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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삼계서당(三溪書堂)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920.4792-20140630.Y145010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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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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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김순영, 권용진, 삼계서당
작성지역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생기마1길 24
작성시기 1920
형태사항 크기: 53.5 X 96.5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20년 삼계서당(三溪書堂) 통문(通文)
1920년 11월 3일 삼계서당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내온 통문으로 그 내용은 회재 이언적이 건립한 정자인 영귀정을 복원하도록 공의를 확산시키라는 것이다. 이 통문은 먼저 선현의 유적을 존중하여 지키는 일은 세대가 멀거나 가까운 것을 따지지 않고 지역의 다름에 메이지 않는다는 말로 충재 권벌을 배향하는 봉화삼계서당에서 회재가 지은 양동영귀정의 복원을 건의할 수 있는 당위성을 설파하였다. 그와 같은 예로 孔子의 고향인 곡부에 증점의 안락정을 짓고, 남강주돈이염계사를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회재는 도학 연원의 바름이 이미 표준으로서의 정점을 이루고 우리나라에 해와 별처럼 뚜렷하여 오래토록 그의 시를 읽어왔고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 모두가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처럼 거룩하게 여기고 있기에 그 유적에 대한 복원이 더욱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회재의 유적 가운데 정자며 대와 연못들이 아직도 찬연히 빛나 없어지리라는 근심이 없지만, 양동의 집 서쪽에 있는 영귀정만이 불행히도 비바람의 피해를 입어 300년이 지나도록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삼계서당 자신들은 회재로 인해 그 곳을 생각하면 시원스런 기수와 무우의 풍속이 있어 자신들도 모르게 머리를 들어 남쪽을 향하여 탄식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유학은 절박한 때를 만나 그 동안 전해오던 선비의 풍속이 흔적도 없이 될 지경이니, 이러한 때 선현의 자취를 지키는 일에 마땅히 시급히 정성을 바쳐야 한다고 이 일의 현실적 당위성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옥산서원에서 빨리 공의를 확산시켜 사문의 중요한 자취가 끝까지 사라지지 않고 후세에 영원한 모범으로 남아 있게 한다면 참으로 훌륭한 일이라며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회재의 자취인 영귀정양동마을의 설창산 동남쪽에 있다. 그리고 이 통문이 발행된 5년 뒤인 1925년에 복원되었다. 현재 이곳은 회재의 후손들이 모임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통문에서 맨 먼저 의문이 봉화삼계서당에 왜 이러한 제안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들이 영귀정에 대해 갖는 마음을 옥산서원에서도 자신들에게 그러한 마음을 가져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이 된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선현의 자취가 서린 영귀정이 비바람에 피해를 입었음에도 복구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서원이 서당으로 격하되어 복원되지 못한 것 또한 마찬가지로 안타깝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삼계서당에서 옥산서원영귀정의 복원을 제안한 것은 영남의 서원 가운데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는 옥산서원이 자신들의 서원 복원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삼계서당에서 영귀정의 복원을 위한 공의를 확산시키려고 하듯 옥산서원에서도 삼계서원의 복원을 위한 공의를 확산시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통문에 담겨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慶北書院誌』, 한국국학진흥원, 경상북도, 2007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20년 11월 3일, 晦齋 李彦迪이 建立한 詠歸亭의 復元을 玉山書院에 건의하는 三溪書堂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920년 11월 3일 三溪書堂에서 玉山書院로 보내온 通文으로 그 내용은 晦齋 李彦迪가 건립한 亭子인 詠歸亭를 復元하도록 公議를 확산시키라는 것이다. 이 통문은 영귀정을 복원해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통문은 먼저 先賢의 遺跡을 존중하여 지키는 일은 世代가 멀거나 가까운 것을 따지지 않고 지역의 다름에 메이지 않는다는 말로 冲齋 權橃를 配享하는 봉화삼계서당에서 회재가 지은 良洞영귀정의 복원을 건의할 수 있는 當爲性을 說破하였다. 그와 같은 예로 孔子의 고향인 曲阜에 曾點의 顔樂亭을 짓고, 南康周敦頤濂溪祠를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어렴풋한 향기만 남아있지만, 만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남은 조잡한 자취일지라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 즐거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회재가 있었던 곳은 은거하던 곳을 벗어나지 않고, 그 시간은 열 세대를 넘지 않으니 사모하는 情이 더하지 않겠느냐며 회재의 유적에 대한 복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리고 회재는 道學 淵源의 바름이 이미 표준으로서의 정점을 이루고 우리나라에 해와 별처럼 뚜렷하여 오래토록 그의 詩를 읽어왔고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 모두가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처럼 거룩하게 여기고 있다고 그의 업적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회재가 이러한 분이기에 생전에 머물던 玉山과 같은 곳, 그리고 그 곳에 있는 정자며 臺와 연못들은 찬연히 빛나 아직도 새로워 後學들이 항상 바라보며 의지하여 없어지리라는 근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양동의 집 서쪽에 있는 영귀정만이 불행히도 비바람의 피해를 입어 대대로 복구하려고 시도했지만 지금까지 300년이 되도록 이루지 못했는데, 이것은 斯文의 커다란 흠이 되는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삼계서당 자신들은 회재로 인해 그 곳을 생각하면 시원스런 沂水와 舞雩의 風俗이 있어 자신들도 모르게 머리를 들어 남쪽을 향하여 탄식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儒學은 절박한 때를 만나 그 동안 전해오던 선비의 풍속이 흔적도 없이 될 지경이니, 이러한 때 선현의 자취를 지키는 일에 마땅히 시급히 정성을 바쳐야 한다고 이 일의 현실적 당위성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옥산서원에서 빨리 공의를 확산시켜 斯文의 중요한 자취가 끝까지 사라지지 않고 후세에 영원한 모범으로 남아 있게 한다면 참으로 훌륭한 일이라며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회재의 자취인 영귀정은 양동마을의 雪倉山 동남쪽에 있다. 회재가 처음 이 정자를 세운 후 한 차례 소실되어 1778년(정조 2)에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심하게 퇴락하여 1925년에 재차 중건하였다. 이 통문에서 회재의 자취가 서린 곳 중에 다른 정자며 대와 연못들은 찬연히 빛나 아직도 새로운데 영귀정만이 불행히도 비바람의 피해를 입어 대대로 복구하려고 시도했지만 지금까지 300년이 되도록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바로 다시 중건되기 전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보면 아마도 이 통문이 영귀정의 중건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 일에 있어서 중요한 동기가 되었었던 것은 분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 통문이 발행된 5년 뒤인 1925년에 왼쪽에 2칸의 대청과 오른쪽에 1칸의 온돌방으로 된 정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영귀정은 재탄생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마루를 높이 띄우고 전면 전체에 계자 난간을 둘러 뒤쪽 툇마루를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이곳은 회재의 후손들이 모임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 통문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이 봉화삼계서당에 왜 이러한 제안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 통문에서 곡부안락정이나 남강염계사와 같은 예를 든 것처럼 선현을 추모하는 시설은 직접적인 당사자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또한 그렇게 하는 일이 유학의 道를 宣揚하고 지속시키는 일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제안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물질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의도를 내포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제안의 당사자는 그 제안으로 해서 직접적인 이익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데는 분명한 명분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이 명분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이 통문의 진정한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통문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제안이 순수하게 선현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으로만 말하고 있어 이 통문 자체로는 그 진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 통문에서 그 진의를 엿볼 수 있는 작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통문의 발행처를 ‘三溪書堂’이라고 쓰지 않고 ‘三溪’라고만 쓴 것이다. 이렇게 쓴 것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기 이전인 1868년(고종 5)까지만 해도 ‘三溪書院’이었던 자신들이 ‘서당’으로 격이 떨어진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삼계서당’으로 불렀으며, 심지어 이로부터 10여년 후인 1931년 『冲齋集』의 간행과 관련하여 옥산서원과 시비가 일어났을 때도 다른 모두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들 또한 ‘삼계서당’이라고 불렀다. 그런 것을 보면 새삼 ‘삼계’라고 부르면서 자존심을 세우려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 통문의 내용과 ‘삼계’라는 표현을 결부시켜 보면 그 의도의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삼계서당에서 ‘삼계’라고 쓴 것은 이 통문을 받는 옥산서원에서 자신들이 훼철된 이후에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현의 자취가 서린 영귀정이 비바람에 피해를 입었음에도 복구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서원이 서당으로 격하되어 복원되지 못한 것 또한 마찬가지로 안타깝다는 뜻이다. 그리고 통문의 서두에 선현의 유적을 존중하여 지키는 일에 세대나 지역에 매이지 않고 누구든 나서서 도울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삼계서당 자신들이 회재에 관심을 가지듯 옥산서원에서도 자신들이 배향하는 충재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삼계서당에서 옥산서원영귀정의 복원을 제안한 것은 영남의 首院이라 할 수 있는 옥산서원이 자신들의 서원 복원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삼계서당에서 영귀정의 복원을 위한 공의를 확산시키려고 하듯 옥산서원에서도 삼계서원의 복원을 위한 공의를 확산시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통문에 담겨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외형적으로 볼 때 회재의 藏修之所 중의 하나인 詠歸亭가 복원되는 과정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 하지만 그 내면에서 보면 일제강점기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서원의 복원을 위해 서로의 관심과 협조를 촉구하는 일이 활발히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
『慶北書院誌』, 한국국학진흥원, 경상북도, 2007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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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20년 삼계서당(三溪書堂)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 伏以事關尊衛 何論年代之久近 志切崇奉 不係地域之彼此 所以曲阜顔樂之亭 南康濂溪之祠 是皆彷像遺芬 萬一粗跡猶
足以寓慕而自悅 況地不出菟裘 時不過十世 考其文而證響昭著 語其事 則擬議旣久者耶 惟我晦齋李先生道學淵源之正 固已準極乎 東
方日星乎 千載誦其詩 讀其書者 擧將仰高山而雲興 猗歟盛哉 肆其當日藏修之地 如玉山 別業其園亭臺沼 煥然尙新 後學瞻依 不患無所 而
第惟良洞宅西之詠歸亭 不倖爲風雨所披歷世圖復鄭重未遂于今三百年矣 玆豈非斯文之一大欠擧耶 生等每因君想地 曠然有沂雩風浴之
思 而自不覺矯首南喟也 顧今吾道遭剝 儒風掃地 凡在此等尊衛之事 尤宜汲汲效誠 伏願僉尊亟恢公議 卽舊圖新 使斯文重躅 不終泯翳 而來
者 百世永有矜式地 千萬偉甚
右通
玉山書院 庚申十一月 三日 三溪都有司幼學權相璟
有司幼學權鼎燮
金恒林
製通幼學權相翊
金碩林
權命燮
寫通幼學權相漢
金漢植
會員幼學金稷林
權守淵
金炳林
參奉柳厚根
幼學金始永
郡守權相文
幼學金昌禹
承旨姜海
幼學權肯夏
參奉金順永
幼學金澤鉉
權益淵
李奎學
權相甲
李起榮
權永燮
金萬植
權相益
柳達根
金昌國
邊台均
柳書欽
琴書淵
權相圭
吳鼎洛
金濬林
進士權瑢進
幼學權相喆
主事金昌根
幼學權起燮
金昌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