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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양산서당(陽山書堂)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918.4772-20140630.y145010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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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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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양산서당
작성지역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작성시기 1918
형태사항 크기: 59.5 X 91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18년 양산서당(陽山書堂) 통문(通文)
1918년 9월 10일, 양산서당에서 옥산으로 보내온 통문으로 그 내용은 포은 정몽주를 새로이 주벽으로 세우고 경재 홍로를 비롯한 홍씨의 세 현인을 배향하는데 동의하는지에 대해 문의해온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양산홍로가 은거하여 머물던 곳이며, 그의 후손인 허백당 홍귀달과 우암 홍언충이 대를 이어 살아온 마을이다. 그래서 거기에 서원을 세우고 모두 함께 제향을 해온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로는 들풀만 무성하게 자라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러던 중에 최근 홍로가 벼슬을 그만둘 때 쓴 서첩 중에서 스승과 제자가 의리를 지켰다는 글을 얻었다. 여기에서 홍로가 말하는 스승은 자신을 한림학사로 추천하여 문하사인으로 승진하게 한 정몽주였다. 이것을 계기로 정몽주의 후손들은 양산에다 포은을 주벽으로 하고 홍씨의 세 현인, 즉 홍로홍귀달, 그리고 홍언충을 배향하는 석채례를 거행하자는 의견을 편지를 통해 보내왔다. 이에 대해 정몽주를 제향하거나 그와 연관된 인물을 배향하는 용인심곡, 개성숭양, 진주옥산, 영천임고, 선산금오낙봉과 같은 이전의 서원들도 동시에 따르겠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그래서 양산서당에서는 이러한 석채례에 대해 유림의 의견을 묻기 위해 이 통문을 옥산에 보낸 것이다.
이 통문이 발행된 1918년은 서원철폐령이 내려진지가 거의 50년에 가까워지면서 훼철된 서원들이 하나둘씩 복원되고 있는 시기였다. 따라서 문중 서원들은 일족의 단결과 사회적 영향력을 위해서도 서원의 복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정몽주의 후손들이 양산서원의 홍씨들에게 서원의 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석채례를 제안한 것이다. 이것은 정몽주의 후손들에게 뿐만 아니라 홍씨들에게도 모두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홍씨들은 통문을 돌려 유림의 공의 아래 선조의 선양사업을 펼치려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도 書院·祠宇의 건립추이와 제향인물의 성격」,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18년 9월 10일, 鄭夢周를 새로이 主享하여 釋菜禮를 거행하는데 대한 同意 與否를 玉山書院에 질의해온 軍威 陽山書堂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918년 9월 10일, 陽山書堂에서 玉山書院로 보내온 通文으로 그 내용은 圃隱 鄭夢周를 새로이 主壁으로 세우고 敬齋 洪魯를 비롯한 洪氏의 세 賢人을 配享하는데 동의하는지에 대해 문의해온 것이다. 양산서당에서 옥산서원에 이러한 문제로 문의하게 된 내력을 이 통문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통문에 따르면 陽山홍로가 은거하여 머물던 곳이며, 그의 후손인 虛白堂 洪貴達寓菴 洪彦忠가 대를 이어 살아온 마을이다. 그래서 거기에 서원을 세우고 모두 함께 祭享을 해온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최근 4~50년 사이에 그곳에는 들풀만 무성하게 자란 것을 보면 유림과 관계된 자라면 통한의 마음이 없을 수 없다. 또한 홍로文忠公 포은 정몽주 문하의 빼어난 제자로 학문의 연원이 확실하고, 절개와 의리가 서로 들어맞는 것이 하늘의 해와 별처럼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文敬公 許珙가 젊은 날에 쓴 글과 文肅公 蔡濟恭가 새긴 금석문에 남김없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홍로가 벼슬을 그만둘 때 쓴 書帖 중에서 스승과 제자가 의리를 지켰다는 글을 얻었다. 이를 쓴 종이와 그 墨痕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이것은 하늘과 신령이 도우신 것으로 자손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斯文의 경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몽주의 후손들이 양산에다 포은을 주벽으로 하고 홍씨의 세 현인, 즉 홍로홍귀달, 그리고 홍언충을 배향하는 석채례를 거행하자는 의견을 편지를 통해 보내왔다. 그리고 龍仁深谷, 開城崧陽, 晉州玉山, 永川臨皐, 善山金烏洛峯도 동시에 따르겠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이에 대해 양산서당의 사람들은 異議가 없었으나, 이 일이 유림의 의론과 관계되는 일이기에 이렇게 알리게 되었다. 그러니 옥산서원에서 빠르게 한 말씀을 회답하여 선현을 추모하는 정성을 실현할 수 있게 해준다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이 통문은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양산은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있는 것으로 양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홍로가 이곳을 거처로 삼은 것은 고려가 점점 혼란해지자 병을 핑개로 사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일찍이 성리학과 고금의 가례, 그리고 『伊洛淵源錄』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리고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5세에인 1390년(공양왕 2)에 대과에 급제하여 정몽주의 추천으로 翰林學士가 되었다가 門下舍人으로 승진하였다. 이 통문에서 홍로정몽주 문하의 빼어난 제자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 후 李穡曺敏修를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홍로는 이들을 적극 변호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라는 점점 더 어려움 혼란 속으로 빠져들자 고향인 군위로 돌아와서는 "신은 나라와 함께 망하겠습니다. 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홍로가 보여준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후세 사람들로부터 出處가 바르고 志節이 굳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 통문에서 홍로를 학문의 연원이 확실하고 절개와 의가 서로 들어맞는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홍로 이후 군위缶林洪氏 가운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름을 떨친 사람이 홍귀달이다. 그는 1460년 과거에 급제하여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며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연산군의 생모 尹妃를 왕비에서 일반인으로 폐하고 쫓아내는 모의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하고, 戊午士禍 직전에 열 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연산군에게 간하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좌천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성격이 강직해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 또한 능한 재주도 겸비하였다. 그리고 이 통문에서 말하는 또 다른 홍씨인 홍언충홍귀달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에 못지않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글을 올려 임금에게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관작을 빼앗기고 도성 밖으로 추방되는 형벌을 받았다가 다시 유배의 형벌을 받았다. 그리고 홍언충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빼어났다. 이 세 홍씨는 1786년(정조 10)에 양산서원의 건립과 함께 配享되었다. 이 통문에서 양산에 서원을 세우고 제향해온지 오래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원이 건립되고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월철폐령으로 서원의 모든 건물이 훼철되었다. 그 후 1896년(건양 1) 양산서당이 건립되면서 이듬해인 1897년(광무 1) 훼철된 강당이 중건되기는 했지만 옛날의 면모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 최근 4~50년 사이에 그곳에는 들풀만 무성하게 자랐다고 말한 것이다. 이처럼 선현을 추모하는 사업이 지지부진한 때에 정몽주의 후손들로부터 이 통문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제안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통문의 내용만을 보면 선현을 제향하자는 논의는 홍씨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정씨들로부터 나온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 통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용인심곡서원, 개성숭양서원, 진주옥산서원, 영천임고서원, 선산금오서원낙봉서원은 모두 정몽주를 주벽으로 제향하고 있거나 그와 연관이 인물들을 배향하는 서원들이다. 이것을 보면 당시에 정몽주의 후손들이 자신의 선조와 관계된 서원들을 서로 연결하여 함께 재건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당시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진지가 거의 50년에 가까워지면서 훼철된 서원들이 하나둘씩 복원되고 있는 시기였다. 따라서 문중 서원들은 일족의 단결과 사회적 영향력을 위해서도 서원의 복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정몽주의 후손들이 양산서원의 홍씨들에게 서원의 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석채례를 제안한 것이다. 이것은 정몽주의 후손들에게 뿐만 아니라 홍씨들에게도 모두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홍씨들은 통문을 돌려 유림의 公議 아래 선조의 선양사업을 펼치려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1920년대를 전후로 하여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서원이나 사우를 복원하거나 중건하려고 돌리는 통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통문이 보여주는 특징은 그 제안이 서원을 관리하는 문중에서 나선 것이 아니라 그 서원과 연관 인물의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정몽주와 같이 전국적으로 명망을 지닌 선현을 둔 후손들은 자신의 선조를 선양하기 위해 그와 연관 여러 서원들에 함께 선양할 것을 제안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상도 書院·祠宇의 건립추이와 제향인물의 성격」,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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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18년 양산서당(陽山書堂)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 伏以惟我陽山敬齋洪先生隱採之地也 虛白寓菴兩先生 枼梓之鄕也 是以建院於斯一體 幷享者久矣 邇來四五十年 葵麥
動撓 凡係儒紳者 豈無痛恨之心哉 且念敬翁文忠公 圃隱先生及門高弟也 淵源之端的 節義之沕合 昭如日星 而許文敬靑雲之筆
文肅
金石之鐫 備述無餘 近得掛冠時 師生處義 設書於一帖中 爛紙飄飄 墨痕尙存 豈非天神所助耶 不惟子孫之光榮 抑亦斯文之慶
幸 所以文忠公諸孫 峻發陽山釋菜之議 以圃隱先生爲主壁 以本堂三賢配焉 折簡飛通 辭意明快 且龍仁之深谷 開城崧陽
臨皐 金烏洛峯 同時影從 溪上簡通 亦甚鄭重 生等無異同於其間 而事係儒論 不可私自擅 便故玆以仰告 伏願
僉尊 亟賜回諭一言歸重 俾伸尊慕之忱 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戊午(1918)九月十日陽山書堂堂長幼學李琥
有司幼學權重銖
朴世煥
會員幼學申榮植
鄭致翰
朴顯求
郡守金容復
幼學申在河
李鍾根
李圭厚
鄭軫基
鄭庸基
鄭漢永
鄭然徽
洪斗欽
申錫東
洪圭
金漢東
李中愼
李振榮
洪友欽
洪箕修
申錫文
禹鉉東
申錫來
洪範禹
洪基錫
張振遠
洪致演
崔敬汶
李敎興
李相吉
主事申鳳均
參奉李鍾益
幼學申錫弘
李準儀
洪臣欽
李相萬
洪龍洛
李汶永
洪載夏
朴泰幹
洪銓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