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28일, 李冕宙가 全州 柳氏 三山宗家의 査頓이 보낸 편지에 答狀을 겸해서 한 해를 보내는 자신의 感懷를 적어 보낸 편지
1905년 11월 28일, 李冕宙가 全州 柳氏 三山宗家의 査頓이 보낸 편지에 答狀을 겸해서 한 해를 보내는 자신의 感懷를 적어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수신자가 보내온 편지에 대한 반가움으로부터 시작된다. 발신자는 오랫동안 소식이 막혀 있다가 수신자의 편지가 날아들자 福이 굴러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는 말로 그 반가움을 나타내었다. 이어서 수신자의 안부를 물었다. 조용히 요양하는 중에의 생활에서 몸을 아끼시기 바란다는 말로 수신자에 대한 안부를 대신했다. 그리고 經典을 읽으시는 叔父님의 몸은 건강한지, 자제들은 모든 일을 합당하게 잘 하고 있는지 집안사람들의 근황을 물었다. 그런데 손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느라 걱정이 더한다고 하니, 어머님께 염려를 끼침이 적지 않아 근심스럽기도 하고 밉살스럽기도 하는 말로 수신자의 걱정을 위로했다.
발신자는 수신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안부에 이어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먼저 발신자는 서쪽으로 떠나려던 일을 중지하고 단지 여러 사람의 의론을 듣고 늙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추워지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氣力을 헤아려 반드시 지나친 일이 없도록 한다고 했다. 발신자가 이렇게 움츠려 있는 까닭은 한편으로 가슴속에 물건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고, 다른 한편으로 친구들 사이의 지극한 情을 대할 면목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 없이 이미 행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것이나, 털어내야 할 것을 털어내지 못한 것은 핑계의 말로, 모두 힘이 충분하지 못하고 재주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였다. 이러한 자책은 살아서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죽어서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자기 비하의 말로 이어졌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처럼 발신자의 조카가 떠난 지 이미 열흘에서 보름정도 되는데, 다시 돌아오지 않고 都城에 들어가 上疏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서 다시 발신자 자신의 문제로 돌아가 이전에 다리가 붓는 병이 아직도 통증이 그치지 않아 날마다 염려함이 적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수신자에게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여 더욱 복되기를 기원하며 바빠서 이만 줄인다는 말로 편지의 끝을 맺었다.
이 편지는 皮封이 없어 수신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발신자가 자신을 "査弟服人"이라고 지칭한 것을 보면 수신자와 査頓 관계에 있으며, 자신은 지금 喪中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발신자인 李冕宙가 三山宗家의 사돈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에서 보는 것처럼 이 편지에서도 두 사람은 단순한 인척의 관계가 아니라 모든 것을 털어놓고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 사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 발신자인 李冕宙는 삶에 대한 의욕이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서도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태도는 일시적인 기분이고, 또 편지가 지극히 사적인 심정을 토로하는 공간이기 때문인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李冕宙는 1864년 고종의 등극과 함께 正言으로 임명되자 時局의 그릇됨을 上疏하고, 이것이 시정되지 않자 사직하고는 이후 주어진 일체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 편지가 쓰인 乙巳年에는 일본과의 조약을 반대하고 그 조약을 주도한 다섯 관료를 극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고,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에는 음독 자결하였다. 그의 이러한 履歷을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일시적 감정이나 개인적 소회로 간주할 수 없다. 그리고 이 편지의 본문에서 조카가 도성으로 가서 상소한다는 것은 五賊臣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한 李冕宙의 상소를 대신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이 편지는 단순히 사돈 간의 私的인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온 몸으로 맞선 志士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
『全州柳氏大同譜』,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