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戊午年) 7월 12일, 李源海의 妻 順天 朴氏의 烈行을 빛나게 하고, 사방에 두루 알릴 수 있게 해달라는 大田鄕會의 會中에서 玉山書院에 보내온 通文
내용 및 특징
1918년(戊午年) 7월 12일, 李源海의 妻 順天 朴氏의 烈行을 빛나게 하고, 사방에 두루 알릴 수 있게 해달라는 大田鄕會의 會中에서 玉山書院에 보내온 通文이다.
이 통문은 열행이 어떠한 것인가를 설명하는 말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절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三綱에 있기는 하지만, 열행이라는 것은 公議가 사라지지 않고 百世를 기다려도 의심할 바가 없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열녀에게 포상하라는 狀啓를 올리고, 나라에는 그를 기리는 떳떳한 법이 있으며, 그것을 이룬 것을 仁이라 하고, 그것을 말하는 것을 義라고 한다고 하였다. 지금 세상을 돌아볼 때 이와 같은 위대한 절개를 갖춘 사람으로 순천 박씨 부인과 같은 사람이 있겠느냐며, 그녀가 열녀로서 가장 완전한 자격을 갖추었음을 공표하였다.
이 통문은 박씨부인의 家系와 그 行蹟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그녀는 忠正公 醉琴軒 朴彭年의 후예이며, 그 남편은 眞城人 李源海로 文純公 退溪 李滉의 후예이다. 박씨부인은 영남에서부터 충청도로 옮겨와 살았는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남편이 병이 들어 끝내 그 병을 떨쳐내고 일어나지 못했다. 박씨부인은 하늘에 기도하며 자신의 목숨을 대신해주기를 원했지만,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박씨부인은 땅바닥에 쓰러져 거의 혼절하였으며, 남편의 시신을 염을 할 때에는 누각에서 뛰어내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부모들이 힘을 다해 부인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자 부인은 원통한 한을 품고 스스로 판단해 결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로 부인은 그 마음을 안으로 간직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시부모를 모시며 도리어 위로를 하고,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면서도 슬픔을 절제하려 애썼다. 그러자 집안사람들은 부인을 믿게 되었다.
그러던 중 大祥의 날이 멀지 않아 제물을 갖추고 옷을 지었다. 그리고 남편의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고 옷을 불태우고 묻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둘째 고모가 병이 들어 온 집안이 밤에 텅 비게 되었다. 그러자 부인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스스로 殮具 한 벌을 짓고는 鹽安을 마시고 죽었다. 그리고 부인은 두 통의 글을 남겼는데, 부모에게는 못난 자신은 여한이 없다고 하고, 아랫동서들에게는 효도를 하고자 했으나 이제 마치고자 한다고 했다. 이때 부인의 나이가 23세였다.
이 통문은 박씨부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의로움을 위해 조용히 목숨을 버림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하고 찬탄하였다. 그러면서 옛날에 열부라고 하는 衛나라의 共姜과 唐나라의 盧氏는 일찍 죽었거나 거의 죽음에 이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孔子는 이것을 詩經의 國風에 채록해 두고 朱子는 小學의 善行編에 편집해 넣었다고 하였다. 그에 반해 박씨부인은 땅바닥에 쓰러져 기절하여 죽으려 하였고, 또 누각에서 뛰어내려 죽으려 하였고, 마지막으로 독을 마시고 죽었다며, 이는 한번 죽는 것도 어려운데 세 번이나 죽은 것이라며 그 절개의 열렬함을 더욱 강조하였다. 그런데 박씨부인의 열렬한 절개의 기운이 마땅히 초목과 더불어 사라지지 말아야 하는데, 이제 하늘이며 땅과 어우러져 모두 폐해지게 되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한 말들은 자세한 것은 아니지만, 본가에서 채록한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니 옛날의 법도에 따라 그 묘소에는 "烈女朴氏之墓"라고 하고, 마을 어귀에 세울 정려에는 "士人眞城李源海之妻"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 군자들이 의견을 모아서 한편으로는 千古의 뛰어난 절개를 빛나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四方에서 와서 보게 하는 뜻을 보여준다면 참으로 다행스럽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은 일제강점기에 각 지역의 儒林이 중심이 되어 儒敎의 윤리와 도덕을 보존하고 공고히 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과거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진 것이었다. 본 통문의 서두에서 나라에는 열녀를 기리는 떳떳한 법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두고 말한다. 특히 조선은 유교적 풍속의 교화를 위해서 충신․효자․열부를 三大節이라 하여 적극적으로 포상하는 정책을 폈다. 조선후기에 간행된 大典通編에 따르면, 孝行과 烈行이 旌閭와 復戶에 부합되는 자는 모든 道에서 뽑아서 보고하고, 式年(3년)의 年初마다 禮曹의 세 堂上이 모여 상세히 살피고, 이를 다시 議政府로 이첩하여 별단으로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선발된 사람들은 관직이나 물건을 賞으로 주고, 더욱 뛰어난 자는 旌門을 내려 받고 세금을 면제받는 復戶의 혜택을 누렸다. 그리고 妻로서 절개를 지킨 烈女의 경우는 항상 復戶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국가로부터 복호의 특혜를 받거나 효자나 열녀로 공인받기까지 지역사회의 광범위한 지지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이 통문을 시작하면서 열행이라는 것은 공의가 사라지지 않고 백세를 기다려도 의심할 바가 없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역사회의 광범위한 지지도 사회적 지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명확한 행적이 드러나는 충신과는 달리 효자나 열녀는 그 행적을 국가에서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효자나 열녀의 행적은 다른 사람들의 公議에 의해 인정되고, 그들의 추천에 의해 파악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효자나 열녀는 지역 士林의 公論에 의해 추천되어 해당 고을의 수령이 받아서 이를 각 道의 관찰사가 수합하여 禮曹에 올렸다. 그 과정이 이러하다 보니 지역사회에서 公議를 얻지 못하면 아무리 그 행적이 뚜렷하다 해도 효자나 열녀로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효자나 열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들을 배출한 집안이 지역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거나, 여타 士族들과의 폭넓은 교유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야만 가능했다.
또한 향촌사회에서 이러한 효자나 열녀 들을 찾아 널리 알리고 중앙에 보고하여 旌表하도록 하게 하는 일은 대개 鄕校나 書院에서 하였다. 이 두 기관에서 사림의 공의를 모으거나 확인한 후 그러한 내용을 수령에게 넘기면, 수령이 이를 감사에게 천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869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많은 서원이 문을 닫으면서 이러한 일은 주로 鄕會를 통한 지역의 유림이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효자나 열녀에게 국가에서 포상하는 제도가 없어졌다. 그리고 이 통문의 내용을 보면 박씨부인은 당대의 사람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통문을 돌려 사라져가는 열녀의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려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이념인 유교의 윤리와 도덕을 선양하고 공고히 하려는 의도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188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 여성교육으로 인해 여성들의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유림이 흔히 삼대절이라고 불리는 충신․효자․열녀를 포상하고 선양함으로써 그들의 이념인 유교를 지켜내는 한편, 서구문물의 유입과 신교육으로 인한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에 대처하려 했음을 엿보게 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2
「조선시대 대구지역의 효자.열녀」 『사학연구』 제63호, 박주, 한국사학회, 2001
「초기 '신여성'의 사회진출과 여성교육」 『여성과 사회』 제11호, 박정애, 한국여성연구소, 2000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