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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일기
내용분류: 개인-생활-일기
작성주체 이상정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739
형태사항 크기: 17~18 X 32~34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총12책 678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소호 한산이씨 대산종가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대산일기(大山日記)
『대산일기』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기록한 것으로, 현재 12책의 필사본이 남아있다. 이 일기는 책력(冊曆) 위에 쓴 역상일기(曆上日記) 유형으로, 해당 날짜 아래에 그 날 있었던 주요 사건을 간략하게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책의 표지에는 그 해 간지나 간지 뒤에 ‘曆’을 붙인 표제가 쓰여져 있을 뿐 별도의 서명은 없는데, 여기에서 『대산일기』라 명명한 것은 이상정의 호를 고려하여 편의상 붙인 것임을 밝혀둔다. 책의 형태를 보면, 책장의 판심 부분이 모두 갈라져 있고 그 해당 여백에 이상정이 지은 글들이 빼곡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기를 쓴 책력의 상단에는 이상정의 시 · 기문 · 만사 등의 잡저(雜著)가 기록되어 있다. 남아있는 12책은 약 18년간의 일기 분량이다. 25세가 되던 1739년(己未, 영조15)의 일기부터 시작해서 죽기 직전인 1781년(辛丑, 정조5) 12월 6일까지의 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상정은 줄곧 일기를 썼던 듯한데, 중간 시기의 것은 대부분 없어졌다.『대산일기』는 18세기 조선 성리학의 거유(巨儒)였던 이상정의 일상과 독서, 인물교유 등 대유학자의 면목을 살펴 볼 수 있는 동시에, 향촌 사림으로서의 일상을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최은주

상세정보

『대산일기』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기록한 것으로, 현재 12책의 필사본이 남아있다. 이 일기는 책력(冊曆) 위에 쓴 역상일기(曆上日記) 유형으로, 해당 날짜 아래에 그 날 있었던 주요 사건을 간략하게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일기를 쓴 책력의 상단에는 이상정의 시 · 기문 · 만사 등의 잡저(雜著)가 기록되어 있다. 남아있는 12책은 약 18년간의 일기 분량이다. 25세가 되던 1739년(己未, 영조15)의 일기부터 시작해서 죽기 직전인 1781년(辛丑, 정조5) 12월 6일까지의 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상정은 줄곧 일기를 썼던 듯한데, 중간 시기의 것은 대부분 없어졌다.
『대산일기』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기록한 일기이며, 현재 12책의 필사본이 남아있다. 이 일기는 책력(冊曆) 위에 쓴 역상일기(曆上日記) 유형으로, 해당 날짜 아래에 그 날 있었던 주요 사건을 간략하게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책의 표지에는 그 해 간지나 간지 뒤에 ‘曆’을 붙인 표제가 쓰여져 있을 뿐 별도의 서명은 없는데, 여기에서 『대산일기』라 명명한 것은 이상정의 호를 고려하여 편의상 붙인 것임을 밝혀둔다. 책의 형태를 보면, 책장의 판심 부분이 모두 갈라져 있고 그 해당 여백에 이상정이 지은 글들이 빼곡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기를 쓴 책력의 상단에는 이상정의 시 · 기문 · 만사 등의 잡저(雜著)가 기록되어 있다.
남아있는 12책은 약 18년간의 일기 분량이다. 25세가 되던 1739년(己未, 영조15)의 일기부터 시작해서 죽기 직전인 1781년(辛丑, 정조5) 12월 6일까지의 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상정은 줄곧 일기를 썼던 듯한데, 중간 시기의 것은 대부분 없어졌다. 12책의 각각 상세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1책은 1739년(영조15) 1월부터 12월까지의 기록으로, 표지에는 ‘호상잡록(湖上雜錄)’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 해의 일기에는 관직을 사직하고자 계속해서 상소를 올린 일들과 체직을 기대하며 인수인계를 위해 중기(重記)를 작성한 사실들이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2책은 1759년(영조35) 1월부터 12월까지의 기록과 1751년(영조27) 1월부터 12월까지의 기록이 합철된 것으로, 2년간의 일기가 실려 있다. 표지에는 1759년의 간지에 해당하는 ‘기묘력(己卯曆)’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는 제자들과의 만남, 주변 친인적 또는 지인들의 경조사 참석과 그에 대한 심회, 집안 대소사, 독서와 그 서목, 『심경』 강론 등 비교적 일상적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제3책은 1755년(영조31) 1월부터 12월까지의 기록으로, 표지에는 ‘을해력(乙亥曆)’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 때 당시 이상정은 연일현감(延日縣監)을 지내고 있었다. 일기에는 가뭄으로 인한 농사 걱정과 백성들에 대한 근심, 기우제를 지내는 일 등 고을 수령으로서의 직무와 그에 대한 의무감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또 아들의 결혼, 조상 제사의 참사, 친인척의 병고와 죽음 등 사적인 일도 더불어 기록되어 있다. 또한, 6월 고향에 내려왔다가 11월 어사의 서계에 의해 체포 명을 받고 한양으로 가서 국문을 받고는 고신(告身)을 박탈당하고 품등이 깎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제4책은 1761년(영조37) 1월부터 12월까지의 기록인데, 이상정의 현손인 긍암(肯庵) 이돈우(李敦禹, 1807∼1884)의 1849년 정월에서 윤4월까지의 일기가 합철되어 있다. 표지에는 1761년의 간지에 해당하는 ‘신사력(辛巳曆)’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 해의 일기에는 묘제·기제사 등 집안의 대소사와 도내 백일장 참관, 인근 명승지 유람, 제자들과의 만남, 『심경』강론 등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제5책은 1766년(영조42) 1월부터 12월까지의 기록으로, 표지에는 ‘병술(丙戌)’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 해에는 친인척 및 주변 지인의 병고와 상장례를 포함한 집안 대소사 외에 제자들과의 강회와 문집 교감 등의 기록이 주를 이룬다.『홍범연의(洪範衍義)』를 교정하고, 『간재집(艮齋集)』과 『백암집(柏巖集)』을 교감하였으며, 『심경』 · 『대학혹문(大學或問)』 ·『대학』등을 강론하였다.
제6책은 1768년(영조44) 1월부터 12월까지의 기록으로, 표지에는 ‘무자력(戊子曆)’ 글자가 뭉개져 있다. 향촌 생활 중심으로 집안의 대소사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그 중에서도 상장례 관련과 가뭄관련의 날씨 이야기가 많다. 또한, 지인들의 방문과 제자들이 며칠 머물면서『대학의의(大學疑義)』 · 『대학혹문(大學或問)』 · 『맹자(孟子)』 · 『태극도(太極圖)』 등을 강론한 기록도 보인다.
제7책은 1770년(영조46) 1월부터 1771년(영조47) 12월까지와 1773년(영조49) 1월부터 1774년(영조50) 12월까지의 기록으로, 4년간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표지에는 ‘경인(庚寅)’ · ‘병신(丙申)’ · ‘갑오(甲午)’ · ‘계사(癸巳)’가 차례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 중 ‘병신(丙申)’은 1771년 ‘신묘(辛卯)’의 오기로 파악된다. 저자가 만난 사람, 읽은 책, 책의 교감, 중요한 일 등을 간략히 기록하고 여백에 시나 만사 등을 기록하였다. 이 기간에 이상정은 조광조의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 초고를 수정하고, 『검간문집(黔澗文集)』 · 『식암집(息菴集)』 · 『만취일고(晩翠逸稿)』 · 『수암집(修岩集)』 · 『야촌집(野村集)』 · 『물암집(勿庵集)』 · 『대해집(大海集)』 · 『해월집(海月集)』 등 많은 문집들을 교감하였다. 또한 고산정(高山亭)의 공사, 며느리의 해산, 손자의 열병 등 일상생활이 함께 쓰여져 있고, 1771년 2월 11일 왕손이 능주(綾州)로 유배를 가고, 이어서 탐라에 위리안치 되었다(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언군과 은신군이 유배당한 일)는 정치적 사실의 기록도 보인다.
제8책은 1772년(영조47) 1월부터 12월까지의 기록으로, 표지에는 ‘임진력(壬辰曆)’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 해에도 역시 집안 대소사, 제자들과의 학문 토론, 문집 교감, 문집 서문 작성 등 향촌 생활의 일상이 주를 이룬다. ‘을미력(乙未曆)’이라 표기되어 있고, 1775년(영조51) 1월부터 12월까지의 일기가 수록된 제9책 역시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제10책은 1777년(정조1) 1월부터 12월까지의 기록으로, 표지에는 ‘정유력(丁酉曆)’이라 표기되어 있다. 접빈객, 지인과의 교유, 제자들과의 강론, 문집 교감 등 그가 보낸 일상적 향촌 생활의 내용 외에 영조 승하 및 정언(正言)에 제수된 기록, 그리고 『心經講錄刊補』의 간행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더불어 이상정은 자신의 병과 통증에 대한 고민도 토로하고 있다. 제11책은 1778년(정조2) 1월부터 12월까지의 기록으로, 표지에는 ‘무술력(戊戌曆)’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 해에는 특히 정언(正言)을 사직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리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마지막 제 12책은 그의 나이 72세인 1781년(정조5)년 1월부터 12월 6일까지 죽음을 불과 3일 앞둔 시점까지 기록한 것이다. 이 당시 이상정은 병세가 악화되어 복부에 열이 많고 통증이 심하여 혈변(血便)을 보고 있었으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사용한 약제들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더불어 병문안을 온 사람들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산일기』는 18세기 조선 성리학의 거유(巨儒)였던 이상정의 일상과 독서, 인물교유 등 대유학자의 면목을 살펴 볼 수 있는 동시에, 향촌 사림으로서의 일상을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癡齋文集』, 許命申,
최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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