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괄
한산이씨(韓山李氏) 대산종가(大山宗家)에 소장된 자료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선생의 증직(贈職)과 시호(諡號)를 얻어내기 위해 영남 유생들이 소(疏)를 올리게 되는 일정, 경과 그리고 결과추이를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은 상소를 올리기 위한 논의의 장소로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복합(伏閤)하여 비답을 얻어내는 과정만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공적인 성격이 강하다. 일종의 증빙과 참고자료로 삼을 목적으로 기록해 둔 것으로 보인다.
전체 28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3면은 파손되었고 읽을 수 있는 글자는 본 내용과 관계없는 것으로 보아 앞뒤 표지의 속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상하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용은 향촌과 도(道)의 여론 수렴과정을 거쳐 소(疏)를 올리는 인원들이 한양에 미리 설치해 둔 소청(疏廳)에 도착할 때까지의 사건들과 경위를 기록한 부분과, 서울에 도착하여 성균관 유생들의 공의를 모으고 실제 규혼(叫閽)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기록한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두 부분의 내용은 시공간상으로 두 개의 시점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필사하여 권(卷)으로 만든 사람은 한 사람일 수 있으나 두 부분의 작자는 동일한 시공간에 있지 않으므로 두 사람의 기록이 합쳐진 것이다.
작자 추정
전반부 12면의 기록은 1면에 8행으로 정서되어 있고 동일한 날짜에 다른 사건들은 "○"로 구분해 두었다. 후반부(총12면)로 접어들면서 앞 2면은 면당 15행의 행초서로 필사되어 있고, 중간 7면은 면당 10행으로 정서되어 있고 필체는 전반부와 비슷하며, 전반부에서 사건의 구분표시인 "○"표기가 들어 있다. 마지막 2면은 보다 작게 행초서로 쓰여 있으며 각각 14행과 13행으로 마감되어 있다.
1852년 11월 15일을 시작으로 12월 12일까지, 규혼(叫閽)하기 위한 준비 모임을 간략하게 개술하였고, 이듬해 2월 6일에서 7일까지, 즉 함창(咸昌)모임까지의 일정과 결과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 2월 18일, 다시 건너 뛰어 28일의 기록만 보여준다. 이후 3월 1일부터 서울에 도착하여 인마(人馬)를 돌려보내는 3월 14일까지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까지 한 단락으로 내용상 구분지어 볼 수 있다. 작자의 마지막 주에는 "이후의 일기는 소청일록권(疏廳日錄卷)에 기록해 두었다."라고 명시해 두고 있으며 페이지를 바꾸어 3월 15일부터의 기록이 시작된다. 이로써 편의상 이 전반부를 "상권"이라고 부른다.
지면을 바꾸어 3월 15일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일기는 안개 속에 사라져 버리고, 다시 2월 20일부터 시작된다. 상권에서 주인공은 3월 12일에야 서울에 도착하지만, 다시 시작하는 시점인 2월 20일의 주인공은 이미 서울에 와 있다. 이는 작자가 두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만약 한 사람의 기록이라면 사건이 완료된 후 다른 시공간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듣고 자신의 관점에서 추가로 기록해 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가능성은 기술 내용의 현장성을 감안하면 희박하다. 상권의 내용에 따르면 2월 18일 선발대가 한양으로 출발했다. 본 일행은 3월 2일에야 장도에 오른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2월 20일부터의 기록은(이하 "하권"으로 부름) 서울에 먼저 도착한 선발대 중 한 사람이 쓴 것일 것이다. 2월 18일 떠난 사람은 김약수(金若洙)와 대산선생의 후손인 이문직(李文稷, 1809-1877)이다. 후자는 대산선생의 현손(玄孫)인 이돈우(李敦禹, 1807-1884)의 재종(再從) 동생이다.
작자 추정문제는 상권과 하권의 두 사람을 전제로 해야 한다. 즉 소행(疏行)을 이끌고 상경하는 인물과 미리 출발하여 한양에서 소청을 설치해 본진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이다. 『일성록(日省錄)』 1853년(철종4년) 4월 12일 조목을 참조하면 당시 소(疏)에 이름을 올린 사람만 1950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분명 의문의 두 주인공은 이 명단에 들어 있다. 기록에서 나타난 김 아무개라는 소수(疏首)는 바로 자가 경윤(景胤)이고 호가 분원(賁園)으로, 김성탁(金聖鐸)과 김약행(金樂行)의 문집을 간행했던 김조운(金祚運, 1786-1870)이 맡았다. 소색(疏色)으로는 강서영(姜胥永), 이만억(李晩億), 이재흠(李在欽)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 두 주인공이 왕래하며 접촉한 사람들은 모두 147명에 달한다.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이 도합 1950명이므로 작자는 1803명 중의 두 사람이다.
상권의 내용을 보면 작자는 준비모임을 하는 과정에 모두 주도적으로 참석하고 있고, 상경하는 여정과 일부 감정적인 표현들이 직접적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인공은 소행행렬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을 짐작할 수 있는 어떠한 언급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상경하는 여정에서 진흙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만에 90리라는 여정을 소화하고 있다. 이로써 보건대 주인공은 60을 넘은 노인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마지막에 소요된 인마(人馬)를 돌려보내고 길에서 쓴 비용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본가(本家)의 인물로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권의 인물은 먼저 서울에 도착하여 주도적으로 소청(疏廳)을 옮겨가며 설치하고, 성균관의 영남 유생들과의 접촉을 통해 여론을 모으고 있으며, 본진의 합류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특히 소수(疏首)인 김조운(金祚運)을 "장(丈)"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는 당시 67세의 나이로 기록에서 "칠질(七耋)"로 표현한 것과 부합한다. 또한 유치윤(柳致潤, 1805-1880), 유교환(兪敎煥, 1805-1857)등과 절친한 모습을 모이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규혼(叫閽)하는 날을 기다리며 성균관 유생들과의 나들이한 사실로 보아 하권의 주인공은 40대 후반의 인물로 짐작할 수 있다. 작자는 복합(伏閤)의 장소에 직접 참여하고 있으며 소청(疏廳)을 유지하는 비용마련에 고심하고 있고, 또 비답(批答)을 받아낸 이후 처리과정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보면 상권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집안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상하권의 두 주인공은 40대 후반의 본가(本家) 사람이다. 따라서 먼저 선발대로 상경한 이문직(李文稷)과 소수(疏首)의 맡아 줄 것을 청한 현손(玄孫) 이돈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상권에서 소수가 사임하자 재차 청하는 인물로 "본손(本孫) 이돈우"가 거론되고 있으므로 상권의 작자는 이돈우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상권에서 이름이 두 차례 거론된 이돈우는 하권에서 한 번도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앞서 본 재종 동생 이문직(李文稷)은 하권 두 번째 기사(2월 25일)에서 한양으로 앞서 출발한 김약수와 함께 언급되고 있으므로 역시 상하권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또한 이돈우의 아버지이자 대산의 손자인 이병운(李秉運), 이병원(李秉遠)은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지만 그는 1840년과 1841년에 죽었다. 이와 같이 상권의 주인공은 미상이다. 그러나 하권의 주인공은 현손인 이돈우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상권은 본가의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었고, 하권의 주인공인 이돈우가 그것을 정리하여 합본한 자료로 추측할 수 있겠다.
대산 이상정 선생을 추증하고 시호를 청하는 상소는 이미 순조 을해년(1815) 11월 예조참판 김굉(金㙆)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이듬해 병자년(1816) 윤6월 10일 좌의정 한용귀(韓用龜)의 회계(回啓)에 따라 1816년 8월 이조참판으로 증직만 허락되었다. 다시 9월에 응교 이태순(李泰淳)의 상소하여 대산선생의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인쇄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증직이나 시호는 내려지지 않았다. 이에 8년 뒤인 갑신년(1824) 12월 병조참판 김희주(金熙周)가 상소하여 증직과 시호를 청하여 묘당에 품처하겠다는 명이 있었지만 그 역시 흐지부지되었다. 이로부터 28년이 흐른 뒤 1852년 11월부터 본향(本鄕)을 중심으로 규혼(叫閽)의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이 일록은 이때부터 윤허가 있을 때까지의 경과를 기록한 것이다.
상세 내용
상권에서는 임자년(壬子年) 11월 15일 100여명이 참석한 의성(義城) 유자정(孺子亭)에서의 발기모임, 20일 40여명이 참석한 노림서원(魯林書院)에서의 2차 모임, 12월 12일 130여명이 참석한 숭보당(崇報堂)에서의 향회(鄕會), 나아가 전체 도(道)의 의견을 묻기 위한 이듬해(1853년) 2월 6일, 400여명이 참석한 의성향교(義城鄕校)의 모임과 40여명이 참석한 함창(咸昌) 도회(道會)를 통해 소두(疏頭)와 상소에 필요한 소임들을 결정하는 과정이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함창(咸昌)에서 상경하여 도착하는 여정(3월 5일-12일)을 날씨, 식사, 숙박 등을 기록해 두었다.
하권은 시공간이 바뀌어 1853년 2월 20일의 일기부터 시작한다. 소청(疏廳)을 옮겨 차리는 과정과 문안 온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이어지며, 성균관의 유생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경위, 보낸 통문 등이 요약되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4월 2일로 복합(伏閤)하는 날을 정하고 참여한 소원(疏員)들의 명첩(名帖)을 기록한 것,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38-1816)의 초고에 따라 상소문의 정본(正本)을 완성한 것, 그리고 도승지(都承旨) 조병기(趙秉夔)가 사직함에 따라 복합하는 날짜를 10일로 미루어 정하는 기록이 4월 2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후 복합하는 날짜가 연기됨에 따라 야기되는 비용문제, 비용을 마련하러 보낸 향팽(鄕伻)에 대한 초조한 기다림과 두 차례의 나들이, 여수(旅愁)등이 기술되어 있고, 복합하는 경과가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12일 비답(批答)을 받든 장면과 축하가 기록되어 있고, 바로 13일에는 회계(回啓)를 확인하기 위한 기다림이 시작된다. 상경했다가 하향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 선생을 승무(陞廡)하는 규혼(叫閽)에 참석한 일, 회계(回啓)의 늦어짐에 대한 걱정, 일이 방해받고 있음을 알고 두릉(杜陵)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을 찾아 도움을 청하여 회계 여부를 알아보는 것으로 기록은 끝이 난다.
1861년 공조판서 이원조(李源朝, 1792-1872)의 상소문에 따르면, 철종 계축년(1853) 4월 이들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20년이 훌쩍 넘어 고종 임오년(1882)년 영의정 홍순목(洪淳穆, 1816-1884)의 상소에 따라 겨우 "이조판서"로 증직만 되었다. 분명 시호에 대한 요청도 있었으나 결국 내려지지 않았다. 물론 임오군란(壬午軍亂), 서원철폐령이라는 변수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증직은 있었으나 시호가 없었다는 것은 의문스럽다. 이로부터 28년 뒤인 1910년이 되어서 의정 윤용선(尹容善, 1829-?)의 주청에 따라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받았다. 결국 시호의 하사는 1세기 만에 이루어진 집안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이 소청(疏廳) 기록은 불과 몇 개월간의 기록이지만, 선현들의 시호(諡號)와 증직(贈職)을 청원하는 상세한 과정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문헌이며, 영남 사림에서 대산선생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 자료로, 영남 남인들의 정체성을 짐작할 수 있는 근본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