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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병산서원(屛山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906.4717-20140630.Y14501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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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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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유도필, 유도위, 병산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작성시기 1906
형태사항 크기: 57.5 X 92.5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06년 병산서원(屛山書院) 통문(通文)
1906년 1월 25일 병산서원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회재에 대한 퇴계의 행장을 여주이씨들이 두찬했다고 무고한 경주손씨들에게 중죄를 내리라는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회재의 문집이 간행된 지 몇 백 년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퇴계선생이 지은 회재의 행장에 관한 글이 별과 해처럼 뚜렷이 게재되어 있는 것이 진정 금석과 같은 완전한 책이며, 그 연월의 아래 끝에 ‘후학’이라는 두 글자는 회재를 높이고 사모하며 우러러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은 『회재집』 안의 부록에 실려 있으며, 『퇴계집』 안에 원문으로 실려 있어 이미 여러 선배들의 교정과 편집의 손을 거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퇴계집』은 도산서원광명실 가운데 초판본과 중간본이 엄연히 갖추어져 있어 눈이 있으면 모두 볼 수 있을 것이라며 그 실제에 대해 새삼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 대해 경주손씨의 종가인 서백당여주이씨무첨당을 몰아내기 위해 노자에게 보낸 패지를 보면 퇴계선생이 칭한 ‘후학’이라는 두 글자는 양동의 이씨들이 멋대로 고친 것이니 『회재집』의 목판을 파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경주손씨들이 국량을 알지 못한 것이며, 『회재집』과 『퇴계집』이 우리나라에 있어 『論語』나 朱子의 책과 같은 것이어서 손씨들의 한 줄 글귀의 단정으로 쉽게 책판을 파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씨들의 편을 들었다. 그러면서 지금 우재 손중돈의 실기를 중간하는데 도산서원으로부터 그것을 파쇄하라는 통문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그 책판을 파쇄했어야 하는데도, 이렇게 억지로 간행하고 억지로 배포하는 일이 있고, 또 해괴하고 망령된 말을 지어내어 맞서서 남을 구속하고자 하는 계책은 사문의 커다란 변괴가 아닐 수 없다고 손씨의 행동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사태는 손씨들 스스로가 지은 잘못이니 용서할 수 없으며, 병산서원 자신들 또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의리의 관계가 지극히 중한 것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옥산서원에서 빨리 손씨들에게 무거운 벌을 내려 유림의 명부에서 그들을 영원히 삭제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으며 허물을 반성하게 해야 한다며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은 ‘손이시비’, 즉 회재와 우재 사이에 사승관계가 있는가, 없는가하는 문제에서 나온 것이다. 이 통문이 발행되기 전까지 여론이 손씨들에게 불리했다. 그런데 이만도, 이병호, 이만규 등 3인에게서 회재의 행장에 퇴계가 ‘후학’이라고 한 것은 이씨들이 두찬한 것이라는 설이 나왔다. 여론의 악화로 수세에 몰린 손씨들은 이것을 근거로 『회재집』을 파판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통문에서도 보는 것처럼 그것은 이씨들의 두찬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자 이씨측에서는 손씨들에게 역공을 펼쳤다. 그러면서 이씨들은 태학과 호서유생‧호남유회소 등 전국적으로 통문을 보내 손씨들을 강력하게 성토하였다. 그 결과 1906년 윤 4월 태학에서는 회재에 대한 평가는 이미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과 정조가 쓴 제문에 사승이 없다는 명백한 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두찬했다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의 통문을 보내왔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당초 손씨들을 지지하던 일부 유림들조차 이씨들의 편으로 전향해왔다. 이 통문은 바로 여주이씨경주손씨 사이의 시비에서 여론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정황들이 이씨들에게 유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民族文化論叢』제42집 「경주지역 孫李是非의 전말」,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이수건,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0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06년 1월 25일, 驪州李氏들이 晦齋에 대한 退溪의 行狀을 杜撰했다는 慶州孫氏들의 誣告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며 玉山書院에 보낸 屛山書院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906년 1월 25일 屛山書院에서 玉山書院로 보낸 通文으로 그 내용은 晦齋에 대한 退溪의 行狀을 驪州李氏들이 杜撰했다고 誣告한 慶州孫氏들에게 重罪를 내리라는 것이다. 병산서원에서 옥산서원에 이러한 통문을 보내게 된 까닭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 통문은 文元公 회재 李彦迪의 문집 간행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회재의 문집이 간행된 지 몇 백 년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퇴계선생이 지은 회재의 행장에 관한 글이 별과 해처럼 뚜렷이 게재되어 있는 것이 진정 금석과 같은 완전한 책이며, 그 年月의 아래 끝에 ‘後學’이라는 두 글자는 회재를 높이고 사모하며 우러러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은 『晦齋集』 안의 부록에 실려 있으며, 『退溪集』 안에 원문으로 실려 있어 이미 여러 선배들의 교정과 편집의 손을 거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퇴계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도산서원光明室 가운데 초판본과 중간본이 엄연히 갖추어져 있어 눈이 있으면 모두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그 실제에 대해 강조하였다. 이 통문에서 이렇게 퇴계회재의 행장 끝에 ‘후학’이라는 두 글자를 쓴 것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 여주이씨들의 두찬이라고 경주손씨들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경주손씨의 종가인 書百堂여주이씨無忝堂를 몰아내기 위해 奴子에게 보낸 牌旨를 보면 퇴계선생이 칭한 ‘후학’이라는 두 글자는 양동의 이씨들이 멋대로 고친 것이니 회재집의 목판을 파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경주손씨들이 국량을 알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이 통문은 회재집『퇴계집』이 우리나라에 있어 『論語』朱子의 책과 같은 것이어서 손씨들의 한 줄 글귀의 단정으로 쉽게 책판을 破碎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금 愚齋 孫仲暾의 實記를 重刊하는데 도산서원으로부터 그것을 파쇄하라는 통문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그 책판을 파쇄했어야 하는데도, 이렇게 억지로 간행하고 억지로 배포하는 일이 있고, 또 해괴하고 망령된 말을 지어내어 맞서서 남을 구속하고자 하는 계책은 斯文의 커다란 변괴가 아닐 수 없다고 손씨의 행동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사태는 손씨들 스스로가 지은 잘못이니 용서할 수 없으며, 병산서원 자신들 또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의리의 관계가 지극히 중한 것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옥산서원에서 빨리 손씨들에게 무거운 벌을 내려 유림의 명부에서 그들을 영원히 삭제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으며 허물을 반성하게 해야 한다며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주된 내용은,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에 ‘후학’이라는 두 글자가 없는데 여주이씨들이 멋대로 집어넣었다고 경주손씨들이 牌旨를 돌려 비난했다는 것이다. 경주손씨들이 그렇게 한 것은 당시 여주이씨들과의 시비에서 수세에 몰린 자신의 처지를 만회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 시비는 본 통문이 발행되기 100년 이상부터 시작된 해묵은 것이다. 그 시작은 1773년(영조 49) 손중돈을 배향하는 동강서원의 묘우를 중건할 때 大山 李象靖가 작성한 廟宇重建上樑文에서부터이다. 1905년에 중간된 『경절공실기』에 따르면 이 상량문 속에 회재가 우재의 道脈을 的授했다는 말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씨들은 강력히 항의했고, 그로 인해 이 상량문은 당일로 勘定되어 본가로 돌려보내지면서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1845년(헌종 11) 『愚齋實記』를 증보하여 간행할 당시 문제의 상량문을 실으려 하자 다시 이씨들이 강력히 반발하며 나섰다. 이씨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鄕內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들을 압박했다. 그 과정에서 三溪東洛洛峰南江書院 등에서 이씨들을 지지하는 통문을 보내왔으며, 虎溪書院에서는 양자를 중재하는 통문을 보내왔다. 이때의 사태는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량문의 작성 당시와 같이 이씨들의 항의와 도내 유림의 여론에 굴복해 손씨들이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다시 이 문제가 불거진 것은 이 통문이 발행되기 2년 전인 1904년에 이씨의 종가인 무첨당에 소장되어 있던 『驪江世稿』에서 회재가 우재에 대해 쓴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어 이를 계기로 손씨들이 『景節公實記』를 중간하면서부터였다. 이때 손씨들은 새롭게 발견된 그 장문과 만사를 실기에 싣는 것은 물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그 상량문에 있던 ‘淵源道脈’이라는 구절에 附註하고, 이를 근거로 孫海翼, 孫最秀 등이 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서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詩와 跋을 眞城李氏李晩燾, 李炳鎬, 李晩煃로부터 얻어 싣고 1904년 4월에 배포하였다. 손씨들이 이 실기에 진성이씨 3인의 시와 발을 받아 실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손씨들이 의도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씨들은 즉각 인근 향내 14개 門中에 回文하여 옥산서원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이씨들은 이 문제가 학문적 연원과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에 단순히 문중 차원의 문제가 아닌 사림 사회의 道脈과 관계된다는 점을 통문을 통해 향내와 도내 사림에 알렸다. 그 결과 이 두 문중 사이의 시비는 초기부터 곧바로 경상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양측 간에 통문을 통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문제의 상량문을 쓴 이상정을 배향하는 高山書堂에서도 ‘연원도맥’이라는 구절이 잘못된 것으로 손씨들의 처사를 비판하는 통문을 보내오는 등 대부분의 여론은 이씨들에게로 기울어졌다. 본 통문에서도 도산서원으로부터 우재의 실기를 파쇄하라는 통문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이미 여론의 향배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때에 이만도 등 3인에게서 회재의 행장에 퇴계가 ‘後學’이라고 한 것은 이씨들이 두찬한 것이라는 설이 나왔다. 여론의 악화로 수세에 몰린 손씨들은 이것을 근거로 회재집을 파판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오게 되었다. 이 통문은 바로 손씨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병산서원에서 의견을 낸 것이다. 이 통문에서도 보는 것처럼 그것은 이씨들의 두찬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자 이씨측에서는 ⅰ) 이상정의 상량문은 잠시 썼다가 바로 지운 것인데, 손씨들이 이것을 고쳐서 실기의 중간에 넣은 것, ⅱ) 손씨들이 주장하는 家狀이 회재의 手本이라는 증거가 없는데도 諱를 쓴 것, ⅲ) 퇴계가 쓴 회재의 行狀에 ‘후학’ 두 자가 없었다며 선현을 모욕한 것, ⅳ) 正祖가 쓴 회재의 제문에도 회재의 師承이 없고 바로 濂洛에 소급한다고 했고, 퇴계가 쓴 狀文에도 회재가 학문의 가르침을 받은 곳이 없다고 한 것 등을 들어서 손씨들에게 역공을 펼쳤다. 그러면서 이씨들은 太學과 湖西儒生‧湖南儒會所 등 전국적으로 통문을 보내 손씨들을 강력하게 성토하였다. 그 결과 1906년 윤 4월 태학에서는 회재에 대한 평가는 이미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과 정조가 쓴 제문에 師承이 없다는 명백한 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두찬했다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의 통문을 보내왔다. 그러자 이씨들은 이 통문을 즉시 도내 전역에 돌리는 한편, 손씨들의 실기는 파판하고 문제를 일으킨 이만도 등의 3인을 성토하고 그들이 쓴 詩와 跋을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당초 손씨들을 지지하던 일부 유림들조차 이씨들의 편으로 전향해왔다. 이 통문은 바로 여주이씨경주손씨 사이의 시비에서 여론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정황들이 이씨들에게 유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18세기 이후 중앙정계에서 물러난 嶺南 南人들이 鄕村에 집중하면서 그 주도권을 두고 士族 상호간에 벌어진 鄕戰의 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비는 19세기 중반 이후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안고 있었다. 영남 내의 시비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이 학문적 淵源과 位次의 문제로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그리고 바로 慶州의 ‘孫李是非’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門中 간의 문제가 아니라 他地域의 문중들에까지 확대됨으로써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크게 번져갔다. 이 통문은 바로 이러한 시비에서 제삼자들의 여론이 어디로 기울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民族文化論叢』제42집 「경주지역 孫李是非의 전말」,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이수건,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0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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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06년 병산서원(屛山書院)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 伏以文元公晦齋先生文集刊行于世今 未知幾百年所 而退溪先生所著行狀狀文 有如日星之昭揭 是眞金石之完書 其末年月之下特
稱後學二字 以寓尊慕景仰之忱 晦齋集中以附錄載之 退溪集中以原文載之 已經諸先輩校正編摩之手 而以退溪集言之 光明室中初本中本 森然
俱在 有目皆覩焉 敢誣也 卽見書百堂 所抵無忝堂 奴子處牌旨 以退溪先生所稱後學二字 謂之良李氏之杜撰 至有破板之說 嘻多見其不知量
晦退兩集 卽是我東方魯論朱書 而容易破板於孫氏之一筆句斷耶 今者愚齋孫先生實紀之重刊也 自陶山出破板之通 是乃已破之板而有此 勒刊
勒布之擧 又做出駭妄之語 欲爲對待鉗制之計 是豈非斯文之大變怪耶 盖兩家爭端 迄今幾歲而鄙院之每以調停言之 不過軆念當日舅甥之誼也 到今
事軆孫氏自作之孽 不可容貸 生等亦豈樂爲之哉 義理之關係至重故也 伏願僉尊亟施重罰 永削儒林 俾爲悔悟省愆之地 倖甚
右文通
玉山書院
丙午正月二十五日屛山書院都有司幼學李秉欽
齋有司幼學柳在榮
鄭斗燮
會員幼學鄭蘭榮
進士柳道弼
柳道龜
幼學金秉璜
李宅鍾
柳道精
權述鳳
李亨魯
金洛銓
柳鶴榮
權準國
李宅昌
金洛書
校理柳道緯
幼學柳錫佑
柳鼎佑
金秉直
權準弼
金租洙
李秉紀
李在鳳
權準河
柳漢佑
柳源植
金秉烈
金永胤
柳圭榮
柳德榮
柳道淵
金洛謨
權準夏
進士金洛獻
幼學金泳在
權準惪
金永國
參奉柳敎榮
幼學柳近佑
柳東濬
柳東夔
金鍾晩
柳道鉉
李大淵
柳東洛
權東稷
參奉柳東榮
參奉金昌燮
幼學柳冕榮
金禧洙
柳泰魯
柳萬佑
進士柳南植
主事權準興
幼學柳肯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