법, 영선(瀛選)에 대한 관심, 쌀값의 폭등원인에 대한 기록이 볼 수 있다. 4월은 벼슬살이의 검은 거래의 관장 세태로 시작한다. 친척과 지인들의 내방, 잔병에 시달리는 주인공, 공부에 관심 없는 손자 목아(木兒)에 대한 걱정, 자식들의 독서 장소 이동, 도림회(道林會)와 병산서원 신방회(新榜會)에 참석한 일, 추운 날씨로 인한 양잠에 대한 걱정, 보릿고개의 민초들, 황태자가 죽었다는 소식 등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감조관(監造官)이 선물로 준 저포(紵布) 1필을 받고 자책하는 청렴한 선비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대장경로회(大杖慶老會)에서의 알력, 한양에 전해지는 북소(北騷)들, 목아(木兒)의 교육, 친척들과 지인들의 오고감, 향촌의 화수회(花樹會), 전해지는 중국 병란, 화첩 배접, 모내기 자금의 부족한 농촌사회, 승려를 통해 듣는 아들들의 소식, 이어지는 시변(時變), 자신이 꾼 꿈에 대한 기록, 출하되어도 치솟는 보리 값, 모내기, 도목정사에서의 기대, 태풍에 대한 힘겨운 내용들이 자상하게 5월의 여백을 채우고 있다.
남초를 파종하는 계절(6월)이 돌아왔다. 19세기 서구열강의 침입으로 부산 동래(東萊) 포구에도 수상한 배가 접근하여 각종 물품들을 요구하고, 무더위에 밭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추수를 걱정하게 하는데 호랑이가 출몰하여 민심은 뒤숭숭하다. 서족질(庶族姪)의 갑작스러운 죽음, 흉년에 대한 고민, 희우, 서인이 된 문중 사람들에 대한 우려 등이 기록되어있다. 7월은 동래 수령에게 보내는 4구의 시로 시작한다. 사계(査契) 류명가(柳明可)가 의릉랑(懿陵郞)에 제수되었다는 소식, 폭염, 서화첩 배접, 친척들의 편지 내왕, 비 때문에 심지 못한 배추 농사에 대한 걱정, 무더위와 감기로 고생하는 식구들, 사돈 집안과의 교유, 소일을 위한 『수호지(水滸志)』와 두보(杜甫)의 시를 암송하며 보내고 있다.
8월, 채소 파종을 마쳤으나 싹이 틀 가망이 없을 것 같다는 걱정으로 시작한다. 친인척들의 내방, 꿈 이야기, 행공(行公), 극성을 부리는 늦더위, 마른 논에 물 대기, 앓아누운 손자 채아(蔡兒), 한양의 등용 소식을 가져올 중아(仲兒)를 기다린 끝에 결국 8월 11일 "감조관(監造官)"에 제수되었다. 사은숙배길, 여정에서 햇곡을 먹고 배탈 난 이야기, 벼슬살이를 위한 물품 구입, 머물 집을 정하고 반촌에 인사를 다닌다. 연이은 지구(知舊)들의 내방, 도감(都監)에 입직(入直), 당상관들과 동료들과의 모임, 한양에서의 힘겨운 적응, 설사와 소변 통증으로 고생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9월의 기사들은 이전과는 달리 조정의 소식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어 분량이 상대적으로 많아진다. 홍련(紅蓮)을 모신 일, 가서(家書)의 왕래, 동료의 체직, 소변 고통에 대한 처방, 그에 따른 벼슬살이의 어려움, 출사한 친인척들과의 왕래, 서강촌(西江村)에 도는 괴질, 소변 약의 처방전, 계속되는 입직과 공무, 한양 관리들의 탐장(貪贓)과 비리, 중양절 잔치, 심해지는 괴질, 병든 말, 동료 정기덕(鄭基德)의 집안 자랑, 한양 생활에 드는 경비에 대한 걱정, 온갖 노력에도 낫지 않는 말의 병, 괴질에 대한 처방전, 공조(工曹)의 봉과례(封裹禮), 생활비와 말을 빌림, 괴질을 둘러싼 낭설, 흉배를 빌리지 못해 사야만 했던 사실, 이어지는 공고(公故)로 빌려야 하는 금관복(金冠服), 습의(習儀), 괴질로 인한 희생자들이 많아지고 그에 따른 지인들의 피난, 빈뇨증과 고통에 대한 치료, 객지 생활과 나그네 회포, 계속되는 설사로 인한 고통, 계속되는 습의(習儀)에 불참하며 앓아눕게 된 경위, 병문안, 이어지는 약 처방으로 잔인한 9월을 수고롭게 기록했다.
병상의 10월은 가장 긴 기사로 시작한다. 부음, 동지사, 중국 소식, 권력을 믿고 날뛰는 자들과 약해진 왕권으로 야기된 이야기들, 새집으로 이사하는 꿈 이야기와 자의적 해몽이 이어지면서 주인공은 미음을 먹으며 회복한다. 말단 관직에 목메고 있는 자신에 대한 회의, 입직(入直)하며 꾼 꿈에 대한 기술, 계속되는 예행연습과 습의(習儀), 상납미를 실은 배의 침몰, 낫지 않는 소변 고통, 생활비에 대한 압박, 종묘(宗廟) 행사와 한양 지리를 몰라 빚어진 시골 종과 어긋난 약속, 부묘(祔廟) 진하(進賀), 약복용, 지구(知舊)들과의 엇갈린 내왕, 쾌차이후 반촌 인사, 지인들과의 내왕 속에서 들은 이민영(李敏永)과 그의 출계한 아들 이야기, 작년에 죽은 강교환(姜敎煥)의 안타까운 사연, 연서역(延曙驛) 부자 김동지(金同知) 이야기, 총애 받는 환관에 아첨하는 관리이야기, 조상의 공을 높이려 노력하다 허사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조병훈(趙秉薰) 이야기가 장황할 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병으로 죽어 가는 말과 행해야 하는 진하(進賀), 조내인(趙內人)의 순산, 지인들과의 내왕, 종루(鐘樓)의 괘서(掛書), 객지에서 계속되는 꿈 이야기와 처음으로 맞는 생일, 말의 죽음, 자신과 며느리의 처방전, 위라(位羅)에서 올라온 면상(綿商)들, 조상을 추숭하는 일, 권 척(權戚) 집의 방문 등 한양의 객지 생활이 반복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동료들과 서로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면서 시작하는 11월은 부족한 생활비에 시달리는 말단 관리의 진솔한 모습이 여실히 기록되어 있다. 지방관들의 인사이동과 엄돈영(嚴敦永)이 안동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된 소식, 거문고를 잘 타는 친구와의 만남,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빌린 『남정록(南征錄)』, 탈 것의 제약으로 교유활동을 하지 못하는 심정, 전해지는 가서(家書)에 대한 기쁨, 소실 자식 정길(丁吉)의 설사를 위해 지어 보낸 약 처방, 지우들과의 회동, 승보시(陞補試)의 경과, 노새를 빌리려고 애태운 사연, 소식을 듣고 찾아 오는 옛 친구들, 고향 마을에 달력을 보낸 일, 병산서원(屛山書院)과 여강서원(廬江書院)의 지(誌)를 간행하는 일, 솜을 지고 팔러 오는 고향 마을의 하인들, 세의(歲儀)를 챙김, 잠암(潛庵)의 일을 위해 고관들과의 소통, 원방(元方) 척(戚)과의 교유 등이 무료함 속에 적절히 분배되어 있다. 화남 공(華南公)을 꿈 꾼 이야기로 여는 12월은 지난달과 비슷한 행적을 보인다. 세의(歲儀)마련에 분주한 모습이 보인다. 『여지(廬誌)』를 간행하는 일과 그 경과, 서신의 왕래, 지병으로 인해 복용하는 귤피지황탕, 솜 팔러 올라온 하인들을 통해 받는 가서(家書)에 대한 기쁨, 잠암(潛庵)일의 추이에 대한 탐문, 좨주를 겸직하게 된 일, 벼슬길과 선대의 일로 점을 친 일, 이별했던 지우들과의 재회, 한양 관리들의 사치, 폐의(幣儀)의 수수, 꿈 이야기, 도목정사에 대한 관심, 증첩(贈帖), 선대의 일이 성공적으로 완성된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평범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객지에서 송년(送年)하는 사람들과의 내방 속에서 63세의 마지막 날을 마감하고 있다.
1860년 경신(庚申)년은 주인공의 나이 64세가 되는 해이다. 그의 한양 관직 생활은 지루하게 계속된다. 1월은 잠암(潛庵) 김의정(金義貞)의 절혜(節惠)를 부탁하는 일과 그 경과, 병산서원에 대한 걱정, 호남(湖南) 변방의 위험한 징조, 머물고 있는 집 내주(內主)의 회갑, 반촌(泮村)에서 노래하는 70세의 노파, 양학(洋學)하는 사람들의 체포, ‘인량차팔(人良且八)’과 ‘월월산산(月月山山)’을 대화로 한 무료함을 깨는 유머, 극남해 남조선에 관한 이야기, 박진사와 애꾸는 기생의 일화, 아들 우흠(宇欽)의 호원(湖院) 재석(齋席)의 유대(留代), 신평빈(新坪賓)의 혼수 장만으로 인한 진 빚에 대한 걱정 등이 1월의 일기를 채우고 있다. 두통 속에 잠암(潛庵)의 가장(家狀)을 초(抄)하면서 시작하는 2월은 아들 우흠(宇欽)이 주인공과 함께 머물며 일을 돕고 있다. 선대의 일을 성사시키려 노력하는 주인공은 여러 인맥들을 찾으며 도움을 요청한다. 배상련(裴相璉)의 귀향, 함풍제(咸豊帝)의 30세 생일 축하연에 가는 사신들, 회동(會洞)의 묘지명을 써준 일을 기록하고 있으며, 선대의 일을 마무리한 주인공은 낙향할 채비를 갖추며 반촌 사람들에게 인사를 닦는다. 고달픈 7개월의 벼슬살이를 마치고 21일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에 오른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사람들, 소실(小室)이 사내를 낳은 것, 여비가 바닥나 숙식비를 외상으로 지워놓은 것을 기록하며 마침내 26일 집에 돌아온다. 주인공은 쉴 틈도 없이 병상에 누운 손자 채아(蔡兒)가 기다리고 있다. 동네에 인사를 닦은 그는 분황(焚黃)을 준비하며 2월을 마감했다.
3월은 김민수(金民秀)의 편지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분황(焚黃)으로 발문(發文)한 것, 보리갈이, 지난해 8월 이후 처음으로 가지는 화수회(花樹會), 채아(蔡兒)의 병간호와 치료, 한양에 있는 아들 우흠(宇欽)의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 채아의 약을 구하기 위한 움직임들, 나무하다 쓰러진 노비, 한양에서 협잡하는 유생들에 대한 소식, 비 내리는 가운데 동사(洞舍)에 모여 치른 성대한 분황(焚黃) 행사, 외손녀의 혼사, 분황(焚黃) 결산, 채아가 약을 먹고 배설한 촌충(寸蟲)에 대한 기록들이 실려 있다. 윤 3월은 손자의 약으로 쓰이는 잔대풀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팔인(八仁) 놈의 악행, 오천(浯川) 시장에서의 굿, 소실(小室)의 두경(痘警), 연이은 비로 인한 농사와 땔감 걱정, 기생충으로 계속 고생하는 채아, 이어지는 의원들의 진찰과 처방, 종두(種痘), 면내(面內) 회문(回文), 서자 정길(丁吉)의 발병을 기록하고 있지만, 윤 3월의 기록은 채아에게 할애된 듯하다. 4월 역시 계속되는 채아(蔡兒) 뱃속의 기생충과의 싸움이 처방을 바꾸어가며 진행된다. 목아(木兒)의 혼사, 약으로 쓸 두더지, 뱀장어를 구하는 일, 동래(東萊)의 이양선(異樣船)에 관한 소식, 논갈이, 채아의 병에 좋다는 웅담을 구하지 못한 할아버지의 마음, 풍암서원(豊岩書院)의 회문(回文), 종두(種痘)를 위해 두종(痘種)을 구한 일, 영동(嶺東)의 화재 소문, 수령 엄돈영(嚴敦永)이 11명을 벌하고 옥에 가둔 일, 목아(木兒)의 망천(忘川) 초행(醮行)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3월의 내용과 비슷하게 채아의 복통에 식구들의 신경이 몰려 있다.
5월은 비 오는 날 떠난 초행(醮行)길에 대한 걱정과 엄돈영(嚴敦永)에게 잡혀간 유생들에 대한 경과, 초례(醮禮), 퇴상(退床), 심해지는 채아의 설사, 재종질(再從姪) 병흠(昺欽)의 재취(再娶), 희우(喜雨), 혜성(彗星)의 출현, 이앙(移秧), 서자 정길(丁吉)의 종두(種痘), 채아의 병세가 차도를 보인 것, 빙옹(聘翁)의 면례(緬禮), 의성(義城) 이노(吏奴)의 변고, 다시 진행되는 채아의 복통과 간호로 점철되어 있다. 마지막 날에는 아들 우흠(宇欽)의 여름옷을 마련하여 보내고자 하나 인편이 없어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려져 있다. 결국 근 석 달의 기록이 손자의 기생충으로 채워져 있는 셈이다. 6월도 여느 때처럼 아들 우흠(宇欽)에게 편지를 쓰는 것, 채아(蔡兒)의 병간호와 관찰로 시작한다. 왕서자(王庶子)의 요절, 기우제, 철정(鐵釘)을 훔친 목수, 무뢰배들의 신행 약탈 등과 같은 흉흉한 세상 소식들, 요양하러 가는 채아(蔡兒)의 선암(仙庵)행, 북소(北騷), 상놈들의 매과(買科), 채아(蔡兒)의 병을 낫게 하려는 푸닥거리, 이미 장자를 잃었고 장손 마쳐 잃게 된 주인공의 근심, 위중해진 채아의 병세, 이미 가망 없음을 알고 회피하는 의원들, 18일 장손의 죽음과 장례 절차, 한양에 도는 괴질 소식에다 소식이 끊어진 것에 대한 걱정하는 아비의 모습, 상장례(喪葬禮)로 손해 본 농사일에 대한 걱정들이 그려져 있고 마지막 날은 졸곡(卒哭)으로 장손을 떠나보냈다.
7월 들어 주인공은 사실로 전해지는 한양과 전국에 떠도는 괴질에 대한 소식으로 불안해한다. 아들의 편지로 안도의 숨을 쉬고 있지만 괴질로 죽어나가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기영(箕營)과 만부(灣府)에 들어온 중국의 불교신도들을 둘러 싼 괴이한 소문, 괴질(恠疾)에 대한 처방전, 옥책문(玉冊文)의 배접, 『사보(史補)』 의 편집, 비 때문에 차질을 빚는 농사, 출소주(秫燒酒) 제조, 괴질로 귀해진 생강과 마늘, 차아(次兒)의 담증(痰症), 한양 소식, 그물에 잡힌 괴상한 물고기, 물고기와 소금 값의 폭등, 폭풍에 부러진 소나무와 가래나무, 점점 다가오는 괴질, 돈화문에 나타난 뱀 두 마리에 대한 소문, 장마, 이어지는 괴질의 희생자들, 우흠(宇欽)의 급제를 기다리는 아비의 마음이 기록되어 있다. 8월의 첫날은 병산서원의 면회(面會)의 결과로 기사를 채우고 있다. 부내(府內) 괴질의 창궐, 거세지는 북소(北騷), 흉년의 조짐들, 관음사(觀音寺)의 벌목, 괴질로 인한 지인들의 죽음, 쉼없이 기다리는 아들의 소식, 호환(虎患), 장손의 신주(神主)를 만든 일, 결복(結卜)의 재 징수, 향청(鄕廳) 장무(掌務)를 부탁받고 거절한 일, 재종형(再從兄)이 향청(鄕廳)에서 체임된 일, 계아(季兒)의 오한, 재 징수 문제를 정소(呈訴)하는 일, 정장(呈狀)한 유생들이 낭패를 당한 일들이 기록되며, 이어지는 9월의 주된 일기 기사를 예고하고 있다.
9월은 종장(宗丈)의 소상(小祥)과 추수의 기사로 연다. 아들 우흠(宇欽)의 겨울 옷 걱정, 대지(大枝)의 결환(結還), 결복(結卜)의 재 징수 문제의 추이, 탐관오리로서의 엄돈영(嚴敦永)의 무능함, 잘못된 지붕 보수, 자암공(紫庵公) 분황례(焚黃禮), 국제(菊製)의 시제, 『황극편(皇極編)』 일곱 권을 초사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인공은 주로 책들을 초사하며 만년의 삶을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10월에도 조용하고 단조로운 만년의 고향 생활은 계속된다. 움직임 보다는 지인들을 통해 전해 듣는 소식이 많아진다. 목아(木兒)의 신례(新禮), 병산서원(屛山書院)의 『여지(廬志)』에 관한 회의(會議), 병호(屛虎)의 화해시도, 신임 원장 이일상(李一相)을 쫒아내고자 하는 개탄스러운 통문, 선영(先塋)에 회전(會奠)한 것, 종손(從孫) 낙주(洛周)의 낙방, 한양에 있는 아들 뒷바라지, 응봉(鷹峰) 절사(節祀), 박양갑(朴羊甲)이 관포(官庖: 도살장)을 설치하여 이득을 취한 일, 망천(忘川) 손부(孫婦)의 신행(新行), 호원(湖院)의 입향참례(入享參禮), 한양 소식, 홍(洪)과 채(蔡)의 분당, 계부(季婦) 성실(城室)의 출산, 호환(虎患)등이 기록되어 있다. 64세의 연말은 부(府)에서 결정한 재징집하는 일의 추이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11월은 대지(大枝)의 묘지일 때문에 예읍(醴邑) 수령과 입씨름한 일, 종증손부(從曾孫婦)의 신례(新禮), 문평(聞坪)[문경] 감찰 김병욱(金炳昱)이 김씨(金氏)에게 능욕 당한 일, 한양에 있는 아들 우흠(宇欽)과의 서신 왕래, 쌀값의 폭등, 한양에 도는 독감, 집안사람들의 기일, 아이들의 병 때문에 오고간 의원들, 서대순(徐戴淳)이 경평군(慶平君)을 논척한 일, 하상(河上) 향로(鄕老)들의 죽음, 지병인 냉설(冷泄), 과거(科擧)의 일정, 재징집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일기의 마지막인 12월은 지곡(枝谷)의 발포(發捕), 순옥(順玉)의 사건을 둘러 싼 김우계(金愚溪)와 이철(履轍)의 불화, 재 징집으로 면내(面內) 사람들이 입부(入府)한 일, 아들 우흠(宇欽)을 통해 전해진 한양 소식, 주인공의 감기로 인한 기침과 가래, 그로 인한 처방과 아녀자들의 고생, 서간(西磵) 사당의 부유사(副有司)를 잡아가 허체(許遞)한 일, 서소녀(庶小女) 유옥(柔玉)의 병, 함풍제(咸豊帝)의 행차에 보낸 조선의 사신들과 나라걱정, 진사(進士) 류우목(柳友睦)의 패지, 불안하고 부정확한 중국 소식들을 증언하고 있다. 64세의 마지막 날은 오랫동안 앓은 병과 삶에 대한 회고로 4년간의 일기를 마감한다.
이 일기는 작자 나이 61세부터의 기록으로 그 내용은 한 가문의 리더로서의 크고 작은 집안일들과 인적 유대 관계, 향촌 사회와 서원을 중심으로 한 활동, 그리고 말단의 임시 관직으로 환갑이후 펼쳐지는 한양에서의 객지 생활 등이, 한때는 자상한 할아버지, 아버지, 자식, 스승 그리고 조정의 말단 관리의 눈으로, 끊임없이 재생되는 삶의 단면들이 구석구석 조명되고 있다. 작은 개인의 일기를 통해 우리는 전체와의 상호보완적 관계, 다시 말해 미시적 관찰이 거시적 이해의 조건임을 입증할 수 있다. 개인과 집안 그리고 지역공동체 속에서 미미하게 드러나는 개개 감정들의 감응이 어떻게, 어떠한 모습으로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지, 평범한 반복 속에 잉태된 긴장들을 직관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 완미함을 음미할 수 있는 기초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