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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낙빈단소(洛濱壇所) 회중(會中)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906.2771-20140630.Y145010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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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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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이중근, 낙빈단소 회중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792번지
작성시기 1906
형태사항 크기: 61 X 89.2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06년 낙빈단소(洛濱壇所) 회중(會中) 통문(通文)
1906년 4월 8일 낙빈단소 회중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경절공실기』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서 연원한다는 글을 실은 진성이씨 3인과 이를 근거로 『회재집』의 파판을 주장하는 경주손씨들을 유적에서 삭제하라는 것이다. 이 통문은 먼저 이 시비의 당사자인 경주손씨여주이씨의 태도가 군자답지 못함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 비판의 초점은 손씨에게로 쏠렸다. 이 통문을 발행한 사람들은 손씨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은 악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익히 잘 알고 있지만, 『회재집』의 목판을 파쇄해야 한다는 패지가 있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이 패지는 『경절공실기』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서 근원하고 그의 도맥을 직수했다는 시와 발문을 쓴 이만도이만규이병호 이 세 사람이 회재의 행장에 퇴계가 ‘후학’이라고 쓴 것은 이씨들이 임의로 집어넣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손씨들은 이를 근거로 『회재집』의 목판을 파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퇴계는 회재의 행장에서 그의 학문이나 도맥을 주고받은 곳이 없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끝에 ‘후학’이라는 두 글자를 쓴 것이 『회재집』『퇴계집』에 분명히 존재하였다. 그래서 지금의 유림에서는 이것을 신명과 같이 받들고 금석과 같이 신뢰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손씨들이 좁은 소견으로 ‘후학’이라는 두 글자를 들추어내어 그것을 증거로 이씨들을 압박하고 이미 파쇄된 『경절공실기』을 간행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유자의 복장을 하고 있는 자라면 누구든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옥산서원에서 빨리 이들에게 중벌을 내리고 유적에서 영원히 삭제하여 경솔한 죄에 대해 경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통문은 ‘손이시비’, 즉 회재우재 사이에 사승관계가 있는가, 없는가하는 문제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 통문은 『경절공실기』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서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시와 발문을 쓴 퇴계의 후손 세 사람이 주장한 것, 즉 회재의 행장에 퇴계가 ‘후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또 이것을 근거로 패지를 돌려 『회재집』의 목판을 파쇄해야 한다고 주장한 손씨들을 함께 비판한 것이다. 진성이씨 세 사람의 말이 있기 말이 있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론에서 일방적으로 밀렸던 손씨들은 이를 계기로 회재의 후손인 여주이씨들을 공격하여 『회재집』을 파판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론은 손씨들의 의도대로 흐르지 않았다. 이씨들은 손씨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여러 가지 자료와 논리로 역공을 펼쳤다. 그 결과 1906년 윤 4월 태학에서는 회재에 대한 평가는 이미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과 정조가 쓴 제문에 사승이 없다는 명백한 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몰래 집어넣다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의 통문을 보내왔다. 이렇게 전국의 여론이 이씨 측으로 기울자 당초 손씨들을 지지하던 일부 유림들조차 이씨들의 편으로 전향해왔다. 이 통문에서 말미에 유자의 복장을 하고 있는 자라면 누구든 회재퇴계의 후생이 아닐 수 없으니, 옥산서원에서 빨리 이들에게 중벌을 내리고 유적에서 영원히 삭제하여 경솔한 죄에 대해 경고하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시비에서 여론의 향배는 전적으로 이씨들에게 기울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民族文化論叢』제42집 「경주지역 孫李是非의 전말」,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이수환,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0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906년 4월 8일, 『景節公實記』晦齋의 學問이 愚齋에게서 淵源한다는 글을 실은 3人의 眞城李氏와 이를 빌미로 『晦齋集』을 破板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慶州孫氏들의 처벌을 玉山書院에 건의하는 洛濱壇所 會中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906년 4월 8일 洛濱壇所 會中에서 玉山書院로 보낸 通文으로 그 내용은 『景節公實記』晦齋의 學問이 愚齋에게서 淵源한다는 글을 실은 眞城李氏 3人과 이를 근거로 『晦齋集』의 破板을 주장하는 慶州孫氏들을 儒籍에서 削除하라는 것이다. 이 통문은 이들에게 이와 같이 처벌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통문은 먼저 君子가 서로 다툴 때는 자신의 뜻을 굽히고 말을 부드럽게 하여 조용히 사태를 논하여서 士林의 公議에서 바름을 취하고 돌아가 머물 곳을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군자들의 다툼이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질책하는 말이다. 그러한 싸움이 바로 우재 孫仲暾의 후손인 경주손씨회재의 후손인 驪州李氏 사이의 是非이다. 이 통문 또한 두 성씨 사이의 시비만은 유독 그렇지 못하다고 질책하였다. 이 통문을 발행한 사람들은 손씨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은 惡習에서 유래한 것으로 익히 잘 알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회재집』의 목판을 파쇄해야 한다는 牌旨가 있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이 말은 손씨와 이씨의 시비에서 손씨의 처사가 무례하면서도 경우에 지나치다는 비판이다. 그래서 손씨들이 한번 氣力을 발출하면 한 가지 해괴하고 망령된 일을 저지른다고 탄식하였다. 그러면서 패지가 있게 된 연유를 기술했다. 거기에 따르면 손씨들의 근거 없는 계략으로 말미암아 퇴계의 후손 세 사람이 倀鬼가 되었다는 것이다. 李晩燾李晩煃李炳鎬 이 세 사람이 『경절공실기』를 중간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 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면, 『경절공실기』를 만들 수 없었고, 『회재집』을 파판하자는 설도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세 사람이 『경절공실기』에 지은 글을 보면 全篇의 핵심을 학문의 연원과 道脈의 授受에 두었는데, 수수가 없었다는 뜻을 참고하면서 가정에서 들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퇴계의 후손들이 『경절공실기』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서 근원하고 그의 도맥을 직수하였다고 하지만,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에는 그의 학문이나 도맥을 주고받은 곳이 없다고 하였으니 집안에서 그러한 말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 행장의 끝에 ‘後學’이라고 써서 영원히 우러러 사모한다는 표식을 보였는데, 지금의 유림에서는 이것을 神明과 같이 받들고 金石과 같이 신뢰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손씨들이 좁은 소견으로 ‘후학’이라는 두 글자를 들추어내어 증거로 援用하여 이씨들을 압박하고 이미 파쇄된 『경절공실기』을 간행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 뜻이 외람되며, 그 말이 도리에 어긋난다고 비판하였다. 무릇 儒者의 복장을 하고 있는 자라면 누구든 회재퇴계의 後生이 아닐 수 없으니, 손씨들의 그러한 말과 주장을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어 이렇게 통문을 발행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옥산서원에서 빨리 이들에게 重罰을 내리고 유적에서 영원히 삭제하여 경솔한 죄에 대해 경고해준다면 참으로 다행이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은 18세기 이후 班村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던 ‘文字’ 시비 중의 하나로 그 뿌리는 깊고 그 기간은 오래된 것이다. 먼저 이 시비는 이 통문이 발행되기 1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 시초는 1773년(영조 49) 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의 廟宇를 重建할 때 大山 李象靖이 작성한 廟宇重建上樑文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에 중간된 『경절공실기』에 따르면 이 상량문 속에 회재우재의 도맥을 的授했다는 말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회재의 후손인 여주이씨들은 강력히 항의했고, 그로 인해 이 상량문은 당일로 勘定되어 本家로 돌려보내지면서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손씨들이 1845년(헌종 11) 『愚齋實記』를 증보하여 간행하면서 문제의 상량문을 다시 실으려 하자 이번에도 또한 이씨들이 강력히 반발하며 나섰다. 이씨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鄕內뿐만 아니라 道內 전역에 통문을 돌려 손씨들을 압박했다. 그 과정에서 三溪東洛洛峰南江書院 등에서 이씨들을 지지하는 통문을 보내왔으며, 虎溪書院에서는 양자를 중재하는 통문을 보내왔다. 이때의 사태가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량문의 작성 당시와 같이 이씨들의 항의와 도내 유림의 여론에 굴복해 손씨들이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다시 이 문제가 불거진 것은 이 통문이 발행되기 2년 전인 1904년에 이씨의 宗家인 無忝堂에 所藏되어 있던 『驪江世稿』에서 회재우재에 대해 쓴 狀文과 輓詞가 발견되어 이를 계기로 손씨들이 『景節公實記』를 중간하면서부터였다. 이때 손씨들은 새롭게 발견된 그 장문과 만사를 실기에 싣는 것은 물론 여기에 추가로 이언적의 諱를 쓰고, 또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그 상량문의 ‘淵源道脈’이라는 구절에 附註하고, 이를 근거로 孫海翼, 孫最秀 등이 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서 연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詩와 跋을 진성이씨이만도, 이만규, 이병호로부터 얻어 싣고 1904년 4월에 배포하였다. 손씨들이 이 실기에 진성이씨 3인의 시와 발을 받아 실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손씨들이 의도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씨들은 즉각 인근 鄕內 14개 門中에 回文하여 옥산서원에서 손씨들을 성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이씨들은 이 문제가 학문적 연원과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에 단순히 문중 차원의 문제가 아닌 사림 사회의 道脈과 관계된다는 점을 통문을 통해 향내와 도내 사림에 알렸다. 그 결과 이 두 문중 사이의 시비는 초기부터 곧바로 경상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양측 간에 통문을 통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문제의 상량문을 쓴 이상정을 배향하는 高山書堂에서도 ‘연원도맥’이라는 구절이 잘못된 것으로 손씨들의 처사를 비판하는 통문을 보내오는 등 대부분의 여론은 이씨들에게로 기울어졌다. 본 통문에서도 이미 파쇄된 『경절공실기』을 간행하고자 한다고 한 것을 보면 여론의 향배는 이씨 측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시비가 마무리되어갈 쯤에 본 통문에서 말한 것, 즉 『경절공실기』회재의 학문이 우재에게 연원한다는 등의 시와 발문을 쓴 진성이씨 세 사람에게서 회재의 행장에 퇴계가 ‘후학’이라고 한 것은 이씨들이 멋대로 집어넣은 것이라는 설이 나왔다. 이러한 설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론에서 수세에 몰린 손씨들은 이를 근거로 이씨들을 압박하려 하였다. 이 통문을 보면 아마도 손씨들은 이러한 설을 패지에 담아 각 院祠와 門中에 돌리면서 『회재집』을 파판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통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론은 손씨들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퇴계회재의 행장에서 그의 학문이나 도맥을 주고받은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아래에 자신을 ‘후학’이라고 쓴 것이 『회재집』과 『퇴계집』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씨 측에서는 ⅰ) 이상정의 상량문은 잠시 썼다가 바로 지운 것인데, 손씨들이 이것을 고쳐서 실기의 중간에 넣은 것, ⅱ) 손씨들이 주장하는 家狀이 회재의 手本이라는 증거가 없는데도 諱를 쓴 것, ⅲ) 퇴계가 쓴 회재의 行狀에 ‘후학’ 두 자가 없었다며 선현을 모욕한 것, ⅳ) 正祖가 쓴 회재의 제문에도 회재의 師承이 없고 바로 濂洛에 소급한다고 했고, 퇴계가 쓴 狀文에도 회재가 학문의 가르침을 받은 곳이 없다고 한 것 등을 들어서 손씨들에게 역공을 펼쳤다. 그러면서 이씨들은 太學湖西儒生‧湖南儒會所 등 전국적으로 통문을 보내 손씨들을 강력하게 성토하였다. 그 결과 1906년 윤 4월 태학에서는 회재에 대한 평가는 이미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과 正祖가 쓴 祭文에 師承이 없다는 명백한 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두찬했다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의 통문을 보내왔다. 그러자 이씨들은 이 통문을 즉시 도내 전역에 돌리는 한편, 손씨들의 실기는 파판하고 문제를 일으킨 이만도 등의 3인을 성토하고 그들이 쓴 시와 발문을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당초 손씨들을 지지하던 일부 유림들조차 이씨들의 편으로 전향해왔다. 이 통문의 말미에 유자의 복장을 하고 있는 자라면 누구든 회재퇴계의 후생이 아닐 수 없으니, 옥산서원에서 빨리 이들에게 중벌을 내리고 유적에서 영원히 삭제하여 경솔한 죄에 대해 경고하라고 한 것을 보면 시비에서 여론의 향배는 전적으로 이씨들에게 기울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18세기 이후 중앙정계에서 물러난 嶺南 南人들이 鄕村에 집중하면서 그 주도권을 두고 士族 상호간에 벌어진 鄕戰의 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비는 19세기 중반 이후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 안고 있었다. 영남 내의 시비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이 학문적 淵源과 位次의 문제로 安東의 ‘屛虎是非’, 星州의 ‘寒旅是非’ 그리고 바로 慶州의 ‘孫李是非’이다. 이들 시비는 단순히 해당 門中 간의 문제가 아니라 他地域의 문중들에까지 확대됨으로써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크게 번져갔다. 이 통문은 바로 이러한 시비에서 제삼자들의 여론이 어디로 기울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民族文化論叢』제42집 「경주지역 孫李是非의 전말」,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이수환, 일조각, 1995
『良佐洞硏究』,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0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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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낙빈단소(洛濱壇所) 회중(會中)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 伏以君子之相爭也 降志順辭 從容論事 以取正於士林公議 而有歸宿處焉 獨孫李氏是非不然 生等熟知孫氏拳踼
由來惡習 而不圖今日 有晦翁集破板牌旨 爲世燮至此極矣 噫出一氣力 作一駭妄 雖由於孫氏無據之手 而陶山三人實爲之倀焉
貴院通中 所稱李晩燾李晩煃李炳鎬三人者 是巳盖景節公重刊實紀 非藉此三人之力 不能作也 實紀不作 晦翁集破板之說
從何敢出也 仄見三人之曾所著說於實紀中者 全篇肯綮亶在於淵源道脉而已 則參以無授受之義 謂之有庭聞 可乎 退陶夫子以大公至
正之筆 撰晦齋先生狀德文曰 無授受處 末行書後學 以示景慕之千古信蹟 至今儒家奉之如神明 信之如金石 孫氏區區管見 忿然援
證摘出後學二字 自以爲壓制李氏 欲行其已破之實紀 其志濫矣 其言悖矣 凡我冠服儒者 莫非兩先生之後生 則豈可忍聽而忍說耶
伏願貴院亟施重罰 永削儒籍 以警妄率之罪 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丙午四月初八日洛濱壇所會中有司進士李根重
幼學朴泰東
製通崔鍾震
朴憙東
寫通都達浩
李根永
會員都殷浩
徐翼坤
李玄升
朴海喬
朴熙東
崔鍾奭
孫曾憲
朴秀喆
蔡鳳基
朴曾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