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년(壬寅年) 11월 15일, 『退溪集』을 重刊하는데 있어 여러 가지 의논할 일들이 있어 오는 1월 30일에 玉山書院에서 모임을 개최함을 알려온 鳳停會中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842년(壬寅年) 11월 15일, 『退溪集』을 重刊하는데 있어 여러 가지 의논할 일들이 있어 오는 1월 30일에 玉山書院에서 모임을 개최함을 알려온 鳳停會中의 通文이다.
이 통문은 먼저 퇴계집의 중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일은 유학의 성쇠와 관계되는 일로 단순히 사람의 지혜로써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퇴계집의 간행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어려운 일인가를 지적하였다. 그렇지만 선배들이 가르침을 넓히려는 뜻을 체득하고 후학들에게 은택의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이 우리 무리들의 책무가 아니겠느냐며 퇴계집을 간행해야 할 당위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 정유년, 즉 1837년 봄에 처음으로 이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여 이미 도내의 여러 군자들에게 보고를 했지만, 아직까지 한마디 어떻게 하라는 말을 듣지 못했고, 일이 진척되어가는 상황도 알지 못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렇게 된 것은 서로 간의 일이 걸음을 잘못 내디뎌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기약이 없이 시작한 일이어서 분발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며 그 간의 진행을 되짚어나갔다.
이 통문에 따르면 지난 4~5년간 안동과 예안의 가까운 고을에 있는 화서의 봉정사에 장소를 정하고 새로운 목판을 모으고 간행할 원본을 옮겨 정리했다고 한다. 그런데 30권 2,200여 개의 목판을 간행하는 일은 한 지방의 사림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러 사람들의 의견으로는 기술자를 모아 일을 시작하게 되면 한 도가 저절로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봄이 되면 목판에 기재하기로 결단을 하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멀고 가까운 사림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의논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12월 15일에 진양의 덕산에서 한번 모이고, 25일에 다시 안동의 향교에서 모였다가, 오는 1월 30일에 옥산서원에서 모이기로 정하고 사람을 보내 그곳의 유생들로부터 일의 실마리가 될 계책을 듣고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옥산서원에서 먼저 인근의 여러 고을에 통보하여 함께한 자리에서 충분히 의논하여 일을 끝마칠 수 있는 바탕을 기약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다행이 없겠다며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은 지금까지 간행된 퇴계의 문집을 보면 1843년에 간행될 퇴계집을 앞두고 일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발행된 통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퇴계의 문집을 중간하려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최초로 퇴계의 문집을 간행하려고 시도한 것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1571년(선조 4)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月川 趙穆을 중심으로 한 그의 제자들이 易東書院에 모여 遺文을 정리하는 한편, 각처에 있던 제자들은 각자 정리한 초고를 역동서원으로 보내왔다. 그리고 柳成龍의 요청에 따라 宣祖는 『退溪集』을 校書館에서 간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따라 퇴계의 손자인 李安道가 어느 정도 정리된 草稿를 가지고 서울로 왔으며, 이 원고를 가지고 유성룡을 중심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제자들이 임금에게 볼일 수 있도록 編輯과 校正, 그리고 淨書 작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원고는 여러 가지 이유로 완성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임금이 열람할 계획도 무산되었다.
이후 그 원고는 禮安에 거주하던 조목의 주도로 편집이 이루어지고 여러 사람의 교정을 거쳐 1584년(선조 17)에 『退溪先生文集』이라는 이름의 草本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 초본에는 퇴계의 모든 저작이 수록되었는데, 심지어 손으로 쓴 詩稿 중에 퇴계가 잘라낸 부분도 別集 등으로 편입시켜 놓았다. 이렇게 다소 체계적이지 못한 초본은 수차례의 회합을 거치면서 여러 의견들을 조정하여 1588년(선조 21)에 中草本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己丑獄事와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으로 간행 작업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것이 간행된 것은 1600년(선조 33)으로 陶山書院에서 조목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까닭에 이때 간행된 것은 유성룡의 견해를 받아들여 刪絶을 거친 중초본이 아니라, 조목 자신이 편집한 초본이었다. 이것이 초간본인 庚子本이다. 이에 유성룡은 改刊을 의논하며 실제로 그의 제자인 鄭經世가 교정을 하기도 했지만 간행에 이르지는 못했다.
경자본 이후에 간행된 본집은 모두 도산서원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으며, 그 계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경자본에서 발견된 오류를 교정하여 그 부분만을 다시 파거나, 교정이 어느 정도 완료된 후 전체를 다시 판각한 庚子本類이다. 다른 하나는 重刊本類로 이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이른바 ‘中本’과 1724년(경종 4)의 甲辰本, 그리고 1843년(헌종 9)의 癸卯本이다. 먼저 ‘중본’은 그 판본의 존재에 대해서만 언급하였을 뿐 그 간행의 시기나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그 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갑진본은 경자본의 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은 본으로서 처음으로 頭註가 보태어져 판각되었다. 마지막으로 계묘본은 영남의 전체 士林이 완정한 본을 만들기 위해 교정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한 것이다. 그 결과 실제로 문집도 이전의 것들에 비해 일신되었다. 이 계묘본은 갑진본처럼 두주가 보태어져 판각되었으며, 전체적으로 板式이 엄격하고 글자체도 똑똑하고 발라서 당시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 통문이 발행되고 난 이듬해인 1843년에 �퇴계집 계묘본이 간행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이 통문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다른 통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퇴계집의 중간은 1837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성향교에서 비용을 배분하기 위한 도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의 통문을 1840년 3월 16일 봉정회소의 이름으로 옥산서원에 보냈다. 그리고 1841년 2월 8일에는 퇴계집�의 간행을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을 위한 모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安東鄕會所의 이름으로 옥산서원에 보내졌다. 이처럼 영남의 사림들은 �퇴계집 계묘본의 간행을 위해 수시로 모여 의논하며 서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계묘본은 그 이전의 도산집들과 비교했었을 때 일신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계묘본 퇴계집은 영남 사림의 개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퇴계집 계묘본이 간행되기 직전에 발행된 것이다. 그래서 이 통문은 이의 간행을 앞두고 사림의 움직임과 저간의 사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통문은 퇴계집 계묘본의 간행과 관련된 사실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책판 제작의 사회․문화적 의의」 『대동문화연구』 제70집, 유준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