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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년 유정원(柳正源)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XF.1752.0000-20170630.y17100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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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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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유정원
작성시기 1752
형태사항 크기: 27 X 39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주진 전주류씨 삼산종가 / 경상북도 안동시 수곡면 문중소개
현소장처: 안동 주진 전주류씨 삼산종가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안내정보

1752년 유정원(柳正源) 서간(書簡)
1752년 6월 6일, 유정원이 사면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뒤 그간의 사정을 팔촌형에게 전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발신자는 먼저 한 달 전에 하직인사를 하면서 그 모습을 뵙고 사모하는 마음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말로 수신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이어서 수신자와 그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다음으로는 발신자가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성안에 천연두가 유행하여 무섭고 두려웠던 마음 등을 전했다. 그리고 서울 소식으로는 나라의 경사로 치르게 될 과거시험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소식 뒤에 추신으로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보내는 부채, 편지지, 왜죽, 감초 등에 언급하고, 마지막에는 수신자에게서 빌린 당나귀가 먼 길을 여행한 나머지 빌릴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말을 돌려드리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이 편지에서 말미에 수신자인 유정원이 자신을 "삼종제"라고 한 것을 보면 수신자는 그의 팔촌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을 보면 유정원이 감옥에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이 편지가 쓰인 1752년에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11번이나 입궐하라는 임금의 부름에도 궁궐 문밖까지 와서는 끝내 입궐하지 않은 것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
『古文書集成 四十四』 -安東 全州柳氏篇 1(水谷宗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全州柳氏大同譜』,
『三山集』,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752년 6월 6일, 柳正源이 赦免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뒤 그간의 사정을 八寸兄에게 전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1752년 6월 6일, 柳正源이 赦免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뒤 그간의 사정을 八寸兄에게 전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이 편지는 팔촌형인 수신자에 대한 인사로부터 시작된다. 발신자는 한 달 전에 하직인사를 하면서 그 모습을 뵙고 사모하는 마음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말로 수신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이어서 불볕더위가 혹심한 요사이에 정양하면서 생활하는 가운데 항상 건강하고 행복을 누리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수신자의 안부를 물었다. 다음으로 식솔들 모두 두루 평안하게 지내느냐는 말로 그 가족들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수신자나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안부인사에 이어 발신자는 자신의 근황을 알렸다. 그에 따르면 그는 감옥에 들어간 지 6일 만에 사면을 받아 성안을 벗어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연두로 인해 성안은 발 디딜 수 있는 깨끗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고 했다. 그 상황을 처음 직면했을 때 무섭고 두려웠던 마음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다행이도 별일이 없었다며 그때의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그리고 발신자는 그러한 고초 외에도 더웠다가는 서늘하고 게다고 꿉꿉한 날씨를 참고 견뎌내면서 온종일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말과 같이 건장한 자신의 몸 덕분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걸어서 성 밖에 이른 발신자는 그곳에 며칠 동안 잠복해 있다가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나섰다고 하였다. 그로 인해 서울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지 못해 요즈음 소식을 자세히 들을 수 없어서 별도로 전해줄 만한 이야기가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이미 庭試로 과거시험을 시행하라는 임금의 윤허가 떨어졌다는 소식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시험에서 재주를 지닌 서울 사람들조차도 합격할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며 과거시험의 어려움을 전했다. 그러면서 과거를 치를 시험날짜는 아직 정해지지는 않았으나 늦가을쯤에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때가 되면 천연두의 기운도 수그러들거나 없어질 것이라며 아직도 서울에는 천연두가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어서 마지막 인사말로 나머지는 이만 줄이니 삼가 굽어 살펴주시기를 바라며 거듭 절을 드리며 편지를 올린다는 말로 편지의 끝을 맺었다. 그러나 발신자는 그 뒤에 追伸으로 수신자에게 보내는 물건에 대해 언급했다. 먼저 발신자가 부채와 편지지를 약간 얻은 것이 있었으나, 서울에 있으면서 닥치는 대로 나누어주어 부채 1자루와 편지지 2두루마리 밖에 드리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倭竹과 甘草를 함께 올린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어서 수신자에게서 빌린 당나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발신자는 빌린 당나귀였기에 마음을 써서 보살폈으나, 먼 길을 여행하다보니 당나귀가 피곤함을 면할 수 없어 빌릴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말을 돌려드리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이 편지에서 말미에 수신자인 유정원이 자신을 "三從弟"라고 했다. 이것을 보면 수신자는 그의 팔촌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을 보면 유정원이 감옥에 들어갔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行狀을 보아도 그러한 사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이 편지가 쓰인 1752년에 鄭羽良의 천거로 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지평으로 임명되던 날 다른 동료 몇 사람이 변방으로 밀려나자 혼자만 좋은 직책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에 英祖가 유정원에게 입궐하라는 명령을 밤새 11번이나 내렸으나, 그는 궁궐 문밖까지 와서는 끝내 입궐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 편지에서 감옥에 들어갔다가 사면을 받은 것은 이 일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게 보면 이 편지는 동료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고초를 겪으면서도 의연히 이겨나가는 유정원의 인품을 엿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
『古文書集成 四十四』 -安東 全州柳氏篇 1(水谷宗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全州柳氏大同譜』,
『三山集』,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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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違倏已經月慕庸之忱靡有 少弛炎熱比酷伏未審 靜中體候連享康福 眷下諸致亦均平善否從姪入圓 扉六日蒙 宥脫出城中痘火無一片淨地可以着 足當初危怖有不可言而卒得無事 餘外冒炎妻濕之苦不必提擧也 歸時窮日趲程而獲免顚仆專賴 於用拯之壯尤可幸也到城外潛伏 數日出獄門直尋鄕路不得與親 舊相接時耗無有細聞大抵別 無可傳耳陳賀卄六已行慶科以庭試 判下京人抱才者亦頗缺望云矣試日姑未定 似在秋抄云其時痘氣惑(底)向殘耶 餘萬不備伏惟 下察謹再拜候上狀 壬申六月六日 三從弟 正源拜手   節扇簡幅略有所得而在洛隨手散盡只以一柄扇二 軸簡仰呈耳倭竹甘草小許並呈 驢兒用意 看撿而長程 驅頓未免憊 敗殊相未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