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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절의사적(崇禎節義事蹟)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7+KSM-WZ.0000.4717-20150630.y15102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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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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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개인-생활-비망기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형태사항 크기: 17 X 20.5
판본: 고서
장정: 선장
수량: 4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주진 전주류씨 삼산종가 / 경상북도 안동시 수곡면 문중소개
현소장처: 안동 주진 전주류씨 삼산종가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안내정보

숭정절의사적(崇禎節義事蹟)
"숭정절의사적"이라는 표제의 소책자는 전주유씨 수곡파에서 후금이 정묘년병자년에 조선을 침범했을 때 화의를 반대하고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며 이를 직간접으로 실천에 옮긴 네 분의 선조, 즉 유우잠, 유직, 유직, 유인배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들을 서술하는 방식은 먼저 가계를 기술하고, 이어서 행장, 묘갈, 만사, 문집의 후서 등을 통해 행적을 소개하거나 그들이 지은 시를 통해 당시 비분강개하던 그들의 심정을 나타내고, 마지막으로 후손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도헌 유우잠정묘년에 북쪽 오랑캐가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강도에서 삼남의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이어 오랑캐와 화의를 했다는 사실에 굴욕을 느끼고 과거공부까지 접고 은둔하여 지내며 세상을 마쳤다. 그가 자신의 호를 도헌이라고 지은 것도 절의로 이름 높은 도연명을 따르려는 것 때문이었다. 유우잠의 아들인 백졸암 유직 역시 같은 행적을 보였다. 유직경오년(1630)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병자년(1636) 임금이 오랑캐와 화친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산에 은거하여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유직이 기산에 은거할 때 그의 쌍둥이 동생 또한 형과 함께 은거하였다. 그리고 유인배병자년에 오랑캐와 화친을 한 것을 본 이후에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가족을 이끌고 원곡의 깊은 산속에 들어가 30여 년을 마음을 갈고닦는데 받쳤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숭정절의사적"이라는 소책자가 꾸며진 시기는 이 속에 언급된 후손들의 생년을 볼 때 영정조 때인 18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책자를 만든 목적은 집안의 전통을 확고히 하는 것과 이를 통해 집안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전주유씨 수곡파가 안동에 터전을 마련한 계기는 16세기 중반 유성이 청계 김진의 사위가 되고, 장인으로부터 수곡 일대의 토지를 분급 받으면서부터였다. 그러나 혼인 당시에는 사환을 하고 있던 관료이거나, 그렇다고 지역의 토호도 아닌 그저 작은 사족에 지나지 않았던 수곡리의 전주유씨는 임진왜란으로 안동에서 유력한 가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것은 유복기·복립 형제와 유복기의 아들 5형제가 모두 의병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단순한 참전이 아니라 멸문을 각오한 결단이자 용기였으며, 이것이 사람들을 마음으로부터 감동케 했던 것이었다. "숭정절의사적"이라는 책자는 그와 같은 전통이 이후에도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주유씨 안동 입향조인 유성으로부터 3~4세대가 지난 18세기 중반이 되면 수곡파는 종가를 중심으로 인근지역으로 분파해 가며 지역적 활동기반을 넓혀가는 시기였다. 이처럼 자손이 번성하면서 혈족간의 유대를 강화할 필요성이 있었다. "숭정절의사적"은 선조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이를 통해 혈족간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책자의 편집자는 추정컨대 삼산 유정원(1702~1761)일 가능성이 높다. 유정원은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유정원은 임종 무렵 족제인 강포 유홍원을 불러 「장중승전후서」를 읽게 하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 ‘남아사이 불가위불의굴(男兒死耳 不可爲不義屈)’이라는 대목에 이르자, "나는 평생 이 서문을 즐겨 읽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 와서는 무릎을 치고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 너를 시켜 읽히고 들으니 가슴이 시원하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유정원이 "숭정절의사적"의 직접적인 편찬자가 아니라면 적어도 편찬하도록 지시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의병장 기념공원(충의사-가칭) 조성 타당성 조사 수립 용역 보고서』, 안동시, 안동시, 2011
「全州柳氏 水谷派 家學의 形成과 展開」, 柳榮洙, 경북대학교 대학원, 2008
『水柳誌』, 柳東晠 編著, 평화보문사, 1992
『柳氏上代文獻』, 柳正基 譯著, 水柳文獻刊行會, 198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全州柳氏 水谷派 가운데 정묘년과 병자년에 있은 오랑캐의 침입 때 斥和를 주장하며 節義를 지킨 柳友潛, 柳㮨, 柳㮋, 柳仁培의 행적을 모아놓은 소책자
내용 및 특징
이 소책자의 내용과 특징은 "崇禎節義事蹟"이라는 표제가 이미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崇禎은 明나라 마지막 황제인 思宗의 연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것을 연호로 사용한다는 것은 明나라에 대한 존숭의 뜻과 함께 그를 멸망시킨 後金, 즉 淸나라에 대한 반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後金이 정묘년병자년에 朝鮮을 침범했을 때 화의를 반대하고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한 행동은 곧 節義가 된다. 이 같은 사실을 종합하면 이 책자는 全州柳氏 水谷派 가운데 그 당시에 이러한 행동을 보인 선조들의 일을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자에서 소개하는 全州柳氏 水谷派의 인물로는 柳友潛, 柳㮨, 柳㮨, 柳仁培 네 사람이다. 이들을 서술하는 방식은 먼저 家系를 기술하고, 이어서 行狀, 墓碣, 輓詞, 文集의 後敍 등을 통해 행적을 소개하거나 그들이 지은 詩를 통해 당시 비분강개하던 그들의 심정을 나타내고, 마지막으로 후손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자에 따르면 먼저 陶軒 柳友潛丁卯年에 북쪽 오랑캐가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江都에서 三南의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이어 오랑캐에 굴복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리나라는 모두가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게 되었구나!"라고 탄식했다. 이후 柳友潛는 과거공부를 접고 은둔하여 지내며 세상을 마쳤다. 그가 자신의 호를 陶軒이라고 한 것 또한 절의로 이름 높은 陶淵明을 따르려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었다. 다음으로 百拙庵 柳㮨庚午年(1630)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丙子年(1636) 임금이 오랑캐와 화친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생인 柳㮋과 함께 岐山에 은거하여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 후 柳㮨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생도들을 가르쳤는데 그 문하에서 한꺼번에 유명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林皐 柳㮋柳㮨의 쌍둥이 동생으로 그 재주와 기질이 형과 같았다. 그래서 형이 岐山에 은거하려 할 때 기꺼이 뜻을 같이할 수 있었다. 형이 쓴 동생의 제문에 따르면 柳㮋은 가난한 처지를 어렵게 여기지 않고 학문에 힘써 옛 것을 널리 익히고 지금의 것에 통달하고, 문장의 기예가 확고하여 입신양명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한다. 끝으로 猿溪 柳仁培는 14세에 敬堂 張興孝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아 학문하는 바른 자세로 이름을 떨쳤다. 병자년에 오랑캐와 화친을 한 것을 본 이후에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가족을 이끌고 猿谷의 깊은 산속에 들어가 30여 년을 마음을 갈고닦는데 받쳤다. 柳仁培는 산속의 생활에서 사물과 감응하여 읊은 詩로 유명하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崇禎節義事蹟"이라는 소책자가 꾸며진 시기는 英正祖 때인 18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이 책자에 소개된 네 사람의 후손으로 거론된 사람들의 생년이 거의 모두 英祖 때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자를 만든 목적은 두 가지로 추정된다. 하나는 집안의 전통을 확고히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통해 집안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全州柳氏 水谷派가 안동에 터전을 마련한 계기는 16세기 중반 柳城가 靑溪 金璡의 사위가 되면서부터였다. 즉 영주에 거주하던 柳城는 혼인을 계기로 안동으로 옮겨오고, 그와 함께 金璡로부터 水谷 일대의 토지를 분급 받아 세거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혼인에 이어 지역사회로부터 유력한 가문으로 인정받는 것은 임진왜란에서의 의병활동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당시만 해도 水谷里全州柳氏는 仕宦을 하고 있던 관료도 아니었고, 지역의 土豪도 아닌 그저 작은 士族으로 안동에 거주한 지 30여 년에 지나지 않는 가문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柳復起·復立 형제와 柳復起의 아들 5형제(友潛, 得潛, 知潛, 守潛, 宜潛)가 모두 의병에 가담하였다. 이는 단순한 참전이 아니라 멸문을 각오한 결단이자 용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결단과 용기가 사람들을 마음으로부터 감동케 하였고, 그래서 안동이라는 지역사회에서 全州柳氏 水谷派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들어주었다. "崇禎節義事蹟"이라는 책자는 그와 같은 전통이 이후에도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집안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이러한 노력이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수많은 독립지사를 배출한 근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全州柳氏 안동 입향조인 柳城는 아들 둘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長子인 柳復起가 6명의 아들을 두고, 그 長孫인 柳友潛만해도 5명의 아들을 두는 등 자손이 날로 번성하였다. 그래서 18세기 중반이 되는 수곡파의 3~4세대에 이르면 종가를 중심으로 인근지역으로 분파해 가며 지역적 활동기반을 넓혀가는 시기였다. 이처럼 자손이 번성한다는 것은 가문의 세력이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결속이 해이해질 수 있다는 염려도 있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崇禎節義事蹟"을 만들어낸 것은 선조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이를 통해 혈족간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소책자의 편집자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만들어진 시기와 만든 사람의 기질적 특성을 고려할 때 편집자는 三山 柳正源(1702~1761)일 가능성이 높다. 유정원은 특별히 ‘義’를 중요시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柳正源는 임종 무렵 族弟인 江浦 柳弘源을 불러 「張中丞傳後敍」를 읽게 하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 ‘男兒死耳 不可爲不義屈’이라는 대목에 이르자, "나는 평생 이 敍를 즐겨 읽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 와서는 무릎을 치고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 너를 시켜 읽히고 들으니 가슴이 시원하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유정원이 "崇禎節義事蹟"의 직접적인 편찬자가 아니라면 적어도 편찬하도록 지시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적 가치]
"숭정절의사적"이란 소책자는 전주유씨 수곡파의 선조들 가운데 후금의 침공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한 사람들의 행적을 行狀, 墓碣, 輓詞, 文集의 後敍 등에서 발췌하여 모아놓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면 이 소책자는 사료적 가치는 크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책자가 한 시대의 사건에 공통적으로 보인 선조들의 행적을 모아놓았다는 것은 이것을 통해 집안의 전통을 확고히 하는 것과 동시에 그 전통을 통해 집안을 결속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책자는 조선후기에 명문가에서 집안의 결속을 위해 어떠한 시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의병장 기념공원(충의사-가칭) 조성 타당성 조사 수립 용역 보고서』, 안동시, 안동시, 2011
「全州柳氏 水谷派 家學의 形成과 展開」, 柳榮洙, 경북대학교 대학원, 2008
『水柳誌』, 柳東晠 編著, 평화보문사, 1992
『柳氏上代文獻』, 柳正基 譯著, 水柳文獻刊行會, 198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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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崇禎節義事蹟
陶軒公事蹟改正
行略 公字尙之 全州人 六代祖義孫 世宗
賢殿直提學 世祖朝 退休不仕 高祖軾
弘文館典翰 考復起號岐峰 以壬辰倡
義功 贈禮賓寺正公生卒皆乙亥 以學行
見重儒林 丁卯北虜入寇大駕 幸江都
三南義兵方起 而竟爲和議所誤 公歎
曰 吾東其盡爲左袵矣有詩曰西望江都路沾
衣戀聖明空憂宋地削 其奈杞天傾衰鬢
年年換 確心夜夜驚男兒當此日 洪業竟誰
成又與人書曰 西聲許多機事 卷入所一和
字 豈有可問者耶 自足不復應擧 隱遁
以終世號陶軒盖自托於陶靖節焉 猿溪
處士柳仁培 以詩哭之曰 與爲害德民 寧
作崇禎鬼 樂彼白雲鄕 猶全應天地葬
之日士林會者 數百人 臨中善明處士之字
二子稷椰丙子後 亦擧廢隱居
柳友潛
字尙之全州人 我世宗集賢殿直提
學義孫之後 弘文館典翰軾之玄孫 以孝
友著於鄕里 天啓丁卯聞江都和議成 有詩
曰 西望江都路 沾衣戀聖明 空憂宋地削
其奈祀天傾 衰鬢年年換 確心夜夜驚 男
兒當此曰 洪業竟誰成又與人書曰西聲許
多機事 卷入於一和字 豈有可問者耶 自是
不應擧 隱遁以終歲 號陶軒盖自托於
陶靖節云 有文集
柳㮨
字庭堅全州人 號百拙翁 中庚午進士 潛
心性理之學 敎授生徒 一時名士多出其門
丙子聞大駕出城 慷慨流涕 與弟㮋同
隱于岐山 不復應擧
其感吟詩曰 三十過來已作翁 鬢毛渾白亂
離中 空揮危涕瞻天北 欲挽明河洗海東 三
月春光供美景 一年花信怕狂風 無人送酒
寬愁絶 獨倚層欄思不窮
贈人詩曰 歷代戰爭地 豈曾今日如 鯨奔
欲呑海 二字缺反爲魚 忍見周正革 誰能晉甲
書 遍寰腥穢氣 無處寄吾廬
贈別金尙憲斥和北行詩曰 忠義堂堂是
秉常 此行何必淚沾裳 遙知大窖留餘
雪 更入三韓烈士膓
金燾惠新曆詩曰 紀元誰復奉周正
書甲猶存向晋誠 多謝故人持贈地 並題
佳句勗相思
謝人惠毛冠詩曰 忽見唐毛㡌 追思漢日
儀 童顔着自暖 破笠脫如遺 好是梅邊
亞 從他醉後欹 懷人因物感 不待勗相思
偶題詩曰 虎據函關欲倂呑 六王冠盖
會盟洹 如何從約排秦日 不爲東周發一言
墓碣略曰 沉涵乎古聖賢之書 而尤深
宋儒性理旨 喜訓進後生 礲磨道義 出
其門者多聞士 恥國家與北虜媾 往往文
詞泄悲憤云 大司成丁範祖
文集後敍略曰 丙子後所著詩文 皆出於
激昻悲憤 以寓匪風下泉之思 後之讀是
集者 冝亦有感於斯云 從立孫叅奉柳道源
世系
七代祖義孫 我世宗集賢殿直提學

朝退休不仕 五代祖軾 弘文館典翰
復起以壬辰倡義功 贈禮賓寺正 後以孫
榰貴 贈左承旨友潛丁卯講和後 廢擧自靖
子孫
五代孫朋來 六代孫日文宅文璧文渭文
柳㮋
字庭美號林皐 與兄稷雙胎生 其才調氣
節 亦如之 丙子後兄弟廢擧同隱時 謂之
昆玉季 兄㮨祭文曰 固窮讀書 博古通今
文翰確驁 立掦可期 時事翻覆 文物非古
守拙丘園 我分是安 抱素志而 靡抒 終與
世而長辭
子孫
六代孫奎文思文
柳仁培
全州人 字德栽號褤溪 後以孫宗澤壽老至
左承旨 行狀略曰 資稟明秀 容貌端嚴
十四受業于張敬堂興孝之門 得聞爲學
之方 崇禎以後 廢擧子業 携家入山 優
游養閑 三十年餘云 兄子掌令經立撰
文集跋曰 猿溪柳公 以崇禎處士 淸修固窮於
猿谷深山之中 感物遣懷 輒發之於詩之之
別提李光靖
平居多感慨之作 其賞樂郊詩曰天秘名區
待此翁樂郊幽勝卽壺中憂君敢擬杜望
北避世還如魯蹈東溪村正合碩人軸民
物猶餘太古風莫道眞城煩賦役西山藢
蕨可賙窮
十載風塵老此身迷途一杖欲何臻天
高北極空懷漢地近東溟可避秦樂彼
郊園雖得所傷今時事控誰因傍人不識
憂虞意謾謂求田爲獻貧
哭族兄柳陶軒友潛詩曰 與爲崇德民 寧
作崇禎鬼 樂彼白雲鄕 猶全舊天地
世系
高祖崇祖 爲中宗朝名臣 以大司成製進
大學箴及性理淵源等書 上卽命刊行
曾祖應台叅奉 祖炯叅奉 父瀾贈司憲府
執義行禮賓寺直長
子孫
玄孫喜洛喜觀喜益喜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