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壬申年) 12월 10일, 남편을 따라 순절한 呂圭完의 妻 襄陽 權氏(=예천 권씨)를 포상하는데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며 예천 鼎山壇所 會中에서 玉山書院에 보내온 通文
내용 및 특징
1932년(壬申年) 12월 10일, 남편을 따라 순절한 呂圭完의 妻 襄陽 權氏(=예천 권씨)를 포상하는데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며 예천 鼎山壇所 會中에서 玉山書院에 보내온 通文이다.
이 통문은 사람의 도리 가운데 三綱五倫보다 큰 것이 없고,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는 節槪를 드러내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곧 이 통문의 목적이 유교의 윤리도덕을 선양하는데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로부터 있어온 忠臣․孝子․烈女를 포상하고 드러내어 천하의 사람들이 윤리로써 교화될 수 있도록 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포상하고 드러낼 인물이 拙齋 權五紀의 후예이자 權正遠의 여식이며, 咸陽人인 呂薰의 아들 圭完의 妻라고 이 통문은 주장하였다. 이 통문이 전하는 呂圭完의 妻 襄陽 權氏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權氏는 자태와 품성이 온순하고 발랐으며, 효성과 애정이 빼어나 천척과 향당에서 모두들 칭찬하였다. 배우자를 골라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모시는데 어김이 없었으며, 가난한 살림에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아 아녀자의 도리를 깊이 얻었다고 할 만하였다. 그런데 남편인 圭完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게 되자 權氏가 시아버지에게 "장부의 뜻이 천지 사방에 있기는 하나 오래도록 객지에서 기숙을 하면 심히 어려울 것이니, 원컨대 한번 가서 음식을 받들고 함께 고락을 나누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먼 길을 가는 것은 어렵다는 말로 달랬다. 그리고서 몇 년이 지난 후 權氏가 다시 시아버지께 간청을 하였다. 이번에는 막을 길이 없어 허락하였다. 權氏는 도쿄에서 남편을 만나 오사카에서 몇 달을 함께 지냈다. 그런데 남편이 볼일을 보러 동경에 갔다가 10여 일 만인 4월 25일 객사에서 숨지고 말았다.
權氏는 남편의 장례를 마치고 슬프고 황급했으나 참고 억제하며 귀국하였다. 남편의 卒哭을 마치고는 울음도 심하게 울지 않고 시부모님들을 위로하였다. 그런데 權氏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에 시아버지가 달래며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하나 죽지 않는 것은 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가 이렇게 하니, 내가 어찌 혼자 밥을 먹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그러자 권씨는 "치아가 흔들리고 위장이 손상되어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오래되면 위장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것이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權氏는 끝내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러자 권씨의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듣고 와서는 꾸짖으며 "지아비가 이미 죽었으니 후사를 보전해야 하는데, 지아비를 위한다고, 너의 어머니도 한번 만나지 않고 천리 먼 길을 떠나려 하느냐?"라고 말했다. 그러자 권씨가 말하기를 "집에 있을 때는 마땅히 아버지를 따라야 하지만, 지금은 따라야 할 것이 지아비에게 있으니 아버지의 命이라도 받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다만 어머니를 한번 뵙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서 음식을 조금 먹었다. 權氏는 친정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뵙고 며칠을 머물며 2자가 되는 비단을 어머니에게 드리며 "이것으로 조카의 옷을 지어서 저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이 하세요."라고 하였다. 시댁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족들을 지나오며 일찍이 일본에서 함께 고생했던 것을 물건으로 情을 표하며 "나중에 다시 얼굴을 뵙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날 權氏는 국수를 사서 돌아와 시아버지께 점심을 지어드리면서 자신은 또 먹지 않아 시아버지가 억지로 권해서 먹게 했다. 이때부터 權氏의 행동은 평소와 같이 스스로 밥하고 물 긷고, 바느질하고 길쌈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權氏가 솜을 빨러 나가고자 하기에 시아버지가 피곤해 보이는 權氏가 안쓰러워 제지를 하였으나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시어머니가 함께 솜을 빨았다. 날이 거의 저물어 갈 무렵 시어머니가 저녁밥을 지어라고 들여보내고 잠시 뒤 빨래를 마치고 들어가니 부엌에는 연기가 나지 않고 방문은 닫혀 있었다. 놀라 급히 문을 열어보니 이미 權氏는 목을 매어 죽어 있었다. 그 날이 6월 6일이었다. 그리고 12월 6일 남편과 합장하기 위해 널에서 시신을 다시 꺼내니 權氏의 안색이 평소와 같았다고 이 통문은 전하였다.
이런 행적을 보인 權氏에 대해 갑작스레 목숨을 끊는 일은 쉽지만, 조용히 義理에 나아가는 것은 어렵다며 마침내 아녀자의 도리를 완전하게 한 것으로 이 통문은 齊나라의 武將인 杞梁의 妻에 비교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杞梁의 妻가 전장에서 숨진 남편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자 나라의 풍속이 변한 것처럼 權氏의 곧은 절개는 사람들에게 人倫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통문을 보낸 자신들은 權氏의 일을 사실에 근거해서 알린 것이니, 여러분들이 잘 헤아려서 포상하고 선양하는 글을 내려서, 기울어져 가는 기강을 바로 세우고 세상에 선함을 권하여 東方의 中華에 禮義의 풍속이 잘 드러났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은 일제강점기에 書院을 중심으로 儒敎의 윤리와 도덕을 보존하고 공고히 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과거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진 것이었다. 조선은 유교적 풍속의 교화를 위해서 본 통문이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충신․효자․열부를 三大節이라 하여 적극적으로 포상하는 정책을 폈다. 조선후기에 간행된 大典通編에 따르면, 孝行과 烈行이 旌閭와 復戶에 부합되는 자는 모든 道에서 뽑아서 보고하고, 式年(3년)의 年初마다 禮曹의 세 堂上이 모여 상세히 살피고, 이를 다시 議政府로 이첩하여 별단으로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선발된 사람들은 관직이나 물건을 賞으로 주고, 더욱 뛰어난 자는 旌門을 내려 받고 세금을 면제받는 復戶의 혜택을 누렸다. 그리고 妻로서 절개를 지킨 烈女의 경우는 항상 復戶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국가로부터 복호의 특혜를 받거나 효자나 열녀로 공인받기까지 지역사회의 광범위한 지지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역사회의 광범위한 지지도 사회적 지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명확한 행적이 드러나는 충신과는 달리 효자나 열녀는 그 행적을 국가에서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효자나 열녀의 행적은 다른 사람들의 公議에 의해 인정되고, 그들의 추천에 의해 파악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효자나 열녀는 지역 士林의 公論에 의해 추천되어 해당 고을의 수령이 받아서 이를 각 道의 관찰사가 수합하여 禮曹에 올렸다. 그 과정이 이러하다 보니 지역사회에서 公議를 얻지 못하면 아무리 그 행적이 뚜렷하다 해도 효자나 열녀로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효자나 열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들을 배출한 집안이 지역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거나, 여타 士族들과의 폭넓은 교유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야만 가능했다.
또한 향촌사회에서 이러한 효자나 열녀 들을 찾아 널리 알리고 중앙에 보고하여 旌表하도록 하게 하는 일은 대개 鄕校나 書院에서 하였다. 이 두 기관에서 사림의 공의를 모으거나 확인한 후 그러한 내용을 수령에게 넘기면, 수령이 이를 감사에게 천거하였던 것이다. 이 통문을 玉山書院에 보내온 鼎山壇所는 1869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예천의 鼎山書院의 後身으로 이전까지 자신들이 해온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효자나 열녀에게 국가에서 포상하는 제도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통문을 돌려 열녀의 포상을 장려하고 나선 것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이념인 유교의 윤리와 도덕을 선양하고 공고히 하려는 의도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188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 여성교육으로 인해 여성들의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유림이 흔히 삼대절이라고 불리는 충신․효자․열녀를 포상하고 선양함으로써 그들의 이념인 유교를 지켜내는 한편, 서구문물의 유입과 신교육으로 인한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에 대처하려 했음을 엿보게 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2
「조선시대 대구지역의 효자.열녀」 『사학연구』 제63호, 박주, 한국사학회, 2001
「초기 '신여성'의 사회진출과 여성교육」 『여성과 사회』 제11호, 박정애, 한국여성연구소, 2000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