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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청일록(疏廳日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6+KSM-WM.1852.4717-20140630.00000000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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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일기
내용분류: 개인-생활-일기
작성주체 이돈우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52
형태사항 크기: 32 X 20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권 28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소호 한산이씨 대산종가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소청일록(疏廳日錄)
『소청일록(疏廳日錄)』은 한산이씨(韓山李氏) 대산종가(大山宗家)에 소장된 자료로, 대산 이상정(李象靖, 1711-1781)선생의 증직(贈職)과 시호(諡號)를 얻어내기 위해 1852년 11월 15일부터 1853년 4월 27일 까지 영남 유생들이 소(疏)를 올리게 되는 일정, 경과 그리고 결과추이의 기록을 선생의 현손(玄孫)인 이돈우(李敦禹, 1807-1884)가 합본한 것이다. 소청(疏廳) 기록은 불과 몇 개월간의 기록에 불과하지만 선현들의 시호와 증직을 청원하는 상세한 과정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문헌이며, 영남 사림에서 대산(大山) 선생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대산선생실기(大山先生實記)』, 김근호 등, 국학진흥원, 2012년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일성록』,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차 작성자 : 박세욱

상세정보

한산이씨(韓山李氏) 대산종가(大山宗家)에 소장된 자료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선생의 증직(贈職)과 시호(諡號)를 얻어내기 위해 영남 유생들이 소(疏)를 올리게 되는 일정, 경과 그리고 결과추이를 기록한 것이다.
개괄
한산이씨(韓山李氏) 대산종가(大山宗家)에 소장된 자료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선생의 증직(贈職)과 시호(諡號)를 얻어내기 위해 영남 유생들이 소(疏)를 올리게 되는 일정, 경과 그리고 결과추이를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은 상소를 올리기 위한 논의의 장소로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복합(伏閤)하여 비답을 얻어내는 과정만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공적인 성격이 강하다. 일종의 증빙과 참고자료로 삼을 목적으로 기록해 둔 것으로 보인다.
전체 28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3면은 파손되었고 읽을 수 있는 글자는 본 내용과 관계없는 것으로 보아 앞뒤 표지의 속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상하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용은 향촌과 도(道)의 여론 수렴과정을 거쳐 소(疏)를 올리는 인원들이 한양에 미리 설치해 둔 소청(疏廳)에 도착할 때까지의 사건들과 경위를 기록한 부분과, 서울에 도착하여 성균관 유생들의 공의를 모으고 실제 규혼(叫閽)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기록한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두 부분의 내용은 시공간상으로 두 개의 시점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필사하여 권(卷)으로 만든 사람은 한 사람일 수 있으나 두 부분의 작자는 동일한 시공간에 있지 않으므로 두 사람의 기록이 합쳐진 것이다.
작자 추정
전반부 12면의 기록은 1면에 8행으로 정서되어 있고 동일한 날짜에 다른 사건들은 "○"로 구분해 두었다. 후반부(총12면)로 접어들면서 앞 2면은 면당 15행의 행초서로 필사되어 있고, 중간 7면은 면당 10행으로 정서되어 있고 필체는 전반부와 비슷하며, 전반부에서 사건의 구분표시인 "○"표기가 들어 있다. 마지막 2면은 보다 작게 행초서로 쓰여 있으며 각각 14행과 13행으로 마감되어 있다.
1852년 11월 15일을 시작으로 12월 12일까지, 규혼(叫閽)하기 위한 준비 모임을 간략하게 개술하였고, 이듬해 2월 6일에서 7일까지, 즉 함창(咸昌)모임까지의 일정과 결과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 2월 18일, 다시 건너 뛰어 28일의 기록만 보여준다. 이후 3월 1일부터 서울에 도착하여 인마(人馬)를 돌려보내는 3월 14일까지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까지 한 단락으로 내용상 구분지어 볼 수 있다. 작자의 마지막 주에는 "이후의 일기는 소청일록권(疏廳日錄卷)에 기록해 두었다."라고 명시해 두고 있으며 페이지를 바꾸어 3월 15일부터의 기록이 시작된다. 이로써 편의상 이 전반부를 "상권"이라고 부른다.
지면을 바꾸어 3월 15일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일기는 안개 속에 사라져 버리고, 다시 2월 20일부터 시작된다. 상권에서 주인공은 3월 12일에야 서울에 도착하지만, 다시 시작하는 시점인 2월 20일의 주인공은 이미 서울에 와 있다. 이는 작자가 두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만약 한 사람의 기록이라면 사건이 완료된 후 다른 시공간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듣고 자신의 관점에서 추가로 기록해 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가능성은 기술 내용의 현장성을 감안하면 희박하다. 상권의 내용에 따르면 2월 18일 선발대가 한양으로 출발했다. 본 일행은 3월 2일에야 장도에 오른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2월 20일부터의 기록은(이하 "하권"으로 부름) 서울에 먼저 도착한 선발대 중 한 사람이 쓴 것일 것이다. 2월 18일 떠난 사람은 김약수(金若洙)와 대산선생의 후손인 이문직(李文稷, 1809-1877)이다. 후자는 대산선생의 현손(玄孫)인 이돈우(李敦禹, 1807-1884)의 재종(再從) 동생이다.
작자 추정문제는 상권과 하권의 두 사람을 전제로 해야 한다. 즉 소행(疏行)을 이끌고 상경하는 인물과 미리 출발하여 한양에서 소청을 설치해 본진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이다. 『일성록(日省錄)』 1853년(철종4년) 4월 12일 조목을 참조하면 당시 소(疏)에 이름을 올린 사람만 1950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분명 의문의 두 주인공은 이 명단에 들어 있다. 기록에서 나타난 김 아무개라는 소수(疏首)는 바로 자가 경윤(景胤)이고 호가 분원(賁園)으로, 김성탁(金聖鐸)김약행(金樂行)의 문집을 간행했던 김조운(金祚運, 1786-1870)이 맡았다. 소색(疏色)으로는 강서영(姜胥永), 이만억(李晩億), 이재흠(李在欽)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 두 주인공이 왕래하며 접촉한 사람들은 모두 147명에 달한다.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이 도합 1950명이므로 작자는 1803명 중의 두 사람이다.
상권의 내용을 보면 작자는 준비모임을 하는 과정에 모두 주도적으로 참석하고 있고, 상경하는 여정과 일부 감정적인 표현들이 직접적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인공은 소행행렬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을 짐작할 수 있는 어떠한 언급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상경하는 여정에서 진흙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만에 90리라는 여정을 소화하고 있다. 이로써 보건대 주인공은 60을 넘은 노인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마지막에 소요된 인마(人馬)를 돌려보내고 길에서 쓴 비용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본가(本家)의 인물로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권의 인물은 먼저 서울에 도착하여 주도적으로 소청(疏廳)을 옮겨가며 설치하고, 성균관의 영남 유생들과의 접촉을 통해 여론을 모으고 있으며, 본진의 합류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특히 소수(疏首)인 김조운(金祚運)을 "장(丈)"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는 당시 67세의 나이로 기록에서 "칠질(七耋)"로 표현한 것과 부합한다. 또한 유치윤(柳致潤, 1805-1880), 유교환(兪敎煥, 1805-1857)등과 절친한 모습을 모이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규혼(叫閽)하는 날을 기다리며 성균관 유생들과의 나들이한 사실로 보아 하권의 주인공은 40대 후반의 인물로 짐작할 수 있다. 작자는 복합(伏閤)의 장소에 직접 참여하고 있으며 소청(疏廳)을 유지하는 비용마련에 고심하고 있고, 또 비답(批答)을 받아낸 이후 처리과정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보면 상권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집안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상하권의 두 주인공은 40대 후반의 본가(本家) 사람이다. 따라서 먼저 선발대로 상경한 이문직(李文稷)과 소수(疏首)의 맡아 줄 것을 청한 현손(玄孫) 이돈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상권에서 소수가 사임하자 재차 청하는 인물로 "본손(本孫) 이돈우"가 거론되고 있으므로 상권의 작자는 이돈우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상권에서 이름이 두 차례 거론된 이돈우는 하권에서 한 번도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앞서 본 재종 동생 이문직(李文稷)은 하권 두 번째 기사(2월 25일)에서 한양으로 앞서 출발한 김약수와 함께 언급되고 있으므로 역시 상하권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또한 이돈우의 아버지이자 대산의 손자인 이병운(李秉運), 이병원(李秉遠)은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지만 그는 1840년과 1841년에 죽었다. 이와 같이 상권의 주인공은 미상이다. 그러나 하권의 주인공은 현손인 이돈우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상권은 본가의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었고, 하권의 주인공인 이돈우가 그것을 정리하여 합본한 자료로 추측할 수 있겠다.
대산 이상정 선생을 추증하고 시호를 청하는 상소는 이미 순조 을해년(1815) 11월 예조참판 김굉(金㙆)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이듬해 병자년(1816) 윤6월 10일 좌의정 한용귀(韓用龜)의 회계(回啓)에 따라 1816년 8월 이조참판으로 증직만 허락되었다. 다시 9월에 응교 이태순(李泰淳)의 상소하여 대산선생의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인쇄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증직이나 시호는 내려지지 않았다. 이에 8년 뒤인 갑신년(1824) 12월 병조참판 김희주(金熙周)가 상소하여 증직과 시호를 청하여 묘당에 품처하겠다는 명이 있었지만 그 역시 흐지부지되었다. 이로부터 28년이 흐른 뒤 1852년 11월부터 본향(本鄕)을 중심으로 규혼(叫閽)의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이 일록은 이때부터 윤허가 있을 때까지의 경과를 기록한 것이다.
상세 내용
상권에서는 임자년(壬子年) 11월 15일 100여명이 참석한 의성(義城) 유자정(孺子亭)에서의 발기모임, 20일 40여명이 참석한 노림서원(魯林書院)에서의 2차 모임, 12월 12일 130여명이 참석한 숭보당(崇報堂)에서의 향회(鄕會), 나아가 전체 도(道)의 의견을 묻기 위한 이듬해(1853년) 2월 6일, 400여명이 참석한 의성향교(義城鄕校)의 모임과 40여명이 참석한 함창(咸昌) 도회(道會)를 통해 소두(疏頭)와 상소에 필요한 소임들을 결정하는 과정이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함창(咸昌)에서 상경하여 도착하는 여정(3월 5일-12일)을 날씨, 식사, 숙박 등을 기록해 두었다.
하권은 시공간이 바뀌어 1853년 2월 20일의 일기부터 시작한다. 소청(疏廳)을 옮겨 차리는 과정과 문안 온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이어지며, 성균관의 유생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경위, 보낸 통문 등이 요약되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4월 2일로 복합(伏閤)하는 날을 정하고 참여한 소원(疏員)들의 명첩(名帖)을 기록한 것,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38-1816)의 초고에 따라 상소문의 정본(正本)을 완성한 것, 그리고 도승지(都承旨) 조병기(趙秉夔)가 사직함에 따라 복합하는 날짜를 10일로 미루어 정하는 기록이 4월 2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후 복합하는 날짜가 연기됨에 따라 야기되는 비용문제, 비용을 마련하러 보낸 향팽(鄕伻)에 대한 초조한 기다림과 두 차례의 나들이, 여수(旅愁)등이 기술되어 있고, 복합하는 경과가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12일 비답(批答)을 받든 장면과 축하가 기록되어 있고, 바로 13일에는 회계(回啓)를 확인하기 위한 기다림이 시작된다. 상경했다가 하향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 선생을 승무(陞廡)하는 규혼(叫閽)에 참석한 일, 회계(回啓)의 늦어짐에 대한 걱정, 일이 방해받고 있음을 알고 두릉(杜陵)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을 찾아 도움을 청하여 회계 여부를 알아보는 것으로 기록은 끝이 난다.
1861년 공조판서 이원조(李源朝, 1792-1872)의 상소문에 따르면, 철종 계축년(1853) 4월 이들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20년이 훌쩍 넘어 고종 임오년(1882)년 영의정 홍순목(洪淳穆, 1816-1884)의 상소에 따라 겨우 "이조판서"로 증직만 되었다. 분명 시호에 대한 요청도 있었으나 결국 내려지지 않았다. 물론 임오군란(壬午軍亂), 서원철폐령이라는 변수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증직은 있었으나 시호가 없었다는 것은 의문스럽다. 이로부터 28년 뒤인 1910년이 되어서 의정 윤용선(尹容善, 1829-?)의 주청에 따라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받았다. 결국 시호의 하사는 1세기 만에 이루어진 집안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이 소청(疏廳) 기록은 불과 몇 개월간의 기록이지만, 선현들의 시호(諡號)와 증직(贈職)을 청원하는 상세한 과정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문헌이며, 영남 사림에서 대산선생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 자료로, 영남 남인들의 정체성을 짐작할 수 있는 근본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
『대산선생실기(大山先生實記)』, 김근호 등, 국학진흥원, 2012년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일성록』,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차 작성자 : 박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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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청일록(疏廳日錄)
序。 大山先生尸祝之論。肇發於喪畢之辰。及門先輩各自草疏。以爲待時之具。而事體鄭重。因循未遑。中間有一再西上之擧。而拘於時義。旋卽撤還。迄于今六十年矣。壬子十一月十五日義城孺子亭【卽川沙金公遺亭】。都有司金魯進會員金養休金養植以下百餘員。聯名通諭於魯林書院。蓋更發治疏叫閽之論也。其文曰云云。於是院長金家洙等言於衆曰。此事之尙今遷就。乃吾輩後生之責也。居常慨欝。今此通諭。議論鄭重。■■■〔實是〕先獲我心者也。遂以同月二十日。定會於本院。會者四十餘員。前正言金羲裕言於座曰。高山立享之議。先輩講定有素。以至講舍齋廚。規模已成。前人之用盡誠力。付俾我後生者顧何如。而一番陳請之擧。無人倡發。以吾先師道學事功之若是宏偉。而尙未有畏壘之奉。先父老經營設施之若是勤懇。而亦未效遵承之責。豈不可慨也哉。矧今聖明在上。斯文大事次第修擧。吾輩幾十年含意而未遂者。不於此時而將何待乎事之成否。一聽於天而已。一番叫閽斷不可已也。座中僉意詢同。且曰此大事也。有非一面人士之所可擅便者。須廣收遠近老成之論然後擧措。庶無欠闕矣。遂發文於一邑各院。以十二月十二日定鄕會於本府之崇報堂。其文曰云云。十二月十二日開座於崇報堂。搢紳章甫會者一百三十餘員。時積雪路塞。獰寒慄烈。而遠邇之如是齊會者。可見尊衛之誠同出於彛好也。薦出公事員幼學李瓚進士金正銖曹司幼學權秉淵金弘洛金炳和。公事員使曹司傳言於座曰。 大山先生之尙今無妥靈之所者。實是斯文之欠典。吾黨之至未安也。雖緣 邦制有拘 遷就至今。而若一以退步爲事。則多士苦心。終無可伸之日。將以開春爲西上叫閽之擧。座中僉君子各陳所見。以爲商礭之地如何。座中僉議皆曰。此事之拖到。今日亦云晩矣。夫豈有異意哉。願公員博採衆論。早定大擧也。公員曰公議如此。固當向前做去。而一鄕之論猶不如一道大同之論。須有一番道論然後。可以牢定。遂薦出製通進士金鎭澔金健壽寫通朴桂壽鄭之坤。發通道內。以二月初六日定道會於義城鄕校。 二月。初六日到義城。鄕道儒會者四百餘員。夕後醴泉儒生持本邑校院通文來到。其文曰云云。又有大平丈席書簡。及順興沙川徐氏門中書簡來到。大槪皆鄭重敦事之意也。七日朝後。設會席於校門外。薦出曺司安東幼學柳宅欽義城幼學李絅在申錫祜慶州幼學李在䎘仁同幼學張敬植公事員安東進士金璨銖義城幼學申命休。出座行相揖禮。使曺司傳言於座中曰。大山先生立享之擧。尙今未遑。固吾黨之所共抑鬱者也。特以私設未安。故必待成命。然苟非自下叫請。則安能動上天之聽哉。今番之會。實爲治疏擧幡之行。未知僉意何如。衆意詢同。敦定疏擧。薦出疏首三望安東幼學金。首望爲多點。遂把定疏下諸任。以三月初三日定發行道會於咸昌鄕校。通諭各邑。製通安東幼學李庭雲醴泉幼學權寅夏寫通義城進士金濟源幼學金魯善。因起送儒生安東幼學李鉉。奉呈疏首望記。告以發行之期。疏首丈以不敢當之意。辭以呈單。本孫李正字敦禹更進敦請。 十八日。先送都廳幼學金若洙本孫幼學李文稷。上京爲先設疏廳。且收泮中公議也。 二十九日。小晦。晴。疏首丈以在家辭遞爲未安。爲參咸昌道會。遂發行本家子弟金澔壽金鎭{氵+奭}。管行幼學柳致任。及柳正字致好陪行入花府。直日進士金遇洙本孫進士李秀應幼學李秀戇李明稷。及李敦禹已先至留待矣。日暮因宿。 三月。初一日。雨終日。一行滯留。金澔壽有故冒歸。 初二日。晴。李明稷歸。晩發午站于豊山。薄曛到浯川宿。 初三日。晴。舟渡前津。遇自京回伻。略聞梗槪。午點于牛頭院。暮泊咸昌邑內宿。掌議義城進士金庭瑞抵宿鄕校。 初四日。朝雨晩晴。開座于明倫堂。道儒會者四十餘人。薦出曺司尙州幼學姜稄。咸昌幼學申應會。聞慶幼學南象稷。公事員龍宮幼學鄭昌德。咸昌幼學申匡運。出座行相揖禮。使曺司奉請疏首出座。疏首避席而言曰。生之老昏。無似猥當重任。恐貽大事之累。望賜遞改以安私分云云。座中固請勿辭。遂出坐商議治發之計。○大坪丈席抵書會中。大槪鄭重之意也。○直日安東幼學金鎭愨來到。疏色慶州幼學李在欽有故呈單。代出尙州進士姜胥永。慶州儒生幼學李在䎘來到。望出直日有司。○本倅李奎秉送助疏資十兩。蓋以門下後裔也。 初五日。晴。午後發行。疏下金庭瑞柳致任李在䎘金鎭{氵+奭}金鎭愨凡六員。路過芮津拜俛齋李公墓所而行。本孫諸人追送于路左。金遇洙亦有故辭歸。艱涉兎棧下曲水漲流。暮抵新院宿。是日行四十里。 初六日。陰而風。午點于草谷城中。疏首肩輿諸員步隨踰嶺。宿于安保驛。是日行六十里。 初七日。陰而寒。午點于丹月津頭渡江。遇雨至棗院止宿。是日行七十里。雨徹夜不止。極爲愁闷耳。 初八日。雨雪交下。待晴。午後登道。山巓皆戴雪肆寒。泥路添水益淖。行事極艱。僅行四十里。止宿毛豆院。 初九日。晴。早發作行。寒氣甚峭。至龍山洞午點。宿于白巖市店。是日行七十里。 初十日。雲陰。路由左壯院行數十里許。雨雪交作。冒至松洞店【一名牛項】止宿。是日行三十里。連掣雨戱未得趲程。極以愁悶耳。 十一日。載陰載暘。泥濘尤甚。行事益艱。午點于列院。夕宿于新院。是日行九十里。 十二日。晴。渡氷庫津。直抵西泮疏廳。是日行四十里。凡浹辰在途閱來險嶺危灘。風雪陰雨。而一行無事克抵。先來諸員亦安頓留住。極爲欣幸。直日安東進士金邁銖已於去月卄二日先到矣。○嶺人在泮者。權司果宅夏權進士載衡李都事晩翊吳進士光一裴典籍象鉉李進士晩松權進士好淵金碩士在九趙碩士彦敎來問。知舊來問者鎭日繁劇。別有時到記。此不疊錄。 十三日。陰霏。京中物議。皆以爲高山請享實是未遑之典。而禁令之下。有難輕議。爵謚之典。亦是所不可緩者。以此先請。似宜尤便。僉意皆然。遂定以請爵謚疏。○李注書錫宙南進士正敎來問。 十四日。晴。回送各處人馬。道路之費。曠日倍入。始事之初。係切闷意也。○金生員是珩金碩士魯善金進士昌銖來問。轉聞掌議安東進士金正銖。病未發行。遠用慮闷。【此後日記。記在疏廳日錄卷。】 ■■■■■(䟽儒上來員)。■■(䟽首)。上䟽大槩。慶尙道儒生。幼學臣金○○等。敢諫故。贈參判臣李○○。道學表著之實。冀蒙爵諡褒崇之典事。 二月。二十日。海底金上舍邁銖。先爲入來。 二十五日。大風。內龜金都廳若洙。與本家人李文稷。同爲入來。先托于興德洞安應吉家。金碩士在九。金進士邁銖。權進士載衡。趙碩士彦敎。相會竟日而罷。 二十六日。溫。治送兩處。回馬移設疏廳於集春門外崔元興家。泮村知舊來話。今此疏擧出於七十年鄭重之餘。勿論京鄕與他本色。孰不以高山事爲當爲。而請額一款。事體至重。且屛山事纔已見阻。此時此請有難準事。爵諡之典。尤是所不可緩者。則莫若以此先請繼請享與額。甚合事宜。僉議皆然。在鄕諸見。姑未知如何歸一。而要俟疏首入來後。從當爛議商確計耳。 二十七日。權直長宅夏。出直來會。李進士鳳基。鄭進士夔和來見。泮中逐日相從者。別有時到。此不復錄。 二十八日。日氣蒸欝。略探方外知舊中。物論皆以爲此事之尙今未遑。實是斯文之闕典。士林之羞恥。將欲爲同聲共濟之道云云。彝裏所同京鄕無間。良覺感歎。 二十九日。李注書錫宙來問。 三月。初一日。數日蒸欝之餘。風雨大作。在泮諸人不惟不能相會爛商。且料鄕間發行之期不遠。而似無趁時裝發之路。極以愁惱耳。 初二日。晴。略探南村知舊。物論無異。辭皆以爲當然。惟幸公議之不泯。而未知主世道者。亦有此見否。權直長宅與泮中諸上舍來會。燃燭夜深而罷。 初三日。朝陰晩晴。泮中日有追隨之樂。而滯留無甚事爲。深處物論無由探知。只有愁惱耳。 初四日。自夜大雷震雨下。至朝始晴。日有追隨。煩不盡錄。 初五日。快晴。韓承宣啓源來問。略有酬酢而罷。 初六日。陰而寒。泮中多會。鄭別檢顯德來問。 初七日。寒雨霏霾。終日無停刻。在途䟽行今到何地。而要之老人行事。似難作程。憂慮萬千。雨勢如此。而諸員來會。尤慰旅愁。竟日乃罷。 初八日。雨雪交下。餘寒甚峭。至晡時始晴。 初九日。快晴。送人探南北村物論。則皆以爲大山之於立祀頒額。俱是未遑之典。然禁令至嚴。有難輕議。爵謚一款亦可爲。次第崇奉之道此不可不用力云云。深喜公議之猶在耳。鄭別檢顯德以有出直事。委來作別。金正言麟燮來問。 初十日。雨雪又下。計疏行之程。不日當到。而連有日戲。極爲行事慮耳。 十一日。陰霾。晩後始晴。因科儒聞。疏行計當於今日入來。而尙無跫音。深庸紆欝。 十五日。晴。送儒生請謹悉于大學掌議趙然斌。(掌議)(卽二十二年少也)辭以不敢自擅便。齋中公議以爲施行之地云。○權司果宅夏。權進士好淵告別而歸。金邁銖亦有故先歸。趙碩士彦育。白碩士箕東。曺碩士光復。成碩士周喆來問。 十六日。晴。疏色禮安幼學李晩億。以掣於憂故。續後退到之意。付書來到。○柳碩士致潤權碩士久相權碩士承夏李正言仁東李碩士晩杰來問。 十七日。晴。始抄出嶺儒名帖。金校理鎭衡金碩士楨洛來問。韓參判鎭庭伻問。○庭會日子漸近。嶺儒赴擧者續續相問。 十八日。晴。搆出請謹悉通文草。待科後將通齋中。○聞深處物議。一齊有恢公之意。而事係 恩典。似不免遅緩。旅苦之艱。極憫極憫。○孫正言永老來問。 十九日。微雨。因舊來及門諸先輩所述疏草略。加參润製成一本。且待大坪疏本之之來。以爲參用計。○李抄啓能燮鄭碩士鳴和鄭碩士思容來問。 二十日。晴。適會庭會紛撓益甚。本事不無相妨。殊覺憫然。夕聞姜世奎獲參。 二十一日。晴。掌議金正銖來到。遠道驅馳。不免勞頓。令人慮憫。李營將儒虎金進士炳礪李碩士能奕金碩士{金+憲}李碩士炳秀來問。○聞安東儒生以還弊事上來。而事嫌幷擧。亦係憫意耳。○嶺儒灞歸者續來告別。挽柳致润。與之同住。 二十二日。朝陰夜雨。遣儒生復請謹悉。掌議一向以不能自主之意委托。多端可憫。○金正言錫熙來問。 二十三日。晴。疏色李晩億退到。久企之餘不覺慰豁。 二十四日。晴。遣儒生入齋中。探聞齋中物議。居齋進士李廷實李臣秉洪■〔俊〕學李基鎬李運河相續來問。共商始事之議。○睦承旨仁培來見。睦承旨仁栽正言仁會問。 二十五日。晴。直日義城幼學金奭裕退到。自蘇湖本家聯書抵疏廳。以致鄭重敦事之意。○金承旨會明李承旨承輔來問。○設疏廳。 二十六日。晴。改搆通文。送諭于齋中。請謹悉其文曰。伏以僉尊以四方秀造之賢。居一國首善之地。綱紀乎菁莪之化育。權衡乎士林之論議。凡係斯文之事。莫不仰關于賢關生等。先師大山李先生開繼聖學發揮。斯文之功。實是百世之宗師。而一國之共知■〔尊〕也。往者儒章之一再擧置。宰疏之相繼陳請。雖有 贈爵印書之褒。而節惠易名之典。未及蒙施。豈非昭代之闕典。而多士之抑欝者乎。生等玆將合謀同聲以爲籲天。請章之擧。伏惟貴德尊賢。實惟秉彛之■■■無間於遠邇者也。伏願僉尊濟以公議。特賜回諭。俾卽伏閤得徹微悃。使全嶺七十年苦心之事。一朝得伸則實亦僉尊之賜。而吾黨之幸也。伏願僉尊垂察焉。仍遣儒生。復見掌議。掌議答以齋議僉同。將奉公施行云 二十七日。晴。太學回通來到。其文略曰。來通辭意謹悉。大山李先生爵謚前。旣陳請知有贈秩印書之褒。而今承僉君子通諭。尙欠壹惠之典。伏願僉尊博采衆議。克敦大事。幸甚。○聞世道物議。則皆以爲本事陳請。本甚鄭重。而朝家褒贈當用特例。七十州多士之裹足。不得不恰慰所望云云。公議之不限遠邇。殊爲可感(矣)。○趙進士觀人權校理應夔洪進士必謨金碩士濟薰來問。○始揭道會時爬定任錄。因設疏廳。 二十八日。陰。以四月初二。卜定伏 閤日爲文通京中知舊各處。其文略曰。生等以先師大山李先生請謚事。通告于太學齋中。旣以奉許謹悉。將以來初二相率。伏閤俟命之地。伏惟僉尊俱在同儕之中。不應相外於斯文之事。玆以通告云云。因列書掌議以下疏任名帖。○修整鄭立齋所著疏草。定爲正本。始寫嶺儒名帖。○安參奉景禕送其子進士世英來問。鄭進士晉默金進士秀直金碩士大潤來問。○太學■〔守〕僕數數來見。因知委伏閤時擧行節次。 二十九日。晴。書名帖。送疏本于泮居進士金國敎。使之整寫。○趙碩士徽相趙進士錫龍申進士奭求曺注書錫萬來問。 三十日。晴。疏色姜胥永退到。幼學姜稷以有任莫赴之意抵書疏廳。兼致恢公議敦大事之意。又伴送舊來爲此事屢次疏錄。及四韻詩一絶求和。姜運欽亦抵書幷問。○趙連山錫麟金正言錫熙鄭注書東奎來問。 四月。初一日。晴。寫名帖畢。凡數千人。權校理應夔自直中。委通時耗。且議伏 閤事。蓋都承旨趙秉夔有故呈辭。而儒疏捧入職在都令故也。(遂與在泮知舊。更議退定日子)不得已伏閤。更以初十日退定。○李承旨宗秉以病未躬問之意。送伻致辭。李參奉正秉李進士種基吳進士徹相來問。 初二日。晴。權判書大肯來問。○權應夔又自直中書通。趙台淳新差都令韓啓源繼入政院。明日伏 閤似好云云。而旣已退定。且有時論故。不復更進。 初三日。晴。伏閤差退而經用已竭。推貸無路。鄕伻日夕苦企。而漠然無聞。極爲雍憫。留泮知友。迭次來問。 初四日。晴。諸員以無甚事爲度日極難。爲罷愁寂。往遊三淸洞而歸。 初五日。晴。待鄕伻不至。○自掌議以下復遊于柏洞暎波亭而歸。連日聘覽。足暢旅愁。夕雨達夜。 初六日。晩晴。寫疏本畢。○韓啓源以小简通示物論恢公之意。且邀本家人。共商伏閤之議。○苦企鄕伻。而竟又不至。悯不可言。 初七日。晴。燈夕隔日[鄕伻來到]。大坪蘇湖書简。以陳請之變改初議誚責鄭重。甚悚。○諸員各得家書。聞平報。 初八日。陰。疏首丈以隨時量宜之意。答大坪蘇湖書。○都城掛燈夜景爛熳。諸員暫爲遊觀而歸。 初九日。微雨。姜胥永金奭裕各有緊故先歸。 初十日。晴。奉疏。齊伏于敦化門外。使太學首僕呈大槩于政院。院隸來問謹悉有無。還授大槩而入。蓋儒疏之不可卽日捧入有例而然也。居齋進士一齊來問。申刻報牌遂追出之。 十一日。晴。卯刻纔報復奉函。齊伏送大槩於政院。而政院終不捧入。鄕伻持五馬來到。在家之人周念諸員皈事。可感。 十二日。陰。伏閤已三日。政院送隸督入。柳致任。李在䎘。陪疏首幷入政院。以疏式之遠例執咎多端。可歎。酉時承優批■■■■■■■■■。批曰。省疏具悉。疏辭令廟堂稟處。爾等退修學業。出讀批儒生。禮安進士。李晩松。一番唱讀後。疏首以下。一齊四拜。遂捲入泮村。夜已昏矣。泮中知舊。來與相賀。 十三日。晴。柳致任。金鎭愨。先發。兪都事敎煥入來。終日講誼益篤。仍止宿。達夜打話。至曉鍾乘月出去。蓋知其晩後始來。由勢勢之無路辦一款段故也。見其所持文蹟。皆嶺以南。宿德先賢之與其先王丈。往復書札也。收拾聯幅。要以爲世講宿契地。亦可感服興歎也。 十四日。疏首丈。及金進士庭瑞。金鎭{氵+奭}。李在䎘。一齊發行。蓋今行上來諸員。洽爲十五六而皆無事來往。況疏首丈七耋尊齡。進食筋力一向康健。入泮一月得準所當爲之事。而浩然南皈。斯亦非偶然者。此後回啓之早晩。爵諡之極美。果能趁卽擧行。以慰全嶺多士之望否。是慮是企。疏下未發諸員。泮中知舊。多來會。李參判明迪伻問。申司諫佐模入來。乖逢。 十五日。朝起雨下。爲行事極慮。泮中知舊來會。款洽足。忘旅愁矣。 十六日。大風。甚寒。終日弊〖閉〗門悄坐相顧。惱悶。李都事晩翊來。與半餉。亦可慰也。 十七日。以沖齋權先生陞廡事。擬有三道合疏之議。設席于養賢庫大廳。而發文各道。爲趁時叫閽之擧。嶺中留泮者。亦皆往參。 十八日。略探回啓早晩。而以館錄注薦等事。似無念及於此。且大臣次對後。可以稟處則此月內擧行。未可預期云。極可悶然耳。金進士邁銖送文百緍。爲疏員酒餠之資。致與泮中七八知舊。團會一噱。良洞李正言子華不起於時疹云。慘怛慘怛。李晩億又爲下去。客地分張悵然未已也。 十九日。朝後盲風大作。晩益乖雨。纔送金上舍正銖發行。而日勢如此。想無渡江之望。爲行事慮之不已耳。齋中僉儒。及泮中搢紳來會。竟日稍慰。旅館涔寂之懷耳。 二十日。陰。今日得對。又不成云。事無指期。孤鎖無聊。鄕慮旅愁。排遣不得。可悶。 二十一日。柳致潤還鄕。午後强隨諸益後。遊賞泮後而歸。 二十二日。對韓令。則一邊揶揄之徒。惟事沮格。京鄕一二和應。似不得售計。可笑可歎。送人斗淩。爲一動得計。 二十三日。稟處遲速。杳難指期。閱月旅苦。時刻爲悶。往探南村物情。尙不得以一言回云。卜以前知擲錢得坤之比。解之者以爲再明可遂云。預切欣喜。然未知果如何耳。 二十四日。暮後聞斗淩丁酉山入來云。 二十五日。乘晨月往學橋。訪酉山在處。則作日出入某處。尙爾不來。故不得已歇沂旅店。須待其還。午後始得相對話說。入泮已昏黑矣。困倒不宿。 二十六日。午後復作學橋行。正說間調知廟堂稟處。謂當匪久可成云。此丈一行之力。頗不尠耳。薄昏入泮。 二十七日。朝霧四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