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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석강서원(石岡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961.4782-20140630.Y14501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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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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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석강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흑석리 380-1
작성시기 1961
형태사항 크기: 56.5 X 87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61년 석강서원(石岡書院) 통문(通文)
1961년 6월 석강서원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우졸재 박한주와 망헌 이주를 배향하기 위해 서원을 설립하는데 옥산서원이 성원해줄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먼저 이 통문은 석강서원을 설립하는 이유를 덕을 높이고 현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천지의 올바른 도리이고, 조상의 유적을 존중하여 지키고 그 보답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옛날과 지금에 두루 통하는 의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석강서원에 배향될 박한주는 도학과 덕행에 있어서는 김굉필이나 정여창에 버금가며, 충성과 의리 그리고 곧은 절개는 영원히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만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 시절에 직언을 하다 귀양을 갔다가 처형을 당한 운수가 기박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배향될 이주도 같은 김종직의 동문으로 연산군 때 직언으로 귀양되었다 처형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화와 도덕이 쇠퇴하고 미약하여 이렇게 선현들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설립하는 일이 더 이상 아름다운 일도, 성대한 일도 아니라며 탄식하였다. 하지만 이 일을 하는 자신들은 타고난 천성이 같기에 현인을 흠모하고 찬양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기에 옥산서원 여러분의 성원을 바란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두 사람을 배향하기 위해 석강서원을 세운다는 이 통문은 1961년에 발행된 것이다. 이 말은 석강서원이 바로 현대에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통문을 보면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원을 설립하는 자신들의 일에 옥산서원의 성원을 구하는 말에 있어서는 과거의 통문보다 더 간절함이 깃들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과거와 가장 다른 점은 예전에는 형식적으로나마 서원을 설립하기 전에 사림의 동의를 먼저 얻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먼저 설립을 하고서 그 일에 성원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금에는 과거처럼 향촌의 여론을 주도하는 유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석강서원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흑석리에 설립된 이래로 매년 3월과 9월 초정일에 박한주와 이주를 향사해오고 있다.
『石岡書院誌』, 朴潤在 編, 石岡書院, 1961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61년 6월, 迃拙齋 朴漢柱忘軒 李冑를 配享하기 위해 書院을 설립하는데 玉山書院의 聲援을 당부하는 石岡書院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961년 6월 石岡書院에서 玉山書院로 보낸 通文으로 그 내용은 迃拙齋 朴漢柱와 忘軒 李冑를 配享하기 위해 書院을 설립하는데 옥산서원이 성원해줄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석강서원박한주와 이주를 배향하는 이유와 과정, 그리고 그 의미를 이 통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통문은 먼저 德을 높이고 賢人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天地의 올바른 道理이고, 조상의 遺蹟을 존중하여 지키고 그 보답으로 祭祀를 지내는 것은 옛날과 지금에 두루 통하는 義理이라는 말로 서원을 설립하는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런 면에서 白鹿書院가 옛터에 다시 건축되고, 顔樂堂이 과거의 터전에서 없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그 실제의 예를 들었다. 이어서 석강서원에서 배향할 박한주의 인물됨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것에 따르면 박한주는 道學과 德行에 있어서는 寒暄堂 金宏弼나 一蠹 鄭汝昌에 버금가며, 충성과 의리 그리고 곧은 절개는 영원히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만하다고 하였다. 그러한 사람이 암울한 조정에서 禍를 당한 것은 運數가 기박한 것 때문이나, 후세에 그를 祭享 하는 것은 도리가 바른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방계의 後孫과 士林이 南岡祠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며 사모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고 불행히도 두 번의 큰 재앙을 당한 후로부터 祠宇의 담장은 잡초에 매몰되어 후학들이 恨을 품은 지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다행히도 그 후손들이 血誠을 쏟아 목재를 이미 구하고, 강당도 다시 사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갖추어진 사우에 이주도 함께 배향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가 박한주와 학문적으로 同門이며, 같은 조정에 出仕하였으며, 화도 같이 당하여 出處와 名譽 그리고 節操 이 모두가 같이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文化가 쇠퇴하고 道德이 미약하며, 三綱의 倫理가 매몰되고 九法이 무너진 지금의 시대에는 서원을 세워 현인을 배향하는 일은 전혀 아름다운 일도, 성대한 일도 아니라고 탄식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하는 자신들은 타고난 천성이 같기에 현인을 흠모하고 찬양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옥산서원에 알리니, 여러분들이 한마디 말을 아끼지 말고 성원해주어서 어두운 거리에 켜진 촛불을 부지하고 禮義를 사랑하는 옛 법도가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참으로 다행스럽고도 다행스럽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거론하고 있는 두 인물 중의 하나인 박한주金宗直의 문인으로 1485년(성종 16) 文科別試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먼저 典牲暑直長를 거쳐 漢城府參軍司憲府監察司諫院正言成均館典籍 등을 거친 뒤 부모의 봉양을 위해 자진해서 외직인 昌寧縣監으로 나왔다. 이때 그가 백성들을 지성으로 보살피고 교화시킨 공로가 인정되어 포상으로 비단과 교서를 받고 加資되었다. 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宗簿寺主簿를 거쳐 1497년(연산군 3) 司諫院獻納이 되었다. 이때 그는 연산군의 失德을 直諫하고, 또한 任士洪 등의 간악함을 탄핵하는 箚子를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연산군의 횡포가 더욱 심해지자 외직을 청하여 平海郡守‧醴泉郡守 등을 지냈다. 그러나 1498년 戊午士禍에서 김종직의 門徒로 朋黨을 지어 國政을 비방한다는 죄명으로 杖 80대에 평안도 碧潼으로 유배되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는 甲子士禍에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伸寃되어 都承旨藝文館直提學에 추증되었다. 다음으로 이주박한주와 같이 김종직의 문인이었으며, 1488년(성종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檢閱을 거쳐 정언을 지냈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주로 三司에서 활약하였으며, 정언으로 있을 때는 直言으로 유명하였다. 그런 그가 무오사화 때에는 박한주와 마찬가지로 김종직의 문도로 몰려 珍島로 귀양을 갔다. 또한 갑자사화 때는 예전에 궐내에 臺諫廳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김굉필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이 두 사람의 이력을 보면 이 통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출처와 명예 그리고 절조에 있어 같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닮아 있다. 그래서 박한주를 위해 건립한 석강서원에 이주도 함께 배향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통문을 통해서 보면 박한주를 맨 처음 배향한 사우는 남강사인데, 그것은 아마도 南岡書院의 전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사우가 두 번의 큰 재앙을 당했다는 것은 1741년(영조 17)과 1868년(고종 5)에 있었던 두 차례의 서원철폐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말해서 남강사1741년 이전에 건립되어 영조 때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한번 폐쇄되었다가 복설되고, 다시 고종흥성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완전히 훼철되어 이 통문이 발행되기 이전까지 복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한주와 이주 두 사람을 배향하기 위해 석강서원을 세운다는 이 통문은 1961년에 발행된 것이다. 이 말은 석강서원이 바로 현대에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때가 되면 과거와 같이 향촌에서 여론을 주도하던 유림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원의 설립이 家格을 높이는 수단이 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이 통문에서도 지금의 시대에는 서원을 세워 현인을 배향하는 일은 전혀 아름다운 일도, 성대한 일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 통문을 보면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원을 설립하는 자신들의 일에 옥산서원의 성원을 구하는 말에 있어서는 과거의 통문보다 더 간절함이 깃들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과거와 가장 다른 점은 예전에는 형식적으로나마 서원을 설립하기 전에 사림의 동의를 먼저 얻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먼저 설립을 하고서 그 일에 성원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지금에는 과거처럼 향촌의 여론을 주도하는 유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석강서원의 설립은 이 통문의 맨 처음에 언급한 것과 같이 순수하게 선조를 추모하는 서원의 한 기능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석강서원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흑석리에 설립된 이래로 매년 3월과 9월 初丁日에 박한주와 이주를 享祀해오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石岡書院가 건립된 과정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 또한 석강서원이 현대에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이 통문은 현대에 설립되는 서원의 여러 가지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石岡書院誌』, 朴潤在 編, 石岡書院, 1961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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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석강서원(石岡書院)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 伏以崇德尙賢 天地之常經 尊衛報祀 古今之通義 故白鹿復築於遺墟 顔樂不廢乎
舊址 伏惟我
迃拙齋朴先生 道學德行亞於暄蠹 忠義直節 膾炙千秋 而惟其被禍于昏朝者 數之奇也 享
祀于後世者 道之正也 于以傍裔與士林 築南岡祠 俎豆而寓慕者也已 有年所而不幸 自元二厄
後 宮牆蕪沒葵麥動搖 而後學之齎恨者久矣 今幸傍孫瀝血 鳩材已搆 講堂更謨祠宇 欲
幷享 忘軒李先生 以其學同門仕同朝 禍同被 出處名節 無不與同也 噫今文衰道溺 綱淪法
斁之世 此何等美事也 此何等盛擧也 鄙等秉彛攸同 亦不勝欽慕而贊揚 故玆敢通告于
尊院 伏望僉君子無靳一言之聲援 以扶昏衢之點燭 幷助愛禮之存羊 千萬幸甚幸甚
右文通于
辛丑(1961)六月日
玉山書院 僉座前
石岡書院會員朴淳烈
蔣炳璣
朴吉秀
朴潤在
李昌基
朴在周
朴元圭
潘相浩
朴英秀
芮秉黙
李祐燮
蔣炳球
朴熙植
朴廷洵
李鍾大
閔泳春
李庭洙
孫修鉉
蔣亮在
金孝坤
崔在阜
崔寧黙
朴志煥
潘廷煥
朴現秀
潘星煥
孫永輯
李奉燮
李在英
林炳圭
蔣寅在
徐浩鉉
尹定鎬
孫永普
孫基東
芮鍾健
趙鏞泰
林注植
趙壽顯
朴英瓘
林圭植
朴珍秀
朴寬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