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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김건영(金建永)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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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김건영
작성지역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작성시기 1901
형태사항 크기: 22.5 X 46.5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주진 전주류씨 삼산종가 / 경상북도 안동시 수곡면 문중소개
현소장처: 안동 주진 전주류씨 삼산종가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안내정보

1901년 김건영(金建永) 서간(書簡)
1901년 7월 22일, 김건영삼현에 거주하는 전주 유씨 삼산종가의 사람이 보낸 편지에 답장으로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답장이기에 먼저 수신자가 보낸 편지가 가뭄 끝의 단비와 같다는 고마움의 표시로부터 시작된다. 그에 이어서 수신자를 비롯해 그의 숙부와 집안사람들 모두의 안부를 물었다. 다음에는 발신자가 수신자를 찾아가지 못한 사정에 대해 전했다. 그 사정이란 오랜 여행으로 피로가 겹치고 궁함이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지금도 일상생활을 하기가 힘들 정도라고 했다. 이어서 수신자 물은 녹사에 관해 언급했다. 이 일은 발신자가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니지만, 일의 선후가 뒤집혀져서 지금은 중지 상태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래서 심부름을 온 사람이 먼 길이 헛걸음이 되어 발신자도 답답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 소식으로 외갓집이며 숙부가 도에서 추천하는 인재로 받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전했다.
이 편지의 피봉에는 "삼현 경좌하 회납"이라는 말과 "해저사후장"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이 말들을 통해서 보면, 수신자는 지금의 안동예안주진리인 삼현에 거주하며, 이 편지는 수신자가 보낸 것에 대한 답장이며, 발신자의 거주지는 지금의 봉화봉화해저리이다. 그리고 편지의 말미에서 발신자는 자신을 "척제"라고 한 것을 보면, 발신자가 수신자보다 손아래인 겨레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이 편지는 친척인 윗사람이 녹사와 관련하여 편지로 물어온 것에 답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
『全州柳氏大同譜』,
『봉화군사』, 봉화군, 봉화군, 2002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01년 7월 22일, 金建永이 三峴에 거주하는 全州 柳氏 三山宗家의 사람이 보낸 편지에 答狀으로 보낸 편지
1901년 7월 22일, 金建永三峴에 거주하는 全州 柳氏 三山宗家의 사람이 보낸 편지에 答狀으로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답장이기에 먼저 수신자가 보낸 것에 대한 고마움의 말로부터 시작된다. 그 말은 소식이 막혔다가 수신자의 편지를 받게 되니 마치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것 같다는 것이었다. 수신자의 편지에 대한 고마움에 이어 그의 안부를 물었다. 요즈음 날씨가 서늘해지고 있는데, 수신자가 정양하는 가운데 언제나 잘 지내며 모든 일이 편안한지를 물었다. 이어서 수신자의 叔父가 신령의 加護로 강령하며, 집안의 모든 사람들도 모두 잘 지낸다고 하니 위로가 되고 축하를 드린다는 말로 집안의 여타 사람들에 대한 안부를 대신하였다.
발신자는 수신자의 안부에 대한 말에 이어 자신의 사정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것은 수신자가 편지를 보내 발신자가 왜 자기를 찾아오지 않았는지 물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먼저 발신자는 자신이 봄 사이에 물이 침범하지 않을 때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처음에는 돌아오는 길에 찾아가 만날 계획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너무 많은 피로가 겹치고, 여행의 길이 오래되어 궁함이 심해져서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수신자를 그냥 지나쳐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발신자는 지금도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그런데도 수신자가 따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감사하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하다는 말로 사과를 대신했다. 그리고 발신자가 여행에서 얻은 몸의 상처가 아직도 완쾌되지 않아 일상생활을 하기가 힘들 정도이니 내심으로 번민이 어떠하겠느냐며 발신자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줄 것을 당부했다.
발신자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말한 후에 수신자가 물어온 錄事에 대해 언급했다. 그 일은 발신자가 간여하지 못했지만, 집을 고치고 나서 지붕을 새로 이는 것과 같이 일의 先後가 뒤집혀져서 지금은 중지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고 했다. 수신자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뜻은 모르겠지만, 심부름을 온 사람이 여러 차례 간곡히 부탁을 했지만 가르침을 어기기 어려운 형세인데다 주체를 교체하기도 지극히 어려워 지금과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러다 보니 먼 길이 헛걸음이 되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했다. 녹사와 관련된 이야기에 이어서 외갓집의 소식이며, 숙부가 道에서 추천하는 인재로 받들어지게 되었는데 일전에 監營으로부터 정해졌다고 하니 아마도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닐 것이라는 등의 말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것은 바빠서 이만 줄인다는 말로 편지의 끝을 맺었다.
이 편지의 피봉에는 "三峴 經座下 回納"이라는 말과 "海底謝候狀"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이 말들 가운데 전자에 따르면 수신자는 지금의 안동예안주진리인 三峴에 거주하며, 이 편지는 수신자가 보낸 것에 대한 답장이다. 다음으로 후자에서 말하는 발신자의 거주지인 해저는 지금의 봉화봉화해저리이다. 그리고 편지의 말미에서 발신자는 자신을 "戚弟"라고 하고 있다. 이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비록 姓氏는 다르나 겨레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이 편지는 친척인 윗사람이 녹사와 관련하여 편지로 물어온 것에 답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문서찰의 격식과 용어』, 박대현, 아세아문화사, 2010
『全州柳氏大同譜』,
『봉화군사』, 봉화군, 봉화군, 2002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三峴 經座下 回納
海底謝候狀

阻餘得書便同旱餘
逢雨謹詢比凉
靜體連衛萬旺
亞庭候護康堂內
都節勻迪仰慰且
賀戚弟春間非水
南行初意回路晋叙
計矣大衛餘祟久爲
窮甚喜指息而戞過
尙今嫌悵不較之示尤
爲感悚身瘍尙有
餘憊未能爲常?入私
悶奈何闌揮錄事弟雖不相間而
還因葺事似爲中止云而未知
念意之如何鬣子累次勤托
勢難違敎而代主極難故已
至于今日此戚騎來鬣亦不稱
兒少輩耶子不欲尙手故未能
如敎換送勿??如何
遠路虛行不勝悶悶也
倒兒月內將送致別往
還間晋候云耳前付今
外宅亦平安爲奉
阮丈道薦奇壯壯日前自
營來定者似不虛傳耳
餘忙不備謝上
辛丑七月卄二日戚弟
金建永拜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