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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구강서원(龜岡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F.1923.4713-20160630.y1650101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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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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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구강서원, 옥산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작성시기 1923
형태사항 크기: 81.6 X 61.5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안내정보

1923년 구강서원(龜岡書院) 통문(通文)
1923년 2월 29일, 옥산서원에서 두촌 이팽수의 재실을 건립하자는 제안에 대해 구강서원에서 답변으로 보내온 통문이다. 이 통문은 먼저 동향인 두촌의 가계와 행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에 따르면 두촌은 고려 말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충원공 이양길의 8대손이다. 그리고 두촌은 임진왜란으로 몹시 혼란하고 어수선할 때 앞장서서 용감하게 달려 나가 충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비록 나라에서 맡긴 직책은 없었으나, 복병장의 임무를 맡아 격문으로 왜적을 미워하는 의로운 담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압강에서 단결을 맹세하고, 서쪽 바닷가에서 책략을 써서 가는 곳마다 왜적을 무찔러 섬멸하였다. 당시 경주울산 사이에서 두촌이 버티면서 몇 개월 동안 온전히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내 대규모의 도적들이 갑자기 밀어닥쳐 기세가 궁해지고 힘이 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촌은 끝내 달아나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다. 이렇게 장한 일은 한 인물에 대해 제향하자는 옥산서원의 제안에 대해 서로 도모하지 않아도 한 마음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구계서원에서는 옥산서원에서 큰일을 잘 도와서 우리 사림의 여망에 부응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리는 이 통문에서 왜 이 시기에 옥산서원에서 이팽수를 제향하자는 제안을 했으며, 또 어떻게 그 제안이 빠르게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들어가면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다시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새롭게 건립되거나 복원이 되는 원사들 중에는 대부분이 일족의 단합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이팽수의 재실과 같이 현실의 요구와 필요, 그리고 기여를 위해 건립된 것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상도 서원·사우의 건립추이와 제향인물의 성격」,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23년 2월 29일, 玉山書院에서 杜村 李彭壽의 齋室을 건립하자는 제안에 대해 龜岡書院에서 답변으로 보내온 通文
1923년 2월 29일, 玉山書院에서 杜村 李彭壽의 齋室을 건립하자는 제안에 대해 龜岡書院에서 답변으로 보내온 通文이다.
이 통문은 먼저 두촌 이팽수가 同鄕의 사람으로 그의 높은 충성과 용맹한 행적은 講學으로 잘 알고 있다고 하였다. 이 통문이 전하는 두촌의 家系와 行蹟은 다음과 같다. 두촌은 고려 말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忠元公 李陽吉의 8代孫이다. 그리고 두촌 자신은 임진왜란으로 몹시 혼란하고 어수선할 때 앞장서서 용감하게 달려 나가 효심을 옮겨 충성을 위해 죽은 사람이다. 두촌과 선조인 충원공이 모두 이렇게 행동한 것은 대대로 이어져 온 것이며, 또한 평소에 축적된 것이다. 비록 나라에서 맡긴 직책은 없었으나, 伏兵將의 임무를 맡아 檄文으로 왜적을 미워하는 의로운 담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鷗江에서 단결을 맹세하고, 서쪽 바닷가에서 기이한 책략을 써서 가는 곳마다 왜적을 무찔러 섬멸하였다. 당시 경주울산 사이에서 두촌이 버티면서 몇 개월 동안 온전히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내 대규모의 도적들이 갑자기 밀어닥쳐 기세가 궁해지고 힘이 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촌은 끝내 달아나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라고 이 통문은 그의 최후를 크게 칭송했다. 하지만 두촌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정조 때에 이르러서야 참판에 추증되고 정려가 내려졌다고 했다. 이렇게 드러나고 감추어지는 것이 비록 빠르고 늦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늦게나마 官爵을 받고 旌閭가 세워진 것은 천륜과 만물의 법칙이 임한 것이며, 교화로 세상의 경각심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옥산서원에서 두촌의 재실을 건립하자는 제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옥산서원에서 몇 차례 편지를 보내 믿음직한 필치로 두촌의 덕을 드러내어 칭송한 것에 자신들은 덧붙일 것이 없다고 하였다. 다만 오래도록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바야흐로 두촌을 제향하자는 公議가 발의되었으니, 이것은 서로 도모하지 않아도 한 마음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구계서원에서는 제사의 모임에서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토의했다고 했다. 그 토의의 결과는 "우러러 호소하건대, 여러분께서는 큰일을 잘 도와서 우리 사람의 여망에 부응해주기를 바랍니다."라는 말로 나타내고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언급한 두촌 이팽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누구보다 먼저 의병을 모아 홍천 등지에서 왜병을 무찌르는 활약을 보였다. 이 통문에서 임진왜란으로 몹시 혼란하고 어수선할 때 앞장서서 용감하게 달려 나가 효심을 옮겨 충성을 위해 죽은 사람이라는 것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두촌은 6월에 경주를 탈환하기 위해 의병들을 탑동지역에 모이게 해서 전략을 짠 것이 이른바 汶川會盟이었다. 구강에서 단결을 맹세했다는 이 통문의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두촌은 왜적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그 후 두촌은 무과에 급제하여 복병장으로 울산 西生浦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이 통문에서 서쪽 바닷가에서 기이한 책략을 써서 가는 곳마다 왜적을 무찔러 섬멸했다고 하는 것은 복병장으로 서생포를 방어할 때 두촌이 세운 공적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두촌은 이 통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대규모의 병사를 앞세운 왜적들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33세의 나이로 殉國하였다.
우리는 이 통문을 읽으면서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두촌에 대해 구계서원에서 자세히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그에 관한 일들을 기록해 놓은 󰡔杜村實記󰡕라는 책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영의정을 지낸 樊巖 蔡濟恭의 墓碣銘을 비롯해 副提學을 지낸 淸臺 權相一의 墓誌銘, 左承旨를 지낸 艮翁 李獻慶의 招魂辭, 縣監을 지낸 藥南 李獻洛의 招魂墓詩, 禮曹參判을 지낸 耳溪 洪良浩金尙集의 旌閭記, 그리고 領議政을 지낸 陽菴 鄭存謙의 旌閭碑文 등이 실려 있다. 이것을 보면 정조 때의 유명 인사들이 모두 두촌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찬양은 불행히도 두촌이 세상을 떠난 지 200년 가까이 되는 1783년(정조 7)에 있었던 일이며, 이때 비로소 두촌의 공적을 인정하여 嘉善大夫兵曹參判으로 추증되고, 表忠閣을 세워 그의 공적을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5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옥산서원이 다시 두촌의 재실을 지어 그를 추모하려는 뜻을 보였다. 옥산서원의 이러한 뜻은 향촌의 校院들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이듬해인 1924년에 안강산대리에 德山書社라는 재실로 결실을 맺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옥산서원이 왜 그 시점에서 두촌의 재실을 건립하자는 제안을 했으며, 또 어떻게 그 제안이 빠르게 현실로 실현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객관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팽수옥산서원에서 제향을 제안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물론 옥산서원이 있는 안강읍은 이팽수의 본관인 淸安李氏의 세거지이기는 하지만, 그곳의 鄕權은 李彦迪의 후손인 驪州李氏와 孫仲暾의 후손인 慶州孫氏가 양분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두 성씨 이외의 인물이 제향된다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미 경주에는 학문적으로나 공적에 있어서 이팽수를 능가하는 인물들이 배향되고 있어 굳이 그를 다시 제향해야 할 이유가 딱히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제안을 했다고 해서 어떻게 이듬해 바로 실현이 될 수 있느냐하는 것 또한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조그마한 재실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 것이며, 게다가 이팽수라는 인물이 提案處인 옥산서원을 제외하고는 도움을 줄 만한 곳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 통문에서 동향인 구계서원에서 마지막에 "큰일을 잘 도와서 우리 사람의 여망에 부응해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한 것은 제안에 동의는 하겠지만 도움은 줄 수 없다는 간접적인 표시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제안을 한 옥산서원이 이 재실을 짓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고 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옥산서원이 왜 그런 의지를 가졌겠는가 하는 것에 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시대와 연관시켜야 비로소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제안을 한 것은 己未年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4년 뒤의 일이다. 이 시기는 만세운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나마 불씨를 살렸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점차 사그라지는 때였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일제의 식민지 체제가 완전히 고착될 형편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다시 불러일으켜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방안으로 옥산서원에서는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팽수를 제향하는 일이었다. 옥산서원에서는 그의 행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일제에 대한 항거를 간접적으로나마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을 보면 당시 새롭게 건립되거나 복원이 되는 원사들 중에는 대부분이 一族의 團合과 威勢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이팽수의 재실과 같이 현실의 요구와 필요, 그리고 기여를 위해 건립된 것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외형적으로 보면 杜村 李彭壽의 재실인 德山書社가 어떤 경위로 건립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왜 그의 재실이 그렇게 신속하게 건립될 수 있었는가를 따져보면, 거기에는 꺼져가는 독립에의 열망을 되살리려는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통문은 당시에 일족의 단합과 위세의 과시라는 목적으로 건립된 많은 院祠들과 달리 현실의 요구와 필요, 그리고 기여를 위해 건립된 것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경상도 서원·사우의 건립추이와 제향인물의 성격」,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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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答諭事 伏以本鄕之杜村先生李公危忠毅蹟 生等亦講之熟矣 先生麗末死節臣 忠元公陽吉之八代孫 當
龍蛇搶攘之際 挺身勇赴 則移孝死忠 乃世襲而抑素所蓄積也 雖無封疆之寄 主司伏兵將之檄 足以獎敵愾義
膽而會盟於鷗江 設奇於西浦 遇輒剿滅 當時間 賴而得全者數月 而末乃大寇猝至 勢窮力盡遂不旋踵而死之何
其壯哉 在 正廟朝 贈爵亞卿 幷 㫌其閭 顯晦縱有早晏 而斯乃闕闞天彛物則 樹風勵世者也 前後大君子之信筆 揄
揚 來諭已盡之 更不必架疊 而第久遠未遑之齎咨 方來腏享之公議 可謂不謀而同矣 玆因本院享會爛商 仰控伏願
僉尊克贊大事 用副吾林之望 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癸亥二月二十九日龜岡書院院長幼學權寧翼
齋任幼學鄭昶洛
製通幼學權錫瓚
趙大奎
寫通幼學崔泳鎬
會員幼學權泰壎
李耆榮
金相轍
鄭錫麟
李鍾漢
李鶴久
蔣文燮

權宜馹
李能誠
孫晙翼
黃炳哲
韓瑀榮
洪鍾瀅
崔相穆
李鍾曄
權五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