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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호계서원(虎溪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F.1839.4717-20160630.y165010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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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유치명, 박종범, 권재대, 호계서원, 옥산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39
형태사항 크기: 113.6 X 63.8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안내정보

1839년 호계서원(虎溪書院) 통문(通文)
1839년 4월 15일, 화재로 강당을 소실한 옥산서원을 돕기 위해 다음 달 15일에 안동 서악사에서 도회의 개최를 알리는 호계서원의 통문이다. 이 통문은 먼저 옥산서원의 화재에 대한 소식을 풍문으로 듣고서 놀랍고도 의심스러웠다고 하였다. 그런데 재앙의 참혹함이 임금께서 내리신 편액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니, 그 당시의 정황이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위로를 전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멀리 거주하는 까닭에 그 날에 함께 근심해줄 수 없었고, 또 때에 맞추어 서로 묻거나 의논해 오는 것을 할 수 없었다며 미안함을 표했다. 그럼에도 옥산서원에서 거듭 상의와 소식을 전해준 것에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그 동안 옥산서원에서 우리 유학계를 위해 기울인 정성과 노력을 치하하며, 자신들은 옥산서원의 어려움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러면서 복구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들은 이 일을 논의하기 위해 다음 달 15일에 안동 서악사에서 도회를 개최한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한 가지 전할 말이 있다면서 미수 허목 선생의 영당에서 도내에 도움을 청한 일을 전했다. 이에 대한 논의도 이번 모임에서 할 것이니 옥산서원에서 관하의 여러 고을에 글을 돌려 정한 기일에 회의에 참석하도록 해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옥산서원의 화재는 1839년 1월 28일에 있었던 구인당 화재사건이며, 이 통문은 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옥산서원에 도움을 주기 위한 모임을 개최한다는 것이다. 이 회의에서는 각 향교와 서원, 그리고 사우의 분담금에 대한 자발적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거도적으로 나서서 도움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문 사례로 이것은 당시 대부분의 서원이 가문 중심으로 운영되던 것과는 차별되는 것이며, 옥산서원이 영남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39년 4월 15일, 화재로 講堂을 소실한 玉山書院을 돕기 위해 다음 달 15일에 安東 西岳寺에서 道會의 개최를 알리는 虎溪書院의 通文
1839년 4월 15일, 화재로 講堂을 소실한 玉山書院을 돕기 위해 다음 달 15일에 安東 西岳寺에서 道會의 개최를 알리는 虎溪書院의 通文이다.
이 통문은 먼저 옥산서원의 화재에 대한 소식을 풍문으로 듣고서 놀랍고도 의심스러웠다고 하였다. 그런데 옥산서원에서 알려온 소식을 받고 재앙의 참혹함이 임금께서 내리신 扁額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니, 그 당시에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을 情況이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위로를 전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멀리 거주하는 까닭에 그 날에 함께 근심해줄 수 없었고, 또 때에 맞추어 서로 묻거나 의논해 오는 것을 할 수 없어 책임을 회피하고 게으름을 부리는 것이 배척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미안함을 표했다. 그럼에도 옥산서원에서 거듭 商議를 해오고, 또 회의를 하기 위해 정한 날을 거듭 전달해준 것에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그 동안 옥산서원에서 우리 유학계를 위해 기울인 精誠과 努力에 자신들도 모르게 탄복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것이 민첩하지 못한 자신들을 더욱 부끄럽게 한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이 뜻밖으로 생겨난 것이라 힘이 부칠 것이라는 근심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편액의 下賜를 위에다 청하는 한 가지 절차만 해도 한두 번으로 답변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며 화재로 고충을 당하는 옥산서원의 입장을 걱정해주었다. 그래서 자신들은 옥산서원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다음 달 15일에 안동 서악사에서 도회를 개최하니 정한 기일에 모임에 와주었으면 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또 한 가지 전할 말이 있다면서 眉叟 許穆 선생의 影堂에서 도내에 도움을 청한 일이 있다며 작년 겨울 안동의 士林을 일부러 찾아온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추위와 흉년의 근심으로 그들이 내방한 일을 두루 알릴 겨를이 없어 금년 10월 가을에 호계서원에서 답변을 해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 일 또한 의논이 없을 수 없는 것이기에 알려드리니, 옥산서원에서 管下의 여러 고을에 글을 돌려 한 곳도 이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게 하여 정한 기일에 회의에 참석하도록 해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옥산서원의 화재는 1839년 1월 28일에 있었던 求仁堂 화재사건이다. 이는 옥산서원의 10칸짜리 강당으로 1572년에 창건되었다. 그리고 화재가 일어나기 전까지 268년 동안 한 번도 수리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화재가 일어나기 이틀 전인 1월 26일 굴뚝에 문제가 생겨 수리를 하였다. 그리고 1월 28일 밤에 건물과 바닥 사이의 빈틈으로 불길이 쓰며들어 全燒가 되었다. 이 화재로 인해 강당만 전소된 것이 아니라 옥산서원에서 보관하고 있던 귀중품들이 상당수 소실되었다. 이 통문에서 말했듯이 宣祖 때 李山海가 쓴 賜額板을 비롯해 숙종 때의 傳敎謄書板, 영조 때의 備忘記板, 정조 때의 御製祭文板과 白鹿洞規板, 그리고 本院 院規板, 韓石峯이 쓴 求仁堂, 兩進齋, 偕立齋라는 3개의 현판 등이 모두 잿더미로 변한 것이었다.
이 화재로 인해 귀중품들이 소실된 것도 문제이지만, 더욱 큰 문제는 전소된 강당을 어떻게 重建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통문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라 힘이 부칠 것이란 근심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은 강당을 재건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옥산서원에서는 화재가 있은 지 이틀이 지난 뒤인 2월 1일에 중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여 먼저 鄕內의 鄕校와 書院에 통문을 내고, 2월 13일에는 西岳書院에서 수백 명이 참석한 鄕會를 개최하고 강당 중건을 위한 협조를 도내 사림들에게 요청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이 통문에서 "거듭 상의를 해오고, 회의를 하기 위해 정한 날을 거듭 전달해주었다"는 것은 바로 이때 발행한 통문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옥산서원에서 도내의 사림들에 도움을 청하자 많은 사람들이 힘을 보태기 위해 나섰다. 그것은 옥산서원이 영남의 서원 가운데 首院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통문에서 말한 것처럼 옥산서원이 그 동안 유림을 위해 기울인 정성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통문의 말미에 미수의 영당에서 도움을 청해온 사실을 덧붙인 것은 상당히 의아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옥산서원이 화재로 인해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덧붙인 것은 바로 옥산서원이 갖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옥산서원이 도내의 사림에 도움을 요청하자 그에 호응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통문에서 말하는 도회의 개최이다. 이 회의에서는 分擔金에 대한 자발적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도회는 이때뿐만 아니라 9월 26일에도 있었다. 이때는 화재의 소식을 뒤늦게 접한 영남의 북부지역 유림들이 科時를 잠시 기다려 영남의 좌·우도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논의를 하려고 개최지를 達城鄕校로 정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옥산서원에 도움을 주기 위해 도내의 각 校·院·祠는 물론이고 회재의 후손들, 그리고 鄕中과 門中 등이 막대한 돈을 기부했고, 그것들은 구인당의 중건비용으로 충당되었다. 당시 이 役事에 소요된 인원과 자금을 기록한 󰡔求仁堂重建日記󰡕와 󰡔鄕中錢入記󰡕, 그리고 󰡔道內錢入記󰡕에 따르면 건물 중건에 동원된 役丁은 총 16,259명이며, 향중과 도내로부터 기부를 받은 금액은 모두 2,616兩 2錢이었다. 이런 도움에 힘입어 화재가 일어난 그해 12월 13일에 건물의 낙성을 알리는 致祭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이 통문에서 언급한 再賜額의 문제는 강당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7월부터 시작되었다. 生員 南鴻陽을 狀頭로 구인당의 화재가 일어나게 된 事由와 이후 경주와 도내 사림들의 힘으로 중건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히 적은 上書를 前承旨 李淵祥을 통해 慶尙監司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8월 22일에 이연상옥산서원이 거듭 사액될 근거로 다른 서원의 復額 사례를 정리하여 보냈다. 9월 7일에는 科擧를 치른 道儒 500여 명이 옥산서원의 복액을 위한 상서를 작성하여 감영에 보내 禮曹에 啓達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巡營에서는 옥산서원에 관문을 보내와 額號 네 글자는 해당 관서에서 선사하여 보내온다고 하고, 御製祭文은 영문에서 선사하여 판에 새겨 걸도록 했다고 전해왔다. 그래서 이듬해인 1840년 3월 7일 慶尙監司慶州府尹을 비롯해 영천·청도·청송경주 인근의 13개 지방관이 참가한 가운데 落成式을 거행하였다.
옥산서원의 강당이 소실되었다가 중건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움이 모든 서원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소소한 도움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 관례이기는 하였지만, 이렇게 擧道的으로 나서서 도움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당시 대부분의 서원이 家門 중심으로 운영되던 것과는 차별되는 것으로, 옥산서원이 영남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1839년에 있었던 옥산서원의 화재에 도내의 校院이 자발적으로 나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와 같은 것은 흔치 않는 경우로 옥산서원의 강당이 어떻게 중건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지만, 또한 당시 옥산서원이 도내의 유림에서 차지하는 位相을 가늠해볼 수 있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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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文爲回諭事 貴院講堂回祿之災得於風傳方切驚疑卽伏承 尊諭乃知其爲災之酷至於 宣賜題額 亦不能奉免則其時
驚遑罔措之狀可以想得矣生等居遠之故旣不能同患於其日又不能趂時相問與聞來議其爲逋慢合在斥外而 僉尊乃辱與之商度諭以尅期重達
僉尊爲斯文誠力不覺懣然心服而益以愧不敏也仍窃伏念事出不虞力屈之患在所難免 宣額上請一節 又非一二書見所可仰答玆以來月十五日定道會于
獘邑西岳寺伏想 僉尊趂期來會矣又有仰稟事宜寧 眉叟許先生影堂道內請助事本邑士林昨冬委來 而以寒事歉憂無暇遍通期以今年十月秋自鄙院回送
矣此事亦不可無議處玆又奉告幸望自 貴院卽爲發文於管下諸邑俾無一處不知及期齊會之地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己亥四月十五日虎溪書院都有司前護軍金在仁
齊有司 幼學李相敬
柳致任
會員 生員 金憲運
金享壽
大諫柳致明
參奉金在鼎
柳鼎文
進士李五秀
金祖壽
幼學金鎭坤
柳致直
李秀應
權大進

權載綸
李相洛
裴鳳周
參奉權載鈺
正言朴宗範
趙龍來
幼學李秉夏
金弼五
金鎭龍
縣監權載大
校理金龍洛
進士金燁銖
柳致敎
典籍金鎭右
幼學金若洙
金岱鎭

金廷鎭
禹宅準
裴善萬
金性壽
柳泰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