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9년 1월 23일, 柳正源이 査頓이 보내온 答狀에 다시 답장으로 보내는 편지이다.
1759년 1월 23일, 柳正源이 査頓이 보내온 答狀에 다시 답장으로 보내는 편지이다.
이 편지는 수신자의 답장에 대한 편지이기에 먼저 그 답장을 언급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발신자는 지난 섣달에 보내주신 답장을 받고 감사한 마음이 간절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편지를 살펴보니 수신자가 병이 들어 오래 낫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몹시 놀라고도 걱정됨이 적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증세는 떨쳐내기 어려운 데다, 수신자는 나이가 많아 기력이 쇠퇴해져가기에 필시 병과 겨루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어 더욱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요즈음에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근황을 물었다. 이어서 화재를 바꾸어 며칠 전에 집에서 온 소식으로부터 수신자가 서적의 일로 府中에 머무른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일로 해서 크게 피곤한데 이르지는 않고 쌓인 울적함을 조금 풀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몸을 조섭하는 대책이 이 때문에 조금도 느슨해져서는 안 된다며 여전히 수신자의 건강을 염려하였다. 이렇게 수신자의 안부를 물은 다음 발신자는 자신의 근황을 알렸다. 먼저 발신자는 객지에서 새해를 맞게 되니 온갖 감회가 겹겹이 쌓이고 깊어진다고 하였다. 거기에다 이번 달에 돌림병에 대한 주의의 보고가 다시 있었으나, 기세 상으로 오래 머무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발신자는 여러 번 계속해서 외직으로 물러난 것은 남쪽으로 돌아오려는 계책이었으나, 염려되는 것은 그 사이에 사특한 힘이 계획을 그르치게 하는 우환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발신자가 자신의 소식을 전한 뒤에 수신자가 보낸 편지에서 부탁한 일에 대해 언급했다. 그것은 약의 재료를 찾아보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있는 곳에는 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비록 천궁이나 당귀와 같은 천한 약재도 한 곳에 모이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중앙관청에서 약재를 사들이려고 했으나, 서울에 우환이 크게 번지게 되어 성균관 주변의 집들이 모두 초상집에 드나들어 약재를 사들이도록 부탁할 길이 없어 참으로 한스럽다고 하였다. 이렇게 수신자가 부탁한 일에 대해 언급한 후에 발신자는 나머지 쓸 것이 많지만 눈이 침침하여 이만 줄이니 굽어 살펴주기 바라며 삼가 편지를 올린다는 말로 편지의 끝을 맺었다.
그러나 발신자는 그 뒤에 동전 2냥과 脯 한 첩 등의 보내는 물품을 적고, 수신자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비롯해 못 다한 말들을 써넣었다. 먼저 學孫이라는 사람이 떨어져 다친 상처가 작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 사이에 나았는지 어떤지를 물었다. 그러면서 그 상처가 완전히 아문다고 해도 얼굴에 상처자국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는 참으로 가엽다는 말로 위로의 말을 전했다. 다음으로 이렇게 추신으로 글을 적는 것이 미안하여 붓을 잡고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말의 조리가 다듬어지지 않아 뒤엉켜버렸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발신자의 사촌동생이 홀아비로 여러 해 동안 지내면서 예절의 교육을 빠뜨려 시부모의 뜻을 받들어 모시지 못하여 내어보내는데 이를까 두렵다는 말을 했다. 그렇지만 예의는 빠뜨릴 수 없는 것인데 무두 제쳐둔다면 그 부끄러움이 마땅히 어떻겠느냐며 발신자는 수신자인 사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아이가 하는 말을 듣건대, 모든 예절을 관대하게 보아준다고 하니 아껴줌이 과분하여 감격스러운 마음이 아주 지극하다는 말로 추신의 말을 끝맺었다.
이 편지는 겉봉이 없어 정확히 수신자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편지의 말미에 발신자인 유정원이 자신을 "族弟"라고 한 것을 보면 수신자는 그의 사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면 당시에 사돈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양상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
『古文書集成 四十四』 -安東 全州柳氏篇 1(水谷宗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全州柳氏大同譜』,
『三山集』,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