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임진년) 9월 28일, 辛耆穆 외 21명이 楓皐 金祖淳을 配享하는 시설의 건립을 촉구하며 玉山書院을 비롯한 경주 일원의 4개 서원에 보내온 通文
내용 및 특징
1832년(임진년) 9월 28일, 辛耆穆 외 21명이 楓皐 金祖淳을 配享하는 시설의 건립을 촉구하며 玉山書院을 비롯한 경주 일원의 4개 서원에 보내온 通文이다.
이 통문의 서두는 옛날의 법을 상고해보면 나라에 공로가 있으면 제사를 지내고, 백성에게 이로움과 혜택을 입힌 것이 있으면 제사한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한 사례로 上代에는 물과 흙을 잘 다스려 后土의 神이 된 句龍과 周나라에서 農官으로 곡식을 주관하다 神이 된 棄가 社稷에 배향되고, 後代에는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忠武侯 諸葛亮의 廟宇를 건립한 것이 있는데, 이는 모두가 은혜에 대한 예의로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통문에서 이러한 사례에 해당하는 인물로 제시한 것이 바로 楓皐 金祖淳(1765~1832)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김조순은 崧嶽의 精氣를 타고나 나라의 기둥이 되는 중책을 맡아 30년 동안 임금을 보좌하여 온 나라의 백성들을 盤石이나 泰山과 같이 안정된 기반 위에 서도록 도와준 것은 분명하기가 은하에 별이 빛나고 하늘에 해가 밝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화려한 문장과 걸출한 인재를 깃들게 함은 쇠퇴해가는 세상을 크게 떨치게 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김조순이 사람들에게 베푼 은혜가 한량이 없으니, 그것을 句龍과 棄의 업적에 비추어보아도 경중을 따질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宮中과 府中이 일체가 되도록 20년 동안 어려운 상황에서 근심하고 두려워했던 충성심은 어질고 선한 업적과 학문을 두드러지게 했다고 하였다.
김조순의 업적과 학문이 이와 같으니, 제갈량이 묻힌 沔陽의 定軍山에 祠堂이 세워진 것과 같이 畿內의 선비들의 의론이 빗발치듯 일어나 김조순이 묻힌 곳에 건물을 세워 배향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먼저 얻은 것이며, 떳떳한 것을 좋아하는 타고난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또한 경주는 金氏가 처음으로 생겨난 고장이니, 이렇게 하는 것은 음악이 자기의 근본을 기쁘게 여기고, 禮가 그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이라는 말에 합당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고장인 경주에서부터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사실을 고하니, 여러분들도 같이 의논하여 김조순을 높이고 보답하는 의식에 협조하고 찬동해준다면 참으로 다행이겠다는 말로 이 통문의 끝을 맺었다.
김조순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純祖의 장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1785년(정조 9)에 불과 21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자 정조는 ‘文正肖孫’이 등과했다고 기뻐하며 ‘洛淳’이라는 이름 ‘祖淳’으로 바꾸고 ‘楓皐’라는 號까지 지어주었다. 그런 그가 抄啓文臣으로 발탁되어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지방의 수령․찰방 중에 兼史 1명을 두어 그 지방의 민요와 풍속을 채록해 時政記를 수록하자는 의견을 내어 실시하도록 하였다. 1788년(정조 12)에는 규장각 待敎 때 당시 時派와 僻派의 싸움에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없앨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또한 宣惠廳 提調가 되었을 때는 수효가 적은 친위병을 철폐된 壯勇營의 군사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827년(순조 27) 왕의 관서지방 행차를 호종하다가 西下 지방의 민간 실정을 은밀하게 보고해, 京外 각 아문의 折米․刑政․人事․대동미 등 어려운 실정을 정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문장력으로 초계문신이 되어 비명, 지문, 시책문, 옥책문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가 한때 패관소품문을 수용하여 정조의 견책을 받아 그에 순응하면서도 창신적 시풍을 통하여 의고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 통문의 서두에 나라에 공로가 있고, 백성에게 이로움과 혜택을 준 사람에게 제사를 드린다고 한 것은 바로 김조순의 이러한 행적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통문은 봉투가 남아 있지 않아 발행의 주체가 뚜렷하지 않다. 다만 내용상으로 보면 경주 府內의 士林이 이 일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왜 이 시점에서 김조순의 제향시설을 건립해야 한다고 나선 것인지 그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통문에서 경주는 金氏가 처음 생겨난 곳이라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많은 자금이 들어가는 제향시설을 건립해야 할 만큼 타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이 통문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자 노론 집안의 출신으로 당대 세도정권의 실세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당시 경주지역의 新出老論들이 이 통문의 배후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의도처럼 김조순의 제향시설이 경주에 건립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세력이 사림 전체의 여론을 주도할 만큼 압도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경주에 풍고 김조순의 제향시설을 건립하자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는 경주에 어떤 연고가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안이 있었다는 것은 김조순이라는 당대의 실세와 연관된 사람들이 경주의 사림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연관이란 정치적으로 같은 노선을 걷는 노론의 세력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 통문은 김조순의 제향시설을 건립하자는 외형적인 의미보다는 당시 경주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신출노론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풍고 김조순 연구」 『한국문화』 제19집, 유봉학,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1997
『驪州李氏族譜』,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