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재일록』은 癡齋 許命申(1569~1637)이 32세가 되던 1600년부터 시작하여 거의 죽기 직전까지 썼던 일기이다. 후손 중 누군가가 훼손 멸실의 위험에 대비해 허명신의 친필일기를 보관해 오다가, 새롭게 필사 정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때문에 날짜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기도 하고, 1632년 壬申年 이후부터는 아예 날짜 구분 자체가 없이 주요 사적만 정리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저자 허명신은 고령에 거주했던 선비로, 寒岡 鄭逑(1543~1620)와 松菴 金沔(1541~1593)을 사사하였다. 일기에서도 보이듯 鄕試에몇 차례 합격하여 訓導에 임명되었으나 이내 사직하였고, 만년에는 낙동강가 금산위에 서실을 창건하여 매일같이 원근 마을에서 모여드는 수재들과 더불어 학문에 힘쓰며 교유하였다고 한다. 일기 내용은 대개 그의 일상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외에 고을 및 나라의 주요 사건이 있을 때 그에 대한 소식을 간략하게 기록하는 정도이다. 과거시험의 응시, 한시수수, 독서와 학문, 접빈객, 고을의 동향에 대한 내용이 많다.
『癡齋日錄』은 癡齋 許命申(1569~1637)이 기록한 일기로, 32세가 되던 1600년부터 시작하여 거의 죽기 직전까지 썼던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빠진 날짜가 많고 날짜별 기사도 간략하여 일기 분량은 필사본 1책 정도에 불과하다. 기록시기를 살펴보면 허명신이 32세가 되던 1600년(선조33) 1월 1일부터 63세가 되던 1631년(인조9)년 12월 23일까지는 날짜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데 비해, 壬申年 1632년 이후부터는 날짜 없이 주요 사건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1631년까지의 일기가 끝난 그 뒤의 일기 본문에 “壬申以後 遂張割半 混作休紙 年月倒錯 句語互換 有不可整齊其要領 故只錄事蹟如左[임신년(1632)이후의 기록은 장마다 절반이 날아가서 전체가 休紙가 되었는데, 연월이 뒤바뀌고 句語가 서로 바뀌어 그 要領을 정리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지 사적만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라고 적혀 있는데, 이에 의거해 보면 아마도 후손 중 누군가가 허명신의 친필일기를 보관해 오다가, 훼손 멸실의 위험에 대비하여 새롭게 필사 정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치재일록』중간에 나타나는 기록시기의 착간도 이러한 과정 때문에 생긴 것이다.
책 제일 앞장에는 ‘年條目錄’이라는 제목 아래 일기 기록 연도가 나열되어 있는데, 天啓 4年(1624)까지만 표기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師友錄’이라는 제목으로 124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우록’을 통해 그의 교유관계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기가 시작된다. 기록방식은 한 해가 시작할 때 해당 연호 및 간지를 먼저 표시하고, 다시 줄을 바꿔 달을 시작하는데 달이 바뀔 때마다 줄도 달리하였으며, 날짜 사이 또는 사건의 구분이 필요할 때는 흰 동그라미를 사용하였다. 壬申年 이후의 일기에서 주요 사적들을 구분 기록할 때도 이 흰 동그라미를 사용하였다. 일기가 끝난 다음에는 ‘聞訃錄’, ‘丁巳秋初喪時賻儀’, ‘戊午二月初七日喪禮時賻儀’ 등이 차례로 기록되어 있다. ‘문부록’은 그가 부고를 들은 것을 연도별로 기록해 둔 것이고, 뒤의 부의 목록은 그가 상을 당했을 때 주변인들의 부의를 차례대로 정리 기록한 것이다.
일기의 저자 허명신은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그의 문집에 수록된 서문과 행장을 통해 그의 이력을 어느 정도 파악해 볼 수는 있다. 허명신은 고령에 거주했던 선비로, 寒岡 鄭逑(1543~1620)와 松菴 金沔(1541~1593)을 사사하였다. 일기에서도 보이듯 鄕試에몇 차례 합격하여 訓導에 임명되었으나 이내 사직하였고, 만년에는 낙동강가 금산위에 서실을 창건하여 매일같이 원근 마을에서 모여드는 수재들과 더불어 학문에 힘쓰며 교유하였다고 한다. 특히, 眉叟 許穆(1595~1682)이 부친의 任所에 따라 왔다가 그의 문하에 드나들며 수학한 사실이 있는데, 이것은 ‘사우록’의 명단 제일 앞에 허목의 이름이 기록된 것에서도 명확하게 확인이 된다.
일기 내용은 대개 그의 일상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외에 고을 및 나라의 주요 사건이 있을 때 그에 대한 소식을 간략하게 기록하는 정도이다. 과거시험의 응시, 한시수수, 독서와 학문, 접빈객, 고을의 동향에 대한 내용이 많다. 이 일기는 내용이 비교적 소략하고 記事의 단절이 많다는 한계가 있지만, 17세기 초 북인 계열의 향촌 선비가 당시 복잡한 정치적 외부 자극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또 자신의 생활을 어떻게 영위하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를 우선적으로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남인 계열의 선비 일기와 비교해 볼 때 당시 향촌 지방의 사회상을 뚜렷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상대적 자료로서도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겠다.
『癡齋文集』, 許命申,
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