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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삼계서당(三溪書堂) 회중(會中)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931.4792-20140630.Y145010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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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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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삼계서당 회중
작성지역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생기마1길 24
작성시기 1931
형태사항 크기: 50.3 X 89.5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31년 삼계서당(三溪書堂) 회중(會中) 통문(通文)
1931년 3월 26일 삼계서당 회중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충재집』을 중간하면서 퇴계의 서명을 휘로 바꾸었는데 이는 퇴계에게 잘못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통문은 먼저 사람들이 존경하는 퇴계선생이 선생 됨을 알지만, 충재선생 또한 우리나라의 위대한 현인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 퇴계에게 치우쳐 있어 충재의 진면목을 간과하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퇴계충재를 존중했으며, 그 사실은 권두경김유성에게 보낸 편지에 있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퇴계충재에 대해 나이와 덕업, 그리고 작위로서도 존경하는 바에 있었으며, 정사를 소재로 한 시에서도 삼가 관향과 이름을 썼다고 하였다. 이렇게 쓰인 성과 휘가 지금까지 300여 년이 지났으나 퇴계에게 미안한 것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며 퇴계의 휘를 쓴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이제 『충재집』을 중간하는데 부록 중에 ‘퇴계 이선생’이라는 것을 ‘퇴계 이황’이라는 휘로 고쳐 쓰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삼계서당에서 도회를 개최할 때에 퇴계의 본손과 여러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하여 의론을 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퇴계의 후손들이 지금 갑자기 통장을 보내 이 책을 절단하여 세상에 내보낼 수 없다고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에 대해 포은일두농암온계 등 여러 선생들의 문집에 ‘선생’을 ‘휘’로 고쳐 쓴 것이 또한 많으며, 또한 여러 선생의 문집을 보면 어떤 곳에는 선생이라 써져 있고, 어떤 곳은 휘, 또는 호, 또는 관향과 벼슬 이름이 써져 있어 그 규칙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말로 자신들의 행위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망령되게 구본을 고쳐 쓴 것이 퇴계선생에게 미안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퇴계선생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참된 마음이 못해진 것이 아니니, 여러분들이 굽어 살펴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의 핵심 되는 내용은 충재가 나이나 덕업, 그리고 작위에 있어서 퇴계에 전혀 뒤지지 않는데, 그런 충재의 문집에 퇴계의 서명을 휘가 아닌 존칭인 ‘선생’이란 말을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본에서 존칭을 쓴 것은 그 문집의 본인들이 퇴계보다 나이나 덕업, 또는 관직에 있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퇴계를 존숭하는 마음이 커서 함부로 그 휘를 쓰는 것이 꺼려지는 마음에 존칭을 썼는데, 이제 휘를 쓰는 것은 그 마음이 없어졌다는데 시비의 근원이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외형적으로 보면 일제강점기에 영남지역에서 퇴계의 영향력이 점차 쇠퇴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보다 깊은 역사적,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향권의 쟁취라는 현실적 목적과 결부되어 있었다. 조선후기 이후 중앙전계로의 진출이 막혀버린 영남의 재지사족들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는 향촌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향촌의 지배는 곧 존재 기반이자 이유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조상을 선양하는 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자신들의 조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향촌에서 그들의 권력 또한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본 통문에서와 같은 문자시비는 물론이고 위차시비와 같은 향전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19세기 중엽 이후 영남 내의 반촌을 형성하는 곳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크고 작은 시비가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시비는 전국 유림의 관심사로 커지게 되었다. 그것은 충재의 후손이 운영하는 삼계서당에 대해 그 상대인 퇴계 후손의 도산서원은 전국적으로 명망을 가진 서원이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사태를 자신들의 의견대로 이끌어가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冲齋集』, 權橃, 驪江出版社, 1985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인문과학』제11집 「18~19세기 嶺南地方 鄕論의 분열과 鄕戰」, 李樹奐, 경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7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31년 3월 26일, 『冲齋集』을 重刊하면서 退溪의 署名을 諱로 바꾸어 쓴 것이 잘못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玉山書院에 보내온 三溪書堂 會中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931년 3월 26일 三溪書堂 會中에서 玉山書院으로 보낸 通文으로 그 내용은 『冲齋集』을 重刊하면서 退溪의 署名을 諱로 바꾸었는데 이는 퇴계에게 잘못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통문에서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근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통문은 먼저 儒者의 服裝을 한 사람이라면 존경하는 퇴계선생이 선생 됨을 알지만, 冲齋선생 또한 우리나라의 위대한 賢人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 퇴계에게 치우쳐 있어 충재의 진면목을 간과하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퇴계를 존중할 줄을 알지만, 퇴계충재를 존중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퇴계충재를 존중했다는 사실은 蒼雪齋 權斗經烏川에 사는 金維城에게 보낸 편지에 있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퇴계충재에 대해 나이와 德業, 그리고 爵位로서도 존경하는 바에 있었으며, 精舍를 소재로 한 詩에서도 삼가 貫鄕과 이름을 썼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은 靑嚴公이 모실 때에 충재의 문하에 姓과 諱를 퇴계 스스로 揭載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지금까지 300여 년이 지났으나 퇴계에게 미안한 것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며 퇴계의 휘를 쓴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이제 『충재집』을 중간하는데 부록 중에 ‘退溪 李先生’이라는 것을 ‘退溪 李滉’이라는 휘로 고쳐 쓰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삼계서당에서 道會를 개최할 때에 이 의논을 꺼내었으나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不可하지 않다고 하였으며, 그 자리에 퇴계의 本孫과 여러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하여 議論을 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퇴계의 휘를 쓴 것이 어찌 충재의 자손들이 사사롭게 고쳐서 정한 것인가라고 반문하였다. 이처럼 충재의 후손들은 정당한 것이었기에 1년 정도 지난 뒤에 책을 정돈하여 원본의 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고쳐 베끼니 본 고을의 官府에서 허가하고 삼계서당에서 하나하나 기록하여 匠人을 불러 版木에 글씨를 새기는 전후로 여러 사람들이 재물로 정성과 힘을 바치기도 하고 몸으로 돕기도 하면서 한 번도 퇴계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퇴계의 후손들이 지금 갑자기 通章을 보내 이 책을 절단하여 세상에 내보낼 수 없다고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에 대해 圃隱一蠹聾巖溫溪 등 여러 선생들의 문집에 ‘先生’을 ‘諱’로 고쳐 쓴 것이 또한 많은데, 과연 그것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을 수 있는가하고 되물었다. 그리고 퇴계의 후손들이 淵源錄을 증거로 삼고자 하나, 그것은 한 사람이나 한 집안의 글이 아니지만, 문집에 이르러서는 사사로운 집안의 서책으로 그 둘을 한 가지로 취급하여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여러 선생의 문집을 보면 어떤 곳에는 선생이라 써져 있고, 어떤 곳은 휘, 또는 號, 또는 貫鄕과 벼슬 이름이 써져 있어 그 규칙이 한 가지가 아니니 舊本을 가지고서 증거로 삼을 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망령되게 구본을 고쳐 쓴 것이 퇴계선생에게 미안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퇴계선생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참된 마음이 못해진 것이 아니니, 여러분들이 굽어 살펴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의 핵심 되는 내용은 충재가 나이나 덕업, 그리고 작위에 있어서 퇴계에 전혀 뒤지지 않는데, 그런 충재의 문집에 퇴계의 서명을 휘가 아닌 존칭인 ‘선생’이란 말을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퇴계의 존칭을 사용할 경우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관직 높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 높이는 것이 되니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포은일두농암온계와 같은 분들의 문집에서 모두 그렇게 하는데 왜 우리만 두고 시비를 거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퇴계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편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 이유는 이들 모두가 구본에는 존칭을 쓰다가 중간하면서 함부로 쓸 수 없는 휘로 바꾸었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구본에서 존칭을 쓴 것은 그 문집의 본인들이 퇴계보다 나이나 덕업, 또는 관직에 있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퇴계를 존숭하는 마음이 커서 함부로 그 휘를 쓰는 것이 꺼려지는 마음에 존칭을 썼는데, 이제 휘를 쓰는 것은 그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퇴계의 후손들은 자신의 선조가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그리고 충재의 후손들은 이러한 마음을 읽고 있었기에 이 통문의 말미에 퇴계의 휘를 썼다고 해서 퇴계선생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참된 마음이 못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통문에서는 구본을 개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퇴계의 본손과 여러 사람이 참석한 도회에서 인정하고 함께 결정한 사항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비의 전말을 기록한 「汾李辨誣事變日錄」을 보면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그 도회에서 충재의 후손들과 사림들 간에 퇴계의 諱字를 쓸 것인가의 여부를 두고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개서하고자 하는 충재 후손들의 뜻이 강하여 결국 문집은 개서된 채로 출간되었던 것이다.
「분이변무사변일록」을 보면 퇴계의 휘자 시비는 『충재집』만의 경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1931년 汾川에 사는 聾巖 李賢輔의 후손들이 『聾巖續集』을 발간하면서 ‘退溪 李先生’‘退溪 李滉’이라고 명시하였다. 게다가 퇴계의 넷째 형인 溫溪 李瀣의 문집을 중간할 때도 ‘先生’이라 쓰지 않고 ‘舍弟’라고 명명하였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충재의 후손들도 퇴계의 휘를 쓰려는 마음을 내었고, 또 다른 문집에서도 그렇게 하는데 왜 우리만을 두고 시비를 하느냐고 강변하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던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외형적으로 보면 일제강점기에 영남지역에서 퇴계의 영향력이 점차 쇠퇴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보다 깊은 역사적,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鄕權의 쟁취라는 현실적 목적과 결부되어 있었다. 조선후기 이후 중앙전계로의 진출이 막혀버린 영남의 재지사족들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는 향촌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향촌의 지배는 곧 존재 기반이자 이유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조상을 선양하는 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자신들의 조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향촌에서 그들의 권력 또한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본 통문에서와 같은 文字是非는 물론이고 位次是非와 같은 鄕戰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19세기 중엽 이후 영남 내의 班村을 형성하는 곳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크고 작은 시비가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 있었다. 향촌 내 사족 간의 갈등은 문중 간에서 뿐만 아니라 문중의 系派 간에서도 일어나면서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경우 공동의 利害가 걸린 문제에는 공동보조를 취하였지만, 서로간의 이해가 상충되는 경우에는 院祠나 鄕校를 기반으로 하여 향론을 결집시켜 나갔다. 그런데 이 시비는 전국 유림의 관심사로 커지게 되었다. 그것은 충재의 후손이 운영하는 삼계서당에 대해 그 상대인 퇴계 후손의 도산서원은 전국적으로 명망을 가진 서원이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사태를 자신들의 의견대로 이끌어가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冲齋 후손과 退溪 후손 사이에 있었던 文字是非의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당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조선후기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18세기 이후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막혀버린 영남의 재지사족들이 조상을 선양하는 사업을 통해 鄕權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이러한 문자시비나 位次是非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통문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冲齋集』, 權橃, 驪江出版社, 1985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인문과학』제11집 「18~19세기 嶺南地方 鄕論의 분열과 鄕戰」, 李樹奐, 경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7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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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31년 삼계서당(三溪書堂) 회중(會中)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 伏以凡我圓冠方領 孰不知尊退溪先生爲先生哉 冲齋先生 亦國朝大賢也 今僉尊知尊退翁 而不知退翁之尊冲翁
雪翁答烏川金公書曰 老先生之於先祖 以年輩以德業以爵位 俱在所尊敬 於精舍題詠 猶謹書鄕貫姓名云云 此在靑嚴公摳衣之
日 手揭師門姓諱 至于今三百餘年 未聞有未安於退翁者 今於文集重刊附錄中 改書退溪先生諱字 不甚未安 故發論於本堂道會之席
而僉議莫不可之 退翁本孫數君子 亦據席而定論者 則豈曰冲翁子孫之私自改定者乎 其後一年之頃 定頓篇帙 繕寫正本 許可于本府 爬
錄于本堂 以至召工鏤板前後 僉尊各效誠力以財 助相以躬 徠問未嘗有一言 未安於退翁矣 今者忽投通章 以爲此冊斷 不可施行於世世間 文
集行世與否 盡在僉尊手分中 容易事 則圃隱一蠹聾巖溫溪諸先生文集 亦多改書先生諱字者 果能一一歸正乎 且示喩淵源錄 非一人
一家之書也 先儒所記述 無所有碍 至於文集 乃私家書冊也 其附錄中諸篇 皆作者 手書姓名 以致敬之 則文集與淵源錄 不可一例 以爲證也
諸家文集 生等不能廣改 然惟某某某集書先生 又某某某集 亦多書諱或號或貫鄕官啣 不一其規 未可舊例 以足證 則今以兩先生 平日相處
之禮者 有何大悖於義乎 生等之忘改舊本 實無未安於先生 又非薄於尊慕之誠心也 惟僉尊俯諒焉 千萬倖甚
右通通
玉山書院
辛未三月二十六日
三溪書堂會中 柳厚根
權璥夏
權一淵
柳善根
柳尹夏
柳潭
琴秉五
權晠夏
權濟淵
權哲淵
權相黙
權翊淵
黃基勉
金永燾
權台燮
柳瑀
權肯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