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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경철(景澈)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F.1755.0000-20170630.y17100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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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경철, 유정원
작성시기 1755
형태사항 크기: 22.5 X 48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주진 전주류씨 삼산종가 / 경상북도 안동시 수곡면 문중소개
현소장처: 안동 주진 전주류씨 삼산종가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안내정보

1755년 ○경철(○景澈) 서간(書簡)
1755년 2월 15일, 경철이라는 사람이 유정원의 편지를 받고 자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전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먼저 발신자는 이별을 돌이켜 보면 지금도 처량하고 슬프다는 말로 수신자에 대한 마음을 전했다. 이어서 소식을 들을 만한 길이 없어 서글펐던 마음과 뜻밖의 편지로 수신자의 안부를 알게 된 반가운 마음을 표했다. 그리고 수신자가 부임해 가는 고을의 형편과 주변 상황들을 언급하며 안타까운 마음과 위로를 함께 전했다. 다음으로 수신자와 연관된 발신자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전했다. 거기에는 문수, 완도, 성희, 대원, 사경, 직, 이광문 등의 소식을 전했다. 그 다음에도 친구가 관직에 낙점되지 못한 것, 이 령공이 말미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 마을에 흉년이 들어 힘들다는 것 등 수신자와 관련된 것으로 짐작되는 사람들과 고을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추신에서도 수신자가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은 집안의 소식 등을 전했다. 이 편지의 겉봉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수신자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 편지가 그 소장처인 전주 유씨 삼산종가의 문서들 가운데 유정원의 편지 묶음 속에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편지에 등장하는 계온은 유정원의 「유금강산일기」에 등장하는 친구 조계온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수신자는 유정원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편지의 작성 년도인 을해년 역시 유정원이 통천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755년이 된다.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
『古文書集成 四十四』 -安東 全州柳氏篇 1(水谷宗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全州柳氏大同譜』,
『三山集』,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755년 2월 15일, 景澈이라는 사람이 柳正源의 편지를 받고 자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安否를 전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1755년 2월 15일, 景澈이라는 사람이 柳正源의 편지를 받고 자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安否를 전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이 편지는 먼저 발신자가 수신자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발신자는 수신자와의 이별을 돌이켜 보면 지금도 처량하고 슬프다고 했다. 게다가 소식을 들을 만한 길도 없어 밤낮으로 서글픈 마음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수신자가 보내준 편지를 받고 반가운 마음 외에 봄날 정무를 보고 일상생활을 하는데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치 딴 세상의 소식을 접하는 것처럼 마음이 기쁘고도 행복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수신자가 부임해 갈 당시에는 눈길을 헤쳐 가느라 온갖 고생을 다하고, 고을을 인수받은 후에는 그 형편이 가난하여 그 말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콧날이 시큰했는데 당사자야 오죽했겠느냐며 그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수신자가 부임한 곳이 그런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叢石亭이나 蓬萊山과 같이 구경해볼 만한 곳이 있고, 季溫과 같은 좋은 이웃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로 수신자를 위로하였다. 이어서 발신자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전했다. 발신자는 줄곧 무슨 일인가를 하려고 애를 쓰기는 하지만 항상 근심으로 얼굴이 찌푸려진다며 현재의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전했다. 그런 처지에 친구인 文守와 完都가 차례로 떠나가고 聖希와 大源마저도 드나드는 것이 때가 없고, 士競도 숙부의 초상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고, 直도 성균관 인근에서 李廣文과 공부만하고 있으니 자신은 고독감을 갑절이나 느낀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 중에 直이라는 사람은 騎省(육조 가운데 하나로 군사와 郵驛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행정 기관)의 후보 중 한 사람이 되었으나 임금의 낙점을 받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가 政目을 잘못 본 것이 아니겠느냐며 친구의 탈락에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그리고 마지막 주변 사람으로 李 令公도 말미를 받아가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제 발신자는 화재의 범위를 넓혀서 마을의 정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흉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고 달래주어야 하는데 마음이 많이 힘들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을 구제할 재물이 없다면 그런 위로와 달램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수신자의 이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다시 화재를 바꾸어 수신자의 마을에 돌림병이 크게 만연하고 있어 근심스럽고 염려스럽다고 했다. 이어서 李兄이란 사람이 공적인 일로 明倫堂에 들어갔다는 말과 함께 갑작스럽게 인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간략하게 답장을 쓰기에 나머지는 이만 줄이니 굽어 살펴주기 바라며 삼가 감사의 편지를 올린다는 말과 함께 편지의 끝을 맺었다. 그러나 발신자는 追伸으로 鏡城에 가는 편지는 당연히 京邸吏에게 전해주고, 친구인 申思邈 氏는 옛날 參判을 지낸 사람의 후손으로 歙谷에서 유배생활을 한다고 하기에 아무쪼록 趙兄에게 잘 대접하라고 한 등의 소식을 전했다. 발신자가 이렇게 한 것은 수신자가 사람을 시켜 그 집이 어떠한지를 문안하는 것 같아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養元에 임시로 거처하고 있는 生員 鄭光洙과 李宜濬 이 두 사람에게 舊官을 위문하도록 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덧붙였다. 이 편지의 겉봉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수신자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 편지의 所藏處와 그 내용을 볼 때 수신자는 유정원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편지는 全州 柳氏 三山宗家의 여러 문서 가운데 유정원의 편지 묶음 속에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편지에 등장하는 季溫은 유정원의 「遊金剛山日記」에 등장하는 친구 趙季溫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편지에서 "부임해 갈 당시에는 눈길을 헤쳐 가느라 온갖 고생을 다하고, 고을을 인수받은 후에는 그 형편이 가난하여 그 말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콧날이 시큰했다."는 말은 바로 유정원이 通川郡守로 부임한 것을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편지의 작성 년도인 乙亥年은 유정원이 통천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755년이 된다.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
『古文書集成 四十四』 -安東 全州柳氏篇 1(水谷宗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全州柳氏大同譜』,
『三山集』,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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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別思至今悽黯而得音又無 路祗日夕瞻悵而已意外此承 尊翰傾倒之餘就審山海春日 視篆起居萬相此心欣幸如接 隔世消息赴任時雪裡艱關 交龜後邑樣殘薄足令聞之者 齒酸況當之者乎然如叢石 蓬山早晩可以尋玩又得芳隣 如季溫者豈非爲幸弟一味勞 攘眉撰萬愁奈何兼又文守 完都次第散去聖希大源出 入無常士競又遭其叔父喪歸 家而直亦在泮村只與李廣文 同榻此中岑寂又一倍矣直 兄於都政首擬騎省而未蒙 點兄示如此無乃誤看政目耶李 令亦受由未歸耳儉歲撫摩必多費心思而又無其資則無麵不托儘如 兄示令人代悶而豈無餘力可以救濟西部奉事之力也好笑好笑令胤諸君 或有來侍者耶頃聞鄕信丹砂信孫女于歸之禮從近爲之云矣鄕邑癘疫 大曼云極慮極慮李兄方以公故入明倫堂故無答書矣餘猝聞有便草 草修謝不宣伏惟 下照謹謝上狀 乙亥二月十五日 弟景澈頓 鏡城去書 當傳給京主人耳 申友思邈氏故參判 令之孫也謫居歙谷云 幸須與趙兄使之善 待兄亦伻存如何 其家之意如此故及 之矣 養元寓居鄭生員光洙 李生員宜濬 此兩人以舊官請 存問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