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7월 20일, 李源海의 妻 平陽朴氏의 烈行을 널리 알려 人倫을 바로 세우자며 玉山書院에 보낸 陶山書院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918년 7월 20일 陶山書院에서 玉山書院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李源海의 妻인 平陽朴氏의 烈行을 널리 알려 人倫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평양박씨의 열행은 다음과 같다.
박씨는 醉琴軒 朴彭年의 집안에서 태어나 16세에 退溪先生의 가문으로 시집을 왔다. 퇴계선생 집안의 法道에는 부녀자의 도리가 있어 그것을 깊이 닦았다. 그리고 남편의 집안이 宣城에서 충청도의 鎭岺으로 이사를 갔다. 그런데 작년 1917년 남편 이원해가 19세의 나이로 몇 개월 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박씨는 정성을 다하여 간호를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근심하고 수고했으나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박씨는 堂 아래로 몸을 던져 자신이 먼저 죽고자 하였다. 그러나 곁에 있던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구하여 다시 소생시켰다. 이때에 온 집안이 박씨의 생명을 구하는데 급하여 이원해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이로부터 박씨가 죽지 못하도록 방비하고 보호함이 아주 엄하자 박씨는 죽음을 급히 실행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박씨는 몸소 남편의 壽衣를 지어 마지막을 보내는 예절을 다하였다. 장례의 모든 일을 마치고서 박씨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였으나 주변의 사람들은 따르며 살피는 것을 잠시도 늦출 수 없었다. 금년 1918년 7월의 忌日이 다가오자 박씨는 襲衣 한 벌과 祭物을 한 접시를 가지고 남편의 묘소에서 哭을 하고 무덤 곁에 옷을 불사르고 묻었다. 그로부터 5일이 지난 밤에 침실로 들어가 塩水 한 사발을 마시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이 날이 6월 27일이었다. 그 전에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가 모두 고향을 떠났는데 박씨가 몹시 기다리는 형상이었다. 그러다 시할아버지가 먼저 돌아오고 시아버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 문득 왈칵 눈물을 쏟아내었다. 이것은 스스로 이미 영원한 결별을 결심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박씨가 세상을 떠나던 그 날 저녁 같은 집에 사는 사람에게 우환이 있어 집이 때마침 비었다. 시할아버지가 밖에서 문득 구토하는 소리를 듣고서 황급하게 들어가 보니 창에 등불이 밝게 빛날 뿐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가 없는 지경이었으며, 이것이 자신의 뜻이라는 말을 마치고 숨이 끊어졌다. 그 곁을 보니 박씨 자신이 이미 襲衣를 준비해 놓고, 상자 안에는 두 통의 편지가 있었다. 한 통은 박씨의 부모님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 통은 손아래 동서에게 어른들을 효성으로 봉양하라는 것이었다.
이 통문은 박씨의 이러한 행동이 자살을 한 그 당일의 결심이 아니라, 당 아래로 몸을 던졌을 때이며, 1년 열두 달 하루도 죽고자 하지 않은 날이 없는 평소의 마음 실행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아녀자가 三從의 義理를 따르는 것은 소중한 것으로 한 번 죽는 것은 가벼운 일이며, 이것이 곧 사람의 일을 다 하는 곳이자 타고난 마음이 함께 따르고자 하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래서 박씨의 이 행동은 人倫의 얼을 바로 세우는 일과 관계된 것이기에 마땅히 널리 알린다는 말로 통문을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박씨의 행동을 찬양하며 널리 알리고자 하는 것은 유교적 풍속교화를 위해 忠‧孝‧烈을 포상하는 것이 과거 조선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大典通編』에 따르면 孝行과 烈行이 旌閭와 復戶에 합치되는 자는 모든 道에서 뽑아서 보고하고, 式年의 연초 마다 禮曹의 세 堂上이 모여 상세히 살핀 후 議政府로 이송한 뒤에 별단으로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들에 대한 혜택은 관직이나 물건을 상으로 주고, 더욱 뛰어난 자는 旌門을 내리고 세금이 면제되는 복호의 혜택을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효자나 열녀가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기까지는 지역사회의 광범위한 지지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명확한 행적이 드러나는 忠臣는 달리 효자와 열녀의 행적은 국가에서 파악하기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효자와 열녀는 다른 사람에 의한 추천, 즉 지역 士林의 公論에 의한 추천으로 해당 고을 수령이 받아서 이를 각 도의 관찰사가 수합하여 예조에 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으로 효자와 열녀가 결정되다 보니 孝烈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들을 배출하는 집안이 지역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거나, 여타 士族들과 폭넓은 교유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야만 가능하였다. 이 통문에서 열녀 박씨는 박팽년의 후손이고, 그 남편은 퇴계의 자손이라는 것은 이러한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또한 향촌사회에서 효자와 열녀를 찾아 널리 알리고 중앙에 보고하여 旌表하도록 하는 일은 대개 향교와 서원에서 하였다. 두 기관에서 사림의 공의를 모으거나 확인한 후 그러한 내용을 수령에게 넘기면, 수령이 이를 감사에게 천거하였던 것이다. 도산서원에서 박씨의 열행을 앞장서서 널리 알리는 것은 그녀가 퇴계 집안의 며느리라는 이유도 있지만, 과거 이러한 것은 서원이 하는 일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貞烈人에 대한 국가적 襃賞이나 추천의 제도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산서원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단순히 그 동안 해오던 일을 관행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서 식민지 초기 일제의 문화통치정책에 의해 과거와는 다른 가치관과 윤리의식이 퍼지면서 전통에 대한 회의와 부정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향교와 서원이 이러한 일을 통해 그 동안 정신적 바탕이었던 유교의 가치관을 유지‧보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통문에서 박씨의 행위를 널리 알리는 것이 인륜의 얼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유림의 이러한 의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은 지금에 있어서는 이러한 일들이 참으로 비인간적이며 어리석은 짓이라고 통박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 사림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무너져가는 진리를 부지하기 위한 안타까운 노력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 통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사회의 근간이었던 유교의 가부장적 가족윤리가 일제강점기에도 서원과 향교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급‧유지되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 또한 변화해가는 가치관과 윤리의식에 대해 당시의 사림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이 통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사학보』제17권 「조선 말기의 旌閭와 가문 숭상의 풍조」, 이희환, 조선시대사학회, 2001
『한국사상과 문화』제67권 「조선시대 昌寧지역의 효자, 효녀, 열녀」, 박주, 한국사상문화학회, 201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