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4월 5일, 晦齋와 愚齋 사이의 學問 淵源과 道學 授受 關係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말을 퍼뜨린 자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며 玉山書院에 보낸 泗陽書堂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906년 4월 5일 泗陽書堂에서 玉山書院로 보낸 通文으로 그 내용은 晦齋 李彦迪과 愚齋 孫仲暾 사이의 學問 淵源과 道學 授受의 관계에 대해 그릇된 말을 퍼뜨린 자들을 처벌하라는 것이다. 사양서당에서 이러한 통문을 보내게 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통문은 먼저 선비로서 退溪를 도학의 正脈으로 말하면서 회재의 후학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陶山의 무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은 퇴계가 회재의 行狀을 쓰면서 자신을 ‘後學’이라고 했는데 이를 회재의 후손들이 멋대로 집어넣은 것이라는 말을 퍼뜨린 사람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그릇된 말이 다름 아닌 퇴계의 후손 세 사람에게서 시작되었으며, 이 말을 가지고 우재의 후손인 경주손씨들은 『晦齋集』의 목판을 破碎해야 한다는 牌旨를 돌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회재를 존경하여 믿은 사람 가운데 퇴계만한 사람이 없다고 이 통문은 말했다. 그 증거는 회재의 德을 기록한 글을 퇴계가 손수 써서 회재가 도학을 수수한 곳이 없으며, 학문의 연원 또한 없다고 하는 등의 아름다운 말씀을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하늘에 떠있는 해와 같은 것으로 우리의 학문에서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기에 천년을 다하도록 바꿀 수 없는 글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慶州孫氏들은 『景節公實記』를 간행하여 학문의 연원이라는 오래된 다툼과 도학의 수수라는 새로운 是非를 다시 불러일으켰으며, 이에 대해 도산서원에서는 그 목판을 파쇄하라고 통고하였다. 그러나 우리 유학에 거듭되는 재앙과 波瀾을 부추기는 단서가 下溪에 사는 퇴계의 후손에게서 나왔다. 그들은 『회재집』 舊本에는 퇴계가 쓴 ‘後學’이라는 두 글자가 없었다는 설을 토해내어 붓으로 비웃고 칼날로 도려내어 『퇴계집』의 初本에 있는 실제적인 자취를 훼손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만약 그치지 않는다면, 『회재집』의 「元朝五箴」 아래에 있는 ‘후학’이라는 글자를 어떤 舌法으로 떨쳐낼 것이며, 그 손때 묻은 자취를 얼마나 훼손할 것이냐며 되물었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先賢을 업신여기고 자기의 祖上을 높이는 것이 극에 달한 것이 서글픈데, 선조를 誣告하여 자기의 생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느냐며 자신들이 이 통문을 발행하게 된 이유를 말함과 동시에 현재 나타나는 작태에 대해 탄식했다. 이 통문은 州誌와 祭文 등의 여러 말들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러기 때문에 부풀려 놓은 『경절공실기』의 자취를 따르면 그럴 듯한 것에 참된 것이 어지럽혀지는 것이 되니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선조를 더럽히는 일이 선현의 집안에서 나오고 잘못된 무리들의 소요가 선현의 고향에서 나온 것은 사문을 더욱 두렵게 하고 더욱 근심스럽게 하는 일이기에 비록 변변치 못한 학문을 닦은 자신들이지만 이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을 사양하지 않겠다며 이 통문을 발행한 각오를 밝혔다. 그러면서 이미 옥산서원에서 大義의 글을 밝혔으니, 이어서 東江書院을 분명하게 조사하고 世德祠에 통고하여 잘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드러내어 罰을 시행하고 儒籍에 들지 못하게 하여 윤리를 돈독하게 하고 바른 것을 부지하도록 한다면 참으로 다행이겠다는 말로 통문을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의 핵심은 퇴계가 회재의 행장을 쓰면서 ‘후학’이라고 쓴 것이 분명한데 이를 부정한 사람들을 처벌하라는 것이다. 이 문제가 불거지게 된 과정을 보면 그 뿌리는 깊고 그 기간은 오래된 것이다. 그 뿌리는 본 통문이 발행되기 100년 전부터 시작된 해묵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1773년(영조 49) 손중돈을 배향하는 동강서원의 묘우를 중건할 때 大山 李象靖이 작성한 廟宇重建上樑文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905년에 중간된 『경절공실기』에 따르면 이 상량문 속에 회재가 우재의 道脈을 的授했다는 말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회재의 후손인 驪州李氏들은 강력히 항의했고, 그로 인해 이 상량문은 당일로 勘定되어 본가로 돌려보내지면서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1845년(헌종 11) 『愚齋實記』를 증보하여 간행할 당시 문제의 상량문을 실으려 하자 다시 이씨들이 강력히 반발하며 나섰다. 이씨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鄕內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들을 압박했다. 그 과정에서 三溪‧東洛‧洛峰‧南江書院 등에서 이씨들을 지지하는 통문을 보내왔으며, 虎溪書院에서는 양자를 중재하는 통문을 보내왔다. 이때의 사태가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량문의 작성 당시와 같이 이씨들의 항의와 도내 유림의 여론에 굴복해 손씨들이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다시 이 문제가 불거진 것은 이 통문이 발행되기 2년 전인 1904년에 이씨의 종가인 무첨당에 소장되어 있던 『驪江世稿』에서 회재가 우재에 대해 쓴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어 이를 계기로 손씨들이 『景節公實記』를 중간하면서부터였다. 이때 손씨들은 새롭게 발견된 그 장문과 만사를 실기에 싣는 것은 물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그 상량문에 있던 ‘淵源道脈’이라는 구절에 附註하고, 이를 근거로 孫海翼, 孫最秀 등이 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서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詩와 跋을 眞城李氏인 李晩燾, 李炳鎬, 李晩煃로부터 얻어 싣고 1904년 4월에 배포하였다. 손씨들이 이 실기에 진성이씨 3인의 시와 발을 받아 실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손씨들이 의도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씨들은 즉각 인근 鄕內 14개 門中에 回文하여 옥산서원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이씨들은 이 문제가 학문적 연원과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에 단순히 문중 차원의 문제가 아닌 사림 사회의 道脈과 관계된다는 점을 통문을 통해 향내와 도내 사림에 알렸다. 그 결과 이 두 문중 사이의 시비는 초기부터 곧바로 경상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양측 간에 통문을 통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문제의 상량문을 쓴 이상정을 배향하는 高山書堂에서도 ‘연원도맥’이라는 구절이 잘못된 것으로 손씨들의 처사를 비판하는 통문을 보내오는 등 대부분의 여론은 이씨들에게로 기울어졌다. 본 통문에서도 도산서원으로부터 우재의 실기를 파쇄하라는 통문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이미 여론의 향배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때에 퇴계의 후손이자 土溪里의 상계에 사는 이만도 등 3인에게서 회재의 행장에 퇴계가 ‘後學’이라고 한 것은 이씨들이 멋대로 집어넣은 것이라는 설이 나왔다. 이를 계기로 수세에 몰린 손씨들이 여론을 자기편으로 돌리기 위해 『회재집』을 파판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오게 되었다. 이 통문은 바로 퇴계의 후손 3인의 설과 이를 이용한 손씨들을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본 통문은 선조를 더럽히는 일이 선현의 집안에서 나오고 잘못된 무리들의 소요가 선현의 고향에서 나온 것은 사문을 더욱 두렵게 하고 더욱 근심스럽게 하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 통문에서도 보는 것처럼 그것은 이씨들의 두찬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자 이씨 측에서는 ⅰ) 이상정의 상량문은 잠시 썼다가 바로 지운 것인데, 손씨들이 이것을 고쳐서 실기의 중간에 넣은 것, ⅱ) 손씨들이 주장하는 家狀이 회재의 手本이라는 증거가 없는데도 諱를 쓴 것, ⅲ) 퇴계가 쓴 회재의 行狀에 ‘후학’ 두 자가 없었다며 선현을 모욕한 것, ⅳ) 正祖가 쓴 회재의 제문에도 회재의 師承이 없고 바로 濂洛에 소급한다고 했고, 퇴계가 쓴 狀文에도 회재가 학문의 가르침을 받은 곳이 없다고 한 것 등을 들어서 손씨들에게 역공을 펼쳤다. 그러면서 이씨들은 太學과 湖西儒生‧湖南儒會所 등 전국적으로 통문을 보내 손씨들을 강력하게 성토하였다. 그 결과 1906년 윤 4월 태학에서는 회재에 대한 평가는 이미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과 정조가 쓴 제문에 師承이 없다는 명백한 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두찬했다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의 통문을 보내왔다. 그러자 이씨들은 이 통문을 즉시 도내 전역에 돌리는 한편, 손씨들의 실기는 파판하고 문제를 일으킨 이만도 등의 3인을 성토하고 그들이 쓴 詩와 跋을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당초 손씨들을 지지하던 일부 유림들조차 이씨들의 편으로 전향해왔다. 이 통문에서 말미에 우재를 배향하는 동강서원을 분명하게 조사하여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밝혀 이를 이씨들의 祠宇인 세덕사에 통고하여 이름을 드러내어 벌을 시행하고 유적에 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 통문을 보낸 사양서당의 견해이기는 하지만, 그 어조로 볼 때 이 시비에서 여론의 향배는 전적으로 이씨들에게 기울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18세기 이후 중앙정계에서 물러난 嶺南 南人들이 鄕村에 집중하면서 그 주도권을 두고 士族 상호간에 벌어진 鄕戰의 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비는 19세기 중반 이후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안고 있었다. 영남 내의 시비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이 학문적 淵源과 位次의 문제로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그리고 바로 慶州의 ‘孫李是非’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門中 간의 문제가 아니라 他地域의 문중들에까지 확대됨으로써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크게 번져갔다. 이 통문은 바로 이러한 시비에서 제삼자들의 여론이 어디로 기울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民族文化論叢』제42집 「경주지역 孫李是非의 전말」,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이수건,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0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