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괄
류의목(柳懿睦, 1785-1833)이 1796년(12세) 1월부터 1802년(18세) 12월까지 7년간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일기이다. 풍산 류씨(豊山柳氏) 화경당(和敬堂)에 소장된 필사본으로, 전체 91면(표지 포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면(앞 3면, 뒤 1면)에 해당하는 속지로 제본되어 있다. 각 면에는 16행이 정성스럽게 필사 있으며, 간혹 행간에는 두 줄 주석이 달려 있다. 필체는 뒤로 갈수록 흘림이 많아진다. 서문에 따르면 1806년 즉 작자의 나이 22세 중추(中秋)에 쓴 것으로 자서하고 있는데, 서문만 써서 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흩어진 초고들을 정리하여 다시 정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기는 비록 7년간, 완전한 햇수는 4년의 기록에 불과하지만,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영남 남인의 세세한 공동체적 생활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저자의 감수성 풍부한 문학적 표현뿐만 아니라 18세까지의 수학과 인성함양을 더듬어 볼 수 있고, 또한 일기에는 집안사람들과 방문객 등 약 600명의 인명이나 택호 등이 등장하고 있어 문화적 유산과 인적 네트워크 확인할 수 있다. 거시적 측면에서 풍산 류씨(豊山柳氏) 겸암파(謙巖派)의 지역적 위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가계의 변천, 통혼(通婚), 남인과 서인의 갈등, 서학(西學)에 대한 영남 유림의 태도, 입을 통해 전해지는 중앙 조정의 일들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중심과 주변의 상호보완적 기능을 확보할 수 있고, 영남 남인의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더 없는 자료로 평가된다.
작자 소개
주인공은 풍산 류씨(豊山柳氏) 겸암파(謙巖派) 22세손으로, 자가 이호(彛好)이고 호는 수헌(守軒)이란 분이다. 부친 류선조(柳善祚, 1757-1799)와 모친 광산 김씨(光山金氏, 1757-1829)사이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1785년(정조 9년) 11월 4일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허약하여 잔병을 많이 앓았으며, 결국 주인공의 나이 15세(1799년)에 죽고(「행장(行狀)」에 따르면 13세 때라고 하지만 일기에 따름) 조부, 월오공(月梧公) 류일춘(柳一春, 1724-1810)의 엄격한 훈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성리학에 관심을 보인 그는 일기가 끝나는 해인 임술년 즉 1802년 문소(聞韶) 김씨 재화(在華)의 딸과 결혼하여 장녀를 얻지만, 불행하게도 첫째 부인은 27세의 나이로 죽는다. 18세(1802)부터 주인공은 일기에서 수찬 공(修撰公)으로 나타나는 아버지 항렬인 학서공(鶴棲公), 류이좌(柳台佐, 1736-1837)의 학문적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0세(1804년)에는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38-1816)에게 수학한 기록이 보이며 그의 강독 소리에 칭찬을 받았다고 행장은 증언하고 있다. 이후 사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30세 중반에 아주 신씨(鵝州申氏)의 둘째 부인을 맞이하여 1820년 장남 도원(道元)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주인공은 남촌(南村) 삼봉(三峯)아래 거연재(居然齋)와 우애헌(偶愛軒)을 짓고 독서하는 삶을 살아간 듯하며 당시 안동부사인 조정화(趙鼎和)와 안광직(安光直, 1775-?)등의 칭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대학의의(大學疑義)』, 『중용관(中庸管)』, 특히 예설(禮說)에 뛰어나 『상례고증(喪禮考證)』1책이 있었으나 화재로 손실되고 4책의 유고(遺稿)만 전해진다. 겸암정사(謙巖精舍)에서 수십일 간 무리하게 책을 읽다가 병을 얻어 1833년(순조33년) 3월 20일 49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8월 11일 덕동(德洞)에 묻혔다. 그의 문집은 증손 류정우(柳廷佑)가 편집하여 『수헌선생문집 (守軒先生文集)』 8권으로 1937년 간행되었다.
상세 내용
1796년은 1월에서 2월 25일까지의 기록만 보인다. 할아버지의 동선을 중심으로 친인척들의 왕래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날짜 아래 간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1월 26일부터 2월 25일까지의 간지에는 기록의 착오가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2월 24일 작자의 막내 동생 용수(龍壽)가 태어나는데, 그가 바로 류진현(柳進鉉)이란 분이다.
1797년의 기록은 정조 21년, 즉 작자의 나이 13세일 때의 일기로 1월에서 3월 21일까지의 일상사를 보여주고 있지만 기록하지 않은 날이 더 많다. 부친의 발병이 1월 2일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부친은 이미 이전부터 병을 앓아 왔으며 2일 증세가 악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두 차례 부친의 움직임이 포착되지만 역시 조부의 동선에 따라 일기는 구성되어 있으며, 병산(屛山)과 화천(花川)을 오고가는 것으로 보아 조부는 서원(書院)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 두 해의 기록은 어떠한 상황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자의에 의해 중도에 그만두었음을 서문에서 언급하였다. 작자는 이러한 기록들을 버리기 아까워 권으로 엮어 놓았다고 했다.
1798년, 14세 때의 기록은 빠짐없이 온전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정초부터 부친이 지병으로 몸져누움에 따라 친인척들의 병문안과 약방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해부터 작자는 서당에 나가 『소학(小學)』을 배우면서 많은 친인척들의 왕래를 통해 외부의 소식을 접하고 집안의 문화적 배경에 젖어들고 있다. 부친 병세의 추이, 집안사람들의 죽음이나 결혼, 출생, 제사 등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역시 일기의 중심은 조부의 동선을 따라 흐른다. 조부는 풍산(豊山), 고죽(孤竹) 등의 서원(書院)에도 관여하고 있다. 3월 13일에는 『시경』을 읽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소학이래로 상당히 빠른 나아감이다. 4월로 접어들면서 날씨의 표현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문학적 표현들이 늘어남을 볼 수 있다. 또한 조부는 옥연(玉淵) 서원(정사)으로의 행차도 수시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부의 행동반경은 서원을 중심으로 크게 확장되고 있다. 주인공은 「이소(離騷)」를 읽는다. 조부의 편지글을 읽어 내는 것으로 보아 그의 학문적 성취는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 5월에 서당에 나가 처음으로 시문(時文)을 짓는 주인공은 마을에 유행하는 천연두를 걱정한다. 마침내 동생 용수(龍壽)가 걸려 반점이 나고, 고름이 터지는 등, 전문적인 용어를 동원하여 그 소상한 추이를 지켜본다. 6월의 기록은 가장 짧고, 내용 역시 단조롭다. 다만 동생 용수(龍壽)가 천연두로부터 벗어남을 볼 수 있다. 5월 16일 발병하여 6월 7일에나 났게 되므로 일반적으로 천연두는 20여일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7월 부친의 병세는 계속 악화되어 가고 그에 따라 약방문의 기록이 많아지고, 조부는 순제(巡題)를 고평하려 다니느라 분주하다. 주인공 역시 조부에게 평가를 받고 있다. 특이하게 호랑이의 출현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8월 들어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작자는 조상들의 문집을 접하기 시작한다. 천연두가 확산되고 있고 조부는 8월 27일 마곡서원(磨谷書院)의 도유사(都有司: 원장)이 된다. 9월 들어 조부의 교육적 활동이 크게 부각되어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조부가 화천(花川) 서원의 원임(院任)으로 있을 때 여말선초를 살아간 김제(金濟) 선생의 호를 "백암(白巖)"이라 지었다고 하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조부의 명성은 쌍절묘(雙節廟)의 도유사(都有司)에 추천될 정도로 커져 있다. 10월 부친의 병세는 좀 뜸하다가 각혈을 시작하며 악화되었고, 의원들의 진찰이 이어진다. 11월 작자는 부친의 병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서경』을 읽고 있다. 12월이 되자 조부는 송사(訟事)까지 해결하는 지도력을 보이고 있고 여러 대부(大父)들의 회갑연들이 기록되어 있고 부친을 위한 약방문이 이어지며, 15일 처음으로 작자의 혼삿말이 오간다. 조부의 왕성하고 지도적인 활동은 연말까지 계속되었다. 그에 대한 사례로 받은 다양한 물품들 기록되어 있다.
1799년은 한 밤중에 내린 눈을 풍년의 조심으로 여기며 15세를 시작하지만, 이후 펼쳐지는 죽음의 그림자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돌림병이 전국을 휩쓸어 많은 희생자를 내는 가운데 1월에는 유난히 집안 초상이 많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부친의 고통은 격심해 진다. 부친의 병세가 호전될 기미기 보이지 않자 궁여지책으로 점술사에 의지하는 장면도 포착된다. 돌림병의 근원에 대한 낭설이 떠돌며 그 중심에는 호인(胡人, 아랍인)들이 등장한다. 당시 호인(胡人)들에 대한 인식을 가늠할 수 있다. 2월 들어 영남 남인의 중추였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죽음이 보름 뒤에 알려지면서 남인의 불행을 예고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죽음도 전해진다. 돌림병의 희생자가 많아지자 이를 둘러싼 유언비어들이 떠돌고 있다. 게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괴질이 발생하였고 그에 대한 처방으로, 농사의 주축이었던 소가 상당수 도살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주인공의 지역에도 돌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400여명에 달하자 호인(胡人)이 그 병을 퍼뜨렸다는 낭설이 기록되어 있고, 시신을 찾으려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보인다. 3월에 들어서자마자 부친의 병은 더욱 위중해지며, 문진과 문병이 이어진다. 이러한 불행 속에서도 4월 조부는 좌수(座首)의 물망에 오른다. 아픈 자식과 근력이 쇠약해 졌다는 이유로 고사하지만 두에 전개되는 내용은 그 자리를 수락한 것으로 나타난다. 유행병을 피해 계부(季父)인 류영조(柳英祚, 1763-1822)의 집에 머물다 돌아오신 부친의 병세에 특이할 만한 증세가 없었는지 5월의 기록은 평화롭고 내용 또한 단조롭게 날씨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루며, 각종 집안 대소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평화는 6월 상순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15일에는 부친의 병으로 굿을 하는 기록이 보이며 작자는 18일부터 돌림병에 걸려 8월 10일까지 일기를 쓰지 못한다. 어떤 병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10일부터 기록된 일기는 부친의 병세가 위중해 진 것으로 시작한다. 병간호에 열중한 탓인지 일기는 21일부터 다시 시작된다. 부친은 합병증을 일으켰고 그에 따른 문진이 이어지며, 심지어 점쟁이의 말에 따라 서재에 기거하는 모습도 읽을 수 있다. 9월은 기록은 날씨에 대한 언급과, 문병, 약 처방, 치료로 점철되어 있다. 이어지는 10월은 10일까지의 기록뿐이다. 5일 부친이 최후의 가쁜 숨을 몰아쉬는 장면이 처절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삶의 마지막에 "아버지"를 부르는 자식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의 비통한 모습, 수년 동안 병구완을 해온 어머니의 상실감에 대한 작자의 배려가 눈에 띈다. 부친상을 계기로 작자는 "의목(懿睦)"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관례도 치르기 전에 성인으로서의 책무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1800년(16세)의 시작은 부친상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도, 모친도, 조부도 모두 아프다. 문안의 발길이 이어진다. 2월이 되면서 조부가 공사(公事)에 참여하는 기록이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일상적 생활리듬을 되찾는 것으로 보인다. 동생인 용수(龍壽)가 학업을 시작하고 양반과 서출 사이의 계급 갈등이 야기한 에피소드, 평범한 일상의 생활이 기록되어 있고 여전히 일기의 중심은 조부의 동선과 활동이다. 3월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아지는 것으로 보아 작자도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고 있다. 작자는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연보를 읽고 있으며, 조부의 엄한 가르침을 기억해 두고 있다. 주인공은 이해력은 뛰어 났으나 암기력이 부족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학문적 토론이 많아진다. 사마천(司馬遷)의 「답임안서(答任安書)」, 유향(劉向)의 「논산릉서(論山陵書)」를 읽고 대부들과 논의하고 있으며, 집안에서 작자에게 거는 기대가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는 가문을 유지하는 방편으로서의 벼슬길로 내몰리고 있다. 3월의 마지막은 소식(蘇軾)의 「만언소(萬言疏)」를 읽고 있으며, 엄격한 상례(喪禮)를 교육받고 있다. 4월은 『점필재문집(佔畢齋文集)』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돌림병의 여파로 모친과 두 동생 그리고 자신마저 병듦에 따라 20일 정도의 기록공백이 있으며 25일부터 시작된 기록 속에도 작자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어지는 윤 4월의 기록은 일상적인 기록이 이어진다. 신임좌수가 자질 문제로 파직되는 과정에서 영남 선비들의 영향력을 크게 작용하고 있다. 4-5월 들어 글을 지어 평가 받는 일이 많아지는데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작자는 과거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월의 기억은 평범하고 단순하다. 다만 6일 조목에 투장(偸葬)을 둘러싼 송사(訟事)에 대한 기록이 특이하다. 평안하게 맞이한 7월은 정조대왕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기고 전국이 국상의 예를 갖추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정조의 최후를 둘러 싼 이야기들과 이어지는 순조의 등극과 그 경위가 소상하게 정리되어 있다. 주인공은 『대학』을 읽고 『논어』를 다시 읽으며 7월을 마감한다. 8월에는 임안(任案)을 놓고 남인과 서인의 갈등이 기록되어 있고 어린 나이에 등극한 순조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일화가 수록되어 있으며 인동(仁同) 고을 장시경(張時慶) 무리의 난동으로 인한 옥사가 기록되어 있다. 9월 "장적(張賊)"사건에 대한 과잉처벌이 기록되었고 류씨 집안은 객관적 자세를 취하며 역모로 보지 않고 있다. 작자는 여전히 『논어』를 읽고 있다. 다시 남인과 서인의 갈등이 김광제(金光濟)의 시의 내용을 지목하여 서인 이종윤(李宗胤)이 흉시(兇詩)로 고변하면서 야기된다. 10월은 국상으로 부친의 제례가 잘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 깃들어 있고, 조부는 고변 사건에 대해 유보적 자세를 취해 관의 압박을 받는다. 작자는 『대학』과 『중용』을 송독하고 있으며 고변으로 인한 결과가 이어져 기록되어 있다. 11월 들어 주인공은 『중용』을 송독하며 『맹자』를 읽고 있다. 김광제 흉시사건의 결말과 산소를 둘러싸고 집안끼리의 난처한 대립 상황이 기술되어 있다. 16세의 마지막 달 작자는 『맹자』를 계속 읽고 있으며, 집안 아이들의 수학 태도에 대한 어른들의 평가가 기록되어 주목을 끈다. 연말 『맹자』를 처음부터 다시 읽으며 새해를 맞이한다.
1801년(17세)은 정조대왕의 인산(因山)으로 시작되고 주인공은 『맹자』 읽기를 끝마치고 『논어』를 읽는다. 흉시로 유배를 가는 김광제를 그 집안사람 김성극(金成克)이 후한 대접을 해 곤장을 맞는 일, 조부의 교학과정에서 생겨나는 어리석은 답안과 유머, 이진동(李鎭東, 1732-1815) 좌수의 구설수에 공정한 조부의 판단, 백모(伯母)의 죽음과 초상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2월에 작자는 여전히 『논어』를 읽고 있고 집안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특히 종에 관한 언급이 많아진다. 15일의 기록은 일기 중에서 가장 긴 조목으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의미를 깊이 사고하고 있으며 영남 남인의 위상이 좁아지고 있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부여(扶餘) 지역의 독감으로 많은 사상자가 났으며, 한양의 장용위(壯勇衛)가 철거되었다는 소식과, 정조대왕의 인산(因山)에 사용된 소를 방면하고 다른 소를 잡아 호군(犒軍)했다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주인공은 문득 『서경』을 읽다가 다시 『논어』 읽기를 계속한다. 그리고 「선진(先進)」에서 "점(點)아 너는 어떠하냐?"라는 대목에서 받은 감흥이 나타나고 있다. 사노(寺奴)의 문서를 불태우고 풀어준 조정의 시책을 현장의 목소리로 전하고 있다. 3월이 되면서 서학(西學: 기독교)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는데, 이러한 세력의 흥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와 그에 따른 왜곡되고 배타적인 인식도 잘 묘사되어 있다. 『중용』으로 바꾸어 읽고 『대학』을 읽은 다음, 「이소(離騷)」를 읽는다. 그리고 육신(六臣)의 전기(傳記)를 읽는 것으로 보아 저자가 서서히 벼슬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어서 두보(杜甫)의 「북정(北征)」시를 읽고 있는 가운데 채제공의 삭탈관직 소식이 전해지고, 영남 선비들의 큰 위축으로 작용함이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4월에 들어서면서 성리학에 심취에 있는 작자의 모습이 간접적으로 투영되는 조목이 많고 작문(作文)하는 일이 많아진다. 공교롭게도 성리학 서적에 심취하여 주위의 우려를 사는 가운데, 과거의 폐단이 두드러지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결국 주위에서 과거공부에 전념하라는 타이름으로 이어진다. 그 외 기록은 5월과 함께 일상적이며 역시 조부의 동선들이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문중의 서출 류해(柳海)가 서인이 된 일을 매우 우려스럽게 바라본다. 6월 정조대왕의 곡반이 행해지는 가운데 진주(晉州)에서 징병소식이 들리며 불안한 표정들이 읽힌다[신유박해]. 서학(西學) 무리의 활동이 많아지는 것에 대한 불길한 눈초리 속에 7월은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이 사사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작자는 앞서 보다 만 『서경』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8월의 기록은 집안 대소사와 일상적인 독서로 구성되어 있다. 9월에도 『서경』을 꾸준히 읽고 있으며 잠시 게으름을 피울 때에는 조부에게 호되게 훈육을 받는 기록도 눈에 띈다. 과거에 합격한 집안사람들의 소식이 전해는 일기 속에 작자는 『졸재집(拙齋集)』을 보기도 한다. 10월은 부친이 죽은 1주년이 되는 달이라 여느 때 보다는 슬픈 분위기 속에 기록되었다. 『서경』 읽기를 마치고 『시경』을 읽기 시작하며 이전과는 달리 독서에 따른 심도 있는 논의들이 종종 기록되어 있다. 특히 22일 일기에는 저자가 천연두에 걸려 얼굴이 얽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피부색이 밝아서 큰 흠이 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1월은 조부의 활동에 따라 일상적인 기록이 보이며 채제공이 어떻게 결정 날 것인가에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이렇게 17세의 마지막 달은 동생 수길(壽吉)의 학업성과를 기록하며 시작한다. 첩을 얻는 것은 집안을 어지럽히는 단초라고 생각하는 조부의 생각이 언급되어 있고, 택호가 바뀐 것을 모르고 전해진 부음에 통곡하는 재미있는 일화도 소개되고 있으며, 서출들이 족보에 "서(庶)"자를 지워줄 것을 요청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호서(湖西)의 적들과 문중 사람들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으로 집안은 긴장하고 있으며, 조정에서 서학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다는 사실, 류해가 조부를 역적이라 능욕한 일과 그 후폭풍에 대한 우려가 기록되어 있다. 25일 담사(禫祀)를 지내고 옷을 갈아있었으며 저자는 조부에게 「성학십도」를 받는다.
1802년(18세)은 관례와 혼례를 올리는 해인 지라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1월은 습자(習字)를 게을리 한 것에 대한 지적과 『시경』을 토론하며 시작된다. 이진동(李鎭東) 원장과 조부 사이에 오가는 문학적 농담들, 이원장과의 만남, 논 세마지기를 판 일 해저(海底)의 김 감사(金監司) 종가와 혼담이 오가는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도연서원(道淵書院)과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채제공이 탈향(奪享)되고 비석을 부숴버린 일이 심각하게 표현되어 있다. 작자는 『서경』읽기를 계속하고 있으며 혼례의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된다. 충고하는 말을 잘 받아들일 줄 알라는 조부의 훈육도 눈에 띄고, 결국 29일 "이호(彝好)"라는 자를 받게 된다. 2월은 또래인 금곡 조(金谷祖)와 투합하여 서로 문의(文意)을 논하고 젊음을 함께 한다. 2월 들어 작자는 『시경』 계속 읽고 있고, 그의 어릴 적 이름이 "팽아(彭兒)"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집안에 내려오는 『역대보감(歴代寶鑑)』을 교감하고 보충하여 『야감(野鑑)』이라는 책을 찬술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행위에는 급격히 감소하는 영남유생들의 과거응시율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고문진보 후집』을 읽으며 2월을 마감한다. 3월에는 채제공을 신구(伸救)하는 움직임이 이는 가운데 저자는 『학사집(鶴沙集)』을 보며 『야감(野鑑)』 편집에 골몰하고 있다. 이러한 주인공의 활동에 대한 주위의 우려가 기록되어 있다. 11일 주인공은 관례를 치르고 주위에 인사를 닦는다. 15일에 초행(醮行)길에 오르며 처가인 해저(海底)로 가는 길이 평화롭게 묘사되어 있으며 처갓집 인물들과의 만남이 흥분 속에 펼쳐져 있다. 종동서(從同婿) 김휘덕(金輝德)을 만난 일, 처남 계팔(繼八)과의 교유, 들린 객점 주인들에 대한 기록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겸암정사를 개축한 일과 부(賦) 작품을 지어 주위 어른들의 칭찬을 받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이렇게 글을 짓고 평가받는 일이 잦아진다. 이어지는 4월은 제문(祭文), 부(賦) 등과 같은 글짓기 작업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일상적인 기록이 이어지고 있고 중순에 들면 처갓집 김희락(金熙洛) 현감공의 자부가 호랑이에 물려간 사실, 어사또의 출현에도 알아보지 못한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고, 작자는 작문을 하여 계속되는 높은 점수에 주위의 기대를 안게 된다. 25일 재행(再行) 길에 오르고 처가 마을은 호랑이 변고로 어수선한 모습이 나타나고 고향에서 볼 수 없었던 『학봉집(鶴峯集)』과 『금옹집(錦翁集)』을 접하고 처가 집안사람들을 방문하고 인사한 기록들이 이어진다. 전체 일기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5월의 기록은 대사간 척조(戚祖) 김한동(金翰東, 1740-1811)을 만나 뵙고 그의 칭찬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혼사는 작자에게 제한된 학문의 경계를 넓히는 계기가 되는데, 제산집(霽山集), 구사당집(九思堂集), 청강집(淸江集), 시화소총(詩話笑叢)등과 같은 책을 접했다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김희락 공의 자부를 가짜로 염(殮)하여 장사를 치른 일과 처가 집안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가운데 주위에서 듣게 되는 칭찬에 대해 집안 어른들의 경계하는 말, 새로운 만남과 생활 정보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처가에서도 작문하여 평가받는 일은 계속된다. 그러나 주부(主簿) 장(丈)에게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17일 주부(主簿) 어른과의 대화에서 작자가 1789년 천연두에 걸려 얼굴이 얽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일 재행(再行)에서 돌아와 글을 짓고 토론하는 본가에서의 생활이 이어진다. 그러한 평가 속에서 작자가 장원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평범한 일상으로 시작되는 6월에는 집안 어른들과의 단란한 나들이가 묘사되어 있다. 황당하게도 김희락의 며느리가 호랑이에 물려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음탕한 여인이었다는 반전도 기록되어 있다. 7월은 입암(立岩)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의 제사에 참석하여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 버금가는 정취를 만끽하며 「적벽가(赤壁歌)」를 지은 것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음녀로 밝혀진 집안과의 혼사가 틀어지는 이야기도 보인다. 글을 짓고 고평 받는 일의 연속을 보내는 8월에는 순제(巡題)에 답하는 일이 많아지고, 조부가 칭찬한 이수오(李秀五)와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된 일, 계부(季父)가 기가 허해져 헛것을 본 일, 초전 외가를 찾아 인사를 닦고 그 길에 신행(新行) 날짜를 점쟁이에게 묻는 일, 외가에서 바로 해저로 신행길에 오른 일들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어지는 처가 사람들과의 만남과 학업의 진취 정도를 묻는 대화들이 기록되어 있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으면서 시작하는 9월은 화천서원(花川書院)의 향사(享祀)에 참여하여 도정 대부(都正大父)가 지은 상량문을 쓴 일이 중심에 있으며 『논어』를 다시 읽으며 시문을 짓는 일상이 이어진다. 29일에는 연부례(延婦禮)가 행해졌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10월 들어 작자는 『예기(禮記)』를 읽기 시작한다. 일상적인 기록이 주를 이루면 날씨만 간단하게 기록한 날이 많다. 그만큼 평화로웠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11월은 모친의 초전(草田) 나들이가 결정됨에 따라 모친을 모시고 초전 외가로 향하는 여정이 기록되어 있고, 초전에서 빙계서원(氷溪書院) 운영의 중심에 있는 서인 신각(申珏)과의 만남을 통해 남인과 서인의 갈등이 상당히 희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돌아오는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가 생동감 있게 들어 있고, 돌아온 작자는 『예기』를 계속 일고 있으며, 편지의 왕래가 이어진다. 돌아오시는 모친을 일직에서 만나 모시고 돌아오는 일 또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30일에는 수찬 숙(修撰叔) 류이좌(柳台佐, 1763-1837)를 통해 『상서』를 통해 글쓰기의 결함을 바로잡으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18세의 마지막 달은 간략한 날씨 기록이 이어지다가, 중순경에 조부는 사장(社長) 물망에 오르고 홍역이 돌고 있다. 면 훈장(面訓長) 진사 대부(進士大父)가 풍암(豊岩)에 있는 동안 술주정을 부린 것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대미를 장식하고 있고, 주인공은 『좌전(左傳)』을 읽고 있으며, 류이좌는 홍문관 부교리가 되어 상경했다는 기록으로 일기는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