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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상주 도남단소(道南壇所)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XF.1898.4725-20150630.y155010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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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유도석, 유인목, 옥산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작성시기 1898
형태사항 크기: 92.1 X 58.0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안내정보

1898년 상주 도남단소(道南壇所) 통문(通文)
1898년(무술년) 3월 9일, 우복 정경세의 별집을 간행하면서 그 연보를 청룡본의 의거하는데 대해 사림의 의견을 묻기 위해 도회를 개최한다는 것을 옥산서원에 알리는 도남단소의 통문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사위인 동춘당 송준길이 정경세의 연보를 처음으로 정리하면서 영남의 여러 선배들에 대한 행적과 사실을 모두 은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뒷사람들이 모두 이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있어 100여 년 동안 궤짝에 보관하여두고 간행하여 배포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1830년(순조 30)에 유심춘(1762~1834), 유태좌(1763~1837), 강세륜(1761~1842), 황반로(1766~1840)와 같이 덕망이 높은 원로들이 모두 한결 같이 정경세의 문집에 연보가 없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산에서 오고가며 서로 상의해서 정정하였다. 이 일을 맡은 사람은 정상진(1770~1847)과 정상리(1774~1848) 두 사람으로, 그들은 근본이 되는 학문의 연원과 수수, 말단이라고 하는 서로 주고받은 문자, 당시에 하던 사업과 세운 공로, 그리고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것 등 주워 모으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세세하고 미세한 데까지 미쳐서 완전한 글을 이루어 글자를 새기는 사람에게 맡겼다. 이것이 청룡본이며, 그렇게 해서 지어진 것이 계속 이어져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경세의 후손이 그의 별집과 연보를 엮으면서 한 조목씩 문제가 된 송준길의 연보를 따랐다. 그러자 하회 유씨들이 이의를 제기하여 정경세의 후손들은 거듭 오고가며 여러 곳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서 채웠으나 끝내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에 이 통문을 발행한 사람들은 얼마 전에 도남단소에서 모임을 갖고 예전의 청룡본에 의거해서 간행하여 배포할 뜻을 밝혔다. 이러한 사실을 의논하기 위해 3월 27일에 병산서원에서 도회를 개최하기로 정했기에 이렇게 연명한 글을 돌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정경세의 문집은 사위인 송준길과 사손인 정도응의 주관 하에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초고를 20권 10책으로 정리 편찬하여 1657년(효종 8)에 도남서원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정경세의 시문만으로 이루어진 소략한 것이었다. 그래서 송준길이 1633년 문제의 연보를 쓰기 시작해서 본집과 정원일기 등을 상고하여 1644년경에 일단락을 지었다. 하지만 이것은 간행되지 않고 그 뒤 후손 정상진과 정상리가 정종로의 유지를 따라 연보와 부록을 포함한 별집을 8권 4책으로 편찬하여 1821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것이 본 통문에서 주워 모으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세세하고 미세한 데까지 미쳐서 완전한 글이라고 하는 청룡본이다. 그리고 별집의 중간은 앞서 말한 것처럼 정경세의 관계 사실이 초간본에 모두 수록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문중 부로가 발의하여 정하묵이 12권 6책으로 증보 재편해서 1899년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결과를 보면 이 통문에서 문제라고 지적했던 송준길의 연보는 정상진과 정상이에 의해 보완된 청룡본이라는 연보에 의해 수정 내지는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愚伏集』, 정경세, 한국고전번역원, 201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98년(무술년) 3월 9일, 愚伏 鄭經世의 別集을 간행하면서 그 年譜를 靑龍本에 의거하는데 대해 士林의 의견을 묻기 위해 道會를 개최한다는 것을 玉山書院에 알리는 道南壇所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898년(무술년) 3월 9일, 愚伏 鄭經世의 別集을 간행하면서 그 年譜를 靑龍本에 의거하는데 대해 士林의 의견을 묻기 위해 道會를 개최한다는 것을 玉山書院에 알리는 道南壇所의 通文이다. 이 통문을 발행하게 된 단초는 정경세의 年譜를 처음으로 정리한 同春堂 宋浚吉에서부터 시작된다. 통문에 따르면 그는 정경세의 연보를 정리하면서 西厓의 門下에 크게 의리를 잃은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것은 연보에서 영남의 여러 선배들에 대한 行蹟과 事實을 모두 은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뒷사람들이 모두 이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있어 100여 년 동안 궤짝에 보관하여두고 간행하여 배포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1830년(순조 30)에 江皐 柳尋春(1762~1834), 鶴捿 柳台佐(1763~1837), 芝園 姜世綸(1761~1842), 白下 黃磻老(1766~1840)와 같이 덕망이 높은 원로들이 모두 한결 같이 정경세의 문집에 연보가 없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愚山에서 오고가며 서로 상의해서 정정하였다. 이 일을 맡은 사람은 石坡 鄭象晋(1770~1847)과 制庵 鄭象履(1774~1848) 두 사람으로, 그들은 근본이 되는 학문의 연원과 수수, 말단이라고 하는 서로 주고받은 문자, 당시에 하던 사업과 세운 공로, 그리고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것 등 주워 모으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세세하고 미세한 데까지 미쳐서 완전한 글을 이루어 글자를 새기는 사람에게 맡겼다. 이것이 靑龍本이며, 그렇게 해서 지어진 것이 계속 이어져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경세의 후손이 그의 별집과 연보를 엮으면서 한 조목씩 문제가 된 송준길의 연보를 따랐다. 그러자 河回 柳氏들이 따져 물으며 극단적인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정경세의 후손들은 거듭 오고가며 여러 곳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서 채웠으나 끝내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에 이 통문을 발행한 사람들은 얼마 전에 道南壇所에서 모임을 갖고 예전의 靑龍本에 의거해서 간행하여 배포할 뜻을 밝혔다. 이러한 사실을 의논하기 위해 3월 27일에 屛山書院에서 道會를 개최하기로 정했기에 이렇게 연명한 글을 돌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여러분이 모두 참석하여 서로 의논하여 우리 유학의 큰 일이 사리에 합당한 案으로 확정되게 하여준다면 참으로 다행이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정경세의 문집은 사위인 宋浚吉과 嗣孫인 鄭道應의 주관 하에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草稿를 20권 10책으로 정리 편찬하여 1657년(효종 8)에 道南書院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初刊本에는 序文이나 跋文은 물론이고 다른 附錄文字 등이 전혀 없이 정경세의 詩文만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을 처음 정리한 사람은 陜川의 沈丈이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정밀하고 간략한 것을 위주로 해서 그 분량이 매우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송준길은 鄭道應에게 보낸 편지에서 詩文의 선택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빠진 시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추후에 別集을 간행할 것을 제안하고, 또 穆陵遷葬誌, 習讀墓誌, 宋爾昌墓表, 庚午年 會試策題, 上金招諭啓, 詔使回帖, 奏文, 狀啓 등의 글은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제안에 의해 위의 글들이 原集에 거의 실리게 되었다. 또 그는 간행 이후에도 思問錄이나 養正篇이 실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여 별도로 간행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초간본이 간행된 이후 弘文館과 藝文館의 여러 사람들이 이 가운데 주요 저작을 뽑아 4책 분량으로 별도로 편집해서 "荷渠選英"이란 제목으로 간행해서 돌려가며 읽었다는 기사로 보아 저자의 문집은 당시 널리 유포되었던 듯하다. 하지만 초간본에 빠진 遺文이나 싣지 못한 서․발문과 같은 부록문자들이 많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보완하려는 시도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年譜는 송준길이 1633년부터 초고를 쓰기 시작해서 本集과 政院日記 등을 상고하여 1644년경에 일단락을 지었다. 아울러 行狀도 지어 이를 바탕으로 1658년 宋時烈에게 諡狀을 부탁하고, 趙絅에게 神道碑銘을 부탁하는 등 구색을 갖추었다. 하지만 본 통문에서 말한 것처럼 송준길이 지은 연보는 그가 기호학파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영남 사람들의 오해인지 영남의 여러 선배들에 대한 행적과 사실을 은폐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 뒤 후손鄭象晋鄭象履鄭宗魯의 유지를 따라 연보와 부록을 포함한 별집을 8권 4책으로 편찬하여 1821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것이 본 통문에서 주워 모으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세세하고 미세한 데까지 미쳐서 완전한 글이라고 하는 청룡본이다. 그 내용을 보면 別集의 권1~3은 원집을 간행할 당시에 빠진 詩文, 思問錄과 養正篇, 經筵日記이며, 권4~5는 年譜이고, 권6~8은 묘지와 신도비명, 행장 등의 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1844愚山書院에서 原集을 목판으로 중간하였다. 이때 초간본과 내용이나 편차의 차이가 전혀 없이 板式의 형태만 바꾸어서 간행하였다. 이 중간본에는 "崇禎紀元後四甲辰愚山書院重刊"이란 刊記가 실려 있다. 그리고 別集의 重刊은 앞서 말한 것처럼 정경세의 관계 사실이 초간본에 모두 수록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門中 父老가 발의하여 鄭夏默이 12권 6책으로 增補 再編해서 1899년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본 통문은 바로 별집의 중간과 관계되는 것이다. 鄭夏默이 쓴 별집 중간본의 발문에 따르면 이 계획은 1896년부터 시작되었다. 별집의 초간에서 빠진 諡狀과 墓表, 그리고 言行錄을 증보하고, 2권 분량의 少字雙行으로 되어 있던 年譜는 약간의 사항을 추가한 뒤 大字로 바꾸어 4권으로 재편하였다. 그리고 원집과 별집 초간에서 누락되었던 詩文 3책은 그대로 집안에 보관해 두고 수록하지 않아 결국 부록 부분만을 증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결과를 보면 이 통문에서 문제라고 지적했던 송준길의 연보는 정상진과 정상이에 의해 보완된 청룡본이라는 연보에 의해 수정 내지는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정경세의 별집을 중간하면서 그 관계자들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제안들이 있었고, 어떤 과정들을 거쳤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통문은 지금 존재하는 정경세의 별집 중간본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愚伏集』, 정경세, 한국고전번역원, 201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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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惟我 愚伏鄭先生年譜曾有宋同春所撰草本而第其中 厓門稱謂之大失義例吾嶺諸先輩行蹟事實之全沒纂錄不能
無後人之惑故百許年來藏弆篋笥莫或刋布矣粤在 純廟庚寅鄕道內諸長德有若江皐鶴樓柳公芝園姜公白下黃公咸一辭以爲愚爺之集不可
無譜綸年之譜不可闕略故往復商訂於愚山石坡制庵二公凡係淵源承受之本文字酬接之末與夫日事時功用爲世範者罔不採摭纖悉克成完書以付諸剞劂氏此
靑龍之本所由作也式至今日 愚爺後孫謀錄先生別集而年譜 一款一從同春草本故河上柳氏詰問因由極言其如何未安之端往復再四只得數處塡補而終是
不厭人意生等玆有日前道壇之會而以昔年靑龍本刊布之意用今月二十七日定道會于屛山書院散此聯章奉告伏願 僉君子濟濟來臨商確停當俾敦斯
文大事之地千萬幸甚
右文通
玉山 書院
戊戌三月九日道南壇所一有司前縣監柳道奭
有司幼學 洪道燮
李時健
公事員幼學姜萬熙
都事盧輿敬
幼學孫芝秀
李時響
曹司幼學 金昌鎭
李載輝
宋鎭星
申鉉郁
製通幼學 金圭鎬
李時佐
金永培
高{氵+奭}
寫通幼學 李時萬
趙鐘黃
姜國熙
孫燁
會員幼學高彦宏
郡守柳寅睦
幼學琴錫崙
全世麟
柳定祚
柳道斌
魚命周
金麟錫
權學默
孫永海
柳欽睦
柳畯睦
金昌龍
柳禎睦
柳昌植
柳宣睦
李起渤
柳道蓍
柳述睦
柳勳睦
柳泰佑
柳昌睦
柳道燮
趙尙衍
柳潤植
趙晉衍
柳潢榮
柳敎榮
柳萬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