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乙亥年) 2월, 괴한에게 몸이 더렵혀지자 자결하여 貞節을 지킨 趙性達의 딸을 포상하고, 그 몸을 더럽힌 괴한 林致寬을 처벌하는데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며 靑松鄕校의 會中에서 玉山書院에 보내온 通文
내용 및 특징
1875년(乙亥年) 2월, 괴한에게 몸이 더렵혀지자 자결하여 貞節을 지킨 趙性達의 딸을 포상하고, 그 몸을 더럽힌 괴한 林致寬을 처벌하는데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며 靑松鄕校의 會中에서 玉山書院에 보내온 通文이다.
이 통문은 貞烈을 포상해야 사람의 紀綱이 확립되고, 기강을 바로잡고 명분을 바르게 해야 세상에 道理를 심을 수 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는 본 통문을 보내온 靑松에서 趙性達의 딸이 문란해진 기강으로 변을 당해 자결한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조낭자는 얼굴이 아름답고 성격이 독실하여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행동이 조용하고 단정하여 문밖을 나가지 않아 친족들조차도 얼굴을 드물게 볼 정도였다. 그런데 조낭자의 나이가 17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 겨울 어머니가 돌림병에 걸리고 말았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조금 차도를 보이자 한 명 있던 오빠가 멀리 출타하여 집에는 남자가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 또 통증이 더해져 막내딸이 탕약을 끓이고, 조낭자와 한 사람의 계집종은 産苦를 겪고 있는 올케언니를 돌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흉악한 도적이 갑자기 그 집안에 들어와 조낭자의 손을 잡고 입을 틀어막는 짓을 저질렀다. 계집종이 놀라 도망을 가다보니, 文居驛의 驛卒인 林致寬이라는 자였다. 이때 임산부인 올케언니는 기함을 하고, 계집종은 혼이 나갔다. 조낭자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어머니에게로 가서 병을 구완하고, 고비를 넘기기를 기다렸다가 좋은 말로 위로하여 마음을 풀어드렸다. 그리고서 낭자는 가슴에 칼을 품고 宗宅에 들어가서 어른에게 말하기를, "어머니의 병은 이미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돌아올 기약이 없습니다. 저의 실낱같은 생명을 어찌 구차하게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아버지의 빈소가 마련된 방에 들어가 목을 매어 죽었다.
고을의 수령이 변고의 소식을 듣고 나아가 자세히 조사를 하고는 조낭자의 정렬에 찬탄을 하였다. 그리고 監營에 올리는 보고에 "옛 역사에서 찾아보아도 많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낭자의 시신을 매장하려고 관을 열어보니 그 사이 1달이 족히 넘었음에도 그 얼굴빛이 살아있는 것 같았으며, 가족들이 감은 눈을 보자 눈을 또렷이 하고는 원수를 갚는 것이 지체됨을 꾸짖는 것 같았다. 한방에 있던 사람들의 넋을 잃은 광경이 참담하였다. 그래서 본 통문은 이것이 정렬의 혼백이 하늘과 땅 사이에 지극한 원한을 맺어놓은 것이 아니겠느냐며 탄식했다.
한편 조낭자에게 몹쓸 짓을 한 자는 變故가 생기던 날에 낭자의 친척들이 붙잡아 포박을 하고 관청에 송치하려 했다. 그러자 그의 종조부인 遠文이라는 자와 형인 從業이라는 자가 무리들을 모아서 兩班들을 구타하고, 옷을 찢으며 결박을 풀어주고 도망치게 했다. 원문이라는 자는 평소에 사납고 악한 짓을 하면서 부유한 것을 믿고 수령과 사귀고, 지방 관아의 관리들과 혼인을 맺고는 선량한 사람들을 구렁텅이에 빠트리기를 능사로 하고, 士大夫들을 凌辱하기를 長技로 하여 재앙을 떠넘기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자였다. 그래서 온 마을 사람들이 그를 죽여야 하며 나이 70세가 넘어도 악행이 더욱 심한 흉악한 도적이라고 하였다. 또한 文居驛에는 사나운 백성들이 무수히 많은데, 모두가 같은 악행을 저지르며 서로 도와주기 때문에 아무도 흉악한 도적을 체포할 수 없었다. 그래서 營門에서는 도망한 자를 체포하기 위해 東都의 鎭營에 엄히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체포할 기약이 없어 원한을 갚는 것이 미루어지니 가슴이 더욱 아프다고 했다.
이 통문은 사건의 대략적은 내용을 이렇게 기술한 후에 조낭자의 家系며, 소위 三大節이라고 하는 충신․효자․열녀을 선양하고 포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의 타고난 선한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니, 이 사건을 그 집안사람들에게만 맡기지 말고 도내의 여러분들이 한목소리로 호응하여 흉악한 도적을 처벌하고 탁월한 정절을 보인 조낭자를 포상하고 알려 모든 곳에 세상의 도리를 심고, 영원토록 사람의 기강을 세울 수 있도록 해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은 도적으로부터 욕을 당해 자결하여 정절을 지킨 처녀의 높은 기개를 선양하고 포상하자는 내용의 것이다. 조선은 유교를 이념으로 건국된 나라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강조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조선후기에 간행된 大典通編에 따르면, 孝行과 烈行이 旌閭와 復戶에 부합되는 자는 모든 道에서 뽑아서 보고하고, 式年(3년)의 年初마다 禮曹의 세 堂上이 모여 상세히 살피고, 이를 다시 議政府로 이첩하여 별단으로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선발된 사람들은 관직이나 물건을 賞으로 주고, 더욱 뛰어난 자는 旌門을 내려 받고 세금을 면제받는 復戶의 혜택을 누렸다. 그리고 妻로서 절개를 지킨 烈女의 경우는 항상 復戶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국가로부터 복호의 특혜를 받거나 효자나 열녀로 공인받기까지 지역사회의 광범위한 지지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역사회의 광범위한 지지도 사회적 지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명확한 행적이 드러나는 충신과는 달리 효자나 열녀는 그 행적을 국가에서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효자나 열녀의 행적은 다른 사람들의 公議에 의해 인정되고, 그들의 추천에 의해 파악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효자나 열녀는 지역 士林의 公論에 의해 추천되어 해당 고을의 수령이 받아서 이를 각 道의 관찰사가 수합하여 禮曹에 올렸다. 그 과정이 이러하다 보니 지역사회에서 公議를 얻지 못하면 아무리 그 행적이 뚜렷하다 해도 효자나 열녀로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효자나 열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들을 배출한 집안이 지역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거나, 여타 士族들과의 폭넓은 교유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야만 가능했다. 이 통문의 말미에 조낭자의 先祖들 중에는 고려 말에 지조를 지킨 琴隱 趙悅과 生六臣 중의 한 사람인 漁溪 趙旅를 비롯해 13명의 忠臣과 7~8명의 賢人이 있었다고 그 家系를 특별히 강조한 것은 이러한 일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향촌사회에서 이러한 효자나 열녀들을 찾아 널리 알리고 중앙에 보고하여 旌表하도록 하게 하는 일은 대개 鄕校나 書院에서 하였다. 이 두 기관에서 사림의 공의를 모으거나 확인한 후 그러한 내용을 수령에게 넘기면, 수령이 이를 감사에게 천거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도 靑松鄕校가 주동이 되어 그 지역의 여론을 조성하고, 나아가 도내 전역의 公議를 얻기 위해 이런 통문을 돌린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두 기관은 유교의 이념을 전파하는 것은 물론 이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기본적으로 조선후기 절개를 지킨 처녀의 정렬을 선양하고 포상하여 유교의 이념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통문은 그 과정을 기술하면서 역참을 둘러싼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통문은 단순히 유교적 이념을 강화하려는 정려와 관련된 통문이 아니라, 그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2
「조선시대 대구지역의 효자.열녀」 『사학연구』 제63호, 박주, 한국사학회, 2001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