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8년 7월 11일, 柳正源이 春川縣監으로 赴任하면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을 아들에게 전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1758년 7월 11일, 柳正源이 春川縣監으로 赴任하면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을 아들에게 전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이 편지는 아들에게 붙이는 것이어서 인사말이 생략되고 곧장 이것이 붙여지게 된 사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편지는 읍내에 사는 사내가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붙이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사내에게 들으니 아들인 수신자가 아직도 京邸에 머물고 있다고 하던데 때맞추어 소식을 전할 수 없었느냐며 은근한 말로 꾸짖었다. 이어서 최근에 집안의 근황에 대한 물음과 함께 克寯이라는 사람이 병으로 며칠씩 걸러 아프다고 하면 그것은 앞선 증세가 다시 발작하는 것이기에 극히 염려스러운데 지금은 나았는지 모르겠다며 물었다. 다음으로 발신자는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발신자는 도중에 비를 만나 물에 막히기는 했으나, 곤경에 처하는 데는 이르지 않고 8일 저녁에 泮村에 도착하였으며, 일행들도 병에 걸리는 것을 면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이어서 발신자는 자신이 謝恩肅拜를 해야 하는데 官服이 갖추어지지 않아 다음 날을 기다렸다가 하려고 李 參判에게 사람을 보내 관복을 빌리려고 하는데 빌려줄지 모르겠다며 걱정을 했다. 그러나 사은숙배를 하기 위해 발신자에게는 관복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먼저 緋依를 갖추어야 하는데 모시 가격이 뛰어올라 1疋에 7貫이며, 게다가 옷의 안팎으로 염색하고 바느질을 하여 옷을 만들려면 모두 25貫의 돈이 든다고 하였다. 그런데 거기에다 黑袍와 品階에 따른 띠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많은 빚을 내야 하니 참으로 고민스럽다고 했다. 이어서 발신자는 화재를 바꾸어 자신이 부임하게 되는 일과 관련된 것을 언급하였다. 먼저 발신자가 부임할 곳을 다스리던 옛 관리가 牌招에 나가지 않고 외직인 長鬐에 보임하였다고 했다. 게다가 그 관리는 사무의 인계문서를 수정하지도 않고 官印을 가지고 鄕所로 가서 하급의 衙前들이 모두 그를 따라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로 인해 고을 폐단이 적지 않아 발신자 자신이 부임하기 전에 관인이 오지 않으면 곧 바로 발행해야 하는데, 그것 역시 불편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것 같다고 하였다. 발신자는 다시 화재를 바꾸어 金 正言이 經歷으로 遞職된 것은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기쁜 나머지 좋아 날뛰며 馬夫를 기다리지 않고 마차에 올라타고서 말을 재촉하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만약 그가 그렇게 했다면 사고로 길에서 낭패를 당할 근심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留守가 마부를 보내지 말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소문에 이어 발신자는 다시 화재를 바꾸어 자신이 춘천현감으로 가게 된 사연의 소문을 말했다. 그에 따르면 춘천현감 자리에 결원이 생기자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툼으로 어지러웠다. 그런데 임금께 친히 정사를 보는 날에 발신자의 이름을 거론하며 춘천현감으로 어떤지를 물었다. 하지만 銓衡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는 자신이 추천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 발신자에 대해 반대의 의견을 말했지만, 右議政이 강력히 주장하며 추천하였다. 그러나 발신자는 임명을 받아 가는 것이 반드시 그렇게 되어서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부임 후에도 결코 오래 머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부임할 고을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그 소문으로 볼 때 백성들의 습속에 사건을 일으킬 염려가 많이 있어 아마도 처음부터 들어가지 않는 것만 못할 수도 있다고 걱정을 했다. 발신자는 다시 화재를 바꾸어 持平을 지낸 숙부의 上疏에 대해 언급했다. 숙부가 상소한 글은 이미 承政院에 당도하여 그 동안 조용히 보류되어 있다가 오늘쯤 당연히 보고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발신자의 생각으로는 그 상소문에 대해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가 기한이 지난 후에 불러 명할 것인데 마땅히 20일보다 더 뒤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서 大坪이라는 사람에게 가는 편지는 柬中이라는 사람이 대략 소식을 전했을 것이니, 편지를 열어서 본 후에 다시 봉하여 金乭輩로 하여금 즉시 전달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발신자 자신이 춘천현감으로 부임하러 가기 전에 임금께 드리는 하직 인사는 大臣과 重臣 등을 모두 만나기를 기다린 후에 그 시일이 정해질 것인데, 아마도 25일이나 26일 사이가 될 것이지만, 아직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이상으로 서울에서의 소식을 전하고 다시 고향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발신자는 집안의 모든 일들이 혼란스럽고 두서가 없어 참으로 염려스럽다고 했다. 자신이 멀리 있어 헤아려 처리할 수 없으니, 아들인 수신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 일이 거꾸로 되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편지는 禮安으로 가는 인편을 만나 갑자기 붙이게 되었는데, 나중에 인편을 구하면 다시 편지를 붙이기로 하고 나머지는 일일이 다 적지 않는다는 말로 이 편지의 끝을 맺었다.
이 편지에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다시 말해서 발신자가 편지의 말미에 자신을 "父"라고만 하고 있어 이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것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所藏處인 三山宗家에서 이 편지를 보관하고 있는 상태, 또는 편지에서 기술하고 있는 정황이나 그에 사용된 용어들을 볼 때 유정원이라고 판단을 내리는데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판단을 토대로 편지의 내용을 유정원의 생애와 결부시켜 보면, 이 편지는 그가 춘천현감으로 부인하기 직전에 그렇게 된 사실과 그로 인해 발생한 여러 가지 일들을 적어 아들에게 보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
『古文書集成 四十四』 -安東 全州柳氏篇 1(水谷宗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全州柳氏大同譜』,
『三山集』,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