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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예안도회소(禮安道會所)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898.4790-20140630.y14501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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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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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김병황, 이현섭, 김호상, 예안도회
작성지역 경상북도 예천군
작성시기 1898
형태사항 크기: 97.5 X 58.4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98년 예안도회소(禮安道會所) 통문(通文)
1898년(광무 2) 11월 3일, 예안도회소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내온 통문으로 퇴계선생의 자취가 서린 吾山堂을 다시 건축하는데 비용을 분담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은 할당된 비용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먼저 오산당퇴계선생이 머물러 그 자취가 서려있는 곳으로 천년의 역사를 가진 주희무이정사와 필적할 만큼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영남인들은 누구나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그 도리를 연구하여 밝히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산당은 바로 모든 영남인들이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곳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병신년(1896)에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이 청량산이 없어지지 않는 한 오산당 또한 사라지지 않으며, 우리의 도리가 실추되지 않는 한 오산당 또한 없을 수 없다고 이 통문은 강조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도산서당에 모여 난상토론을 벌일 끝에 오산당을 다시 신축하기로 의논을 모으고 각 고을에 비용을 하게 되었으니, 돈을 거두는데 보내주어 큰일을 도와주면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오산당은 곧 청량정사을 가리키며, 오산당은 정사의 당이다. 이곳은 안동부사를 지낸 퇴계선생의 숙부인 송재 이우가 청량산에 건립하였다가, 1832년(순조 32)에 사림에서 다시 창건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된 지 2년여 만에 다시 건축하기로 결의하고 이 통문을 돌려 각 고을에 비용을 분담시켰다. 당시 오산당을 재건하는데 옥산서원이 요청받은 분담금은 100냥이었고, 오산당1901년 완공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98년 11월 3일, 禮安道會所에서 淸凉山에 있는 吾山堂을 다시 新築하는데 드는 費用을 分擔해줄 것을 요청하며 玉山書院에 보내온 通文
[내용 및 특징]
1898년(광무 2) 11월 3일, 禮安道會所에서 玉山書院로 보내온 通文으로 退溪先生의 자취가 서린 吾山堂 다시 신축하는데 비용을 분담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은 할당된 비용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먼저 오산당퇴계선생, 그리고 퇴계선생과 嶺南人의 관계를 언급하였다. 그에 따르면 오산당퇴계선생이 머물러 그 자취가 서려있는 곳으로 천년의 역사를 가진 朱熹武夷精舍와 필적할 만큼 아름답다. 게다가 영남들은 누구나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그 도리를 연구하여 밝히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양정사는 모든 영남인들이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곳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병신년(1896)에 청량산이 화재를 당할 때에 오산당 또한 그 재앙을 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청량산이 없어지지 않는 한 오산당 또한 사라지지 않으며, 우리의 도리가 실추되지 않는 한 오산당 또한 없을 수 없다고 이 통문은 강조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도산서당에 모여 난상토론을 벌일 끝에 오산당을 다시 신축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처음 오산당을 지을 때의 사례에 따라 각 고을에 비용을 분담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일이 이미 시작되었으니 애를 쓰고 힘을 모으지 않으면 완공이 지연될 염려가 있다. 그러니 돈을 거두는데 힘써서 할당된 금액을 보내주어 큰일을 도와주면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오산당은 곧 청량정사을 가리키며, 오산당은 정사의 堂이다. 이곳은 안동부사를 지낸 퇴계선생의 숙부인 松齋 李堣가 청량산에 건립하여 조카인 溫溪퇴계를 비롯하여 曺孝淵, 吳彦毅 등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그 후 퇴계선생이 이곳에 머물며 성리학을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또한 퇴계선생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陶山十二曲」을 지었으며, 자신을 淸凉山人이라고 부를 만큼 청량산의 아름다움에 심취하였다. 이 통문에서 이곳이 퇴계선생의 자취가 서려있고, 주희무이정사와 필적할 만큼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림에서는 이곳을 소중히 여겨 1832년(순조 32)에 창건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1896년(건양 1)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이 통문에서 병신년 화재로 재앙을 면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통문은 오산당이 소실된 지 2년여 만에 다시 건축하기로 결의하고 각 고을에 분담된 비용을 거두어 보내주기를 당부하고 있다.
이 통문이 담고 있는 내용처럼 선현을 기념하는 건물을 증‧개축하거나 책자를 출간할 때 비용을 요구하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어느 한 곳이 전담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비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요청을 받은 곳은 냉정하게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형편에 따라 도움을 주는 것이 또한 관례였다. 옥산서원1839년(헌종 5) 강당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도움을 요청했고, 요청을 받은 곳들은 십시일반으로 扶助해와 무사히 강당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상부상조하는 일은 서원의 각종 都錄, 置簿記, 重修·重建日記, 考往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오산당을 재건하는데 옥산서원이 요청받은 분담금은 100냥이었고, 오산당1901년 완공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오산당을 재건하는데 있었던 일들을 보여주는 자료이자, 당시 서원들이 어려움이 있을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사실을 증거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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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98년 예안도회소(禮安道會所) 통문(通文)

通文
右通諭事 伏以淸凉之吾山堂 卽我退陶夫子杖屨之所 而與武夷精舍千載而匹美者也 凡我嶠南人士承襲乎夫子
之敎 講明乎夫子之道者 孰不以斯堂爲依歸哉 丙申災燹 不幸爲氣數之會 而夫子之堂宇 竟亦不免 於乎玆山不騫 則斯堂不可廢矣 吾道不墜 則
斯堂不可無矣 生等不勝免葵之咸 迺敢齊會於宮墻之下 爛商而亟謀重新 任司諸員 各是先父老後承 列邑排費 一從始創時已例 其在
秉彛所同 必無岐貳 而業已始手 苟不刻意用力 恐有遷延時月之慮 僉須愓勵收送 以相大役 千萬幸甚
右通通
玉山書院 排錄 栢兩
戊戌十一月初三日禮安道會所公事員幼學金秉璜
進士李鉉燮
金鎬相
幼學李時佐
李中岳
金斗鉉
丁奎悳
趙秉禧
金禹奎
鄭柱璣
曺司幼學李鉉埰
洪學鍾
李守麟
申相奎
權相殷
李建鎬
金永檍
趙振容
進士姜澮
鄭東潤
幼學李韶久
朴漢緖
宋斗煥
金荷奎
權準學
權珠淵
製通進士柳膺睦
幼學金基洛
鄭象欽
寫通幼學金啓相
柳敎榮
鄭世洛
李塤發
李炳七
會員幼學金尙欽
柳蘭榮
李宗發
金駿遠
李義行
李章文
尹就五
權進吾
金輝璟
權秉常
權永祚
金彦根
李世綱
承旨鄭宜默
幼學鄭武欽
權永松
李璹淵
金秉吉
鄭東一
宋寅鈺
鄭炳逵
鄭東年
金時昊
金圭相
安祐慶
琴鼎基
任禹準
李殷淵
金鳳秀
趙彦瓚
金弼奎
高{氵+奭}
權宜一
李起渤
琴纘圭
金奎晉
進士金輝澤
幼學權應壽
柳薰祚
都事柳喬榮
幼學鄭哲欽
趙榮基
全奎龍
李泰一
金輝錫
金基鎭
張復淳
李竝轍
宋台玉
申相發
朴章煥
吳建永
權益淵
柳璋祚
柳東濬
尹夏甲
黃永來
權準悳
進士李郁成
幼學權國燦
金永國
安燦重
許{金+晉}
權衡模
李炳周
李鍾萬
丁奎昌
趙寅錫
柳東榮
朴鎬九
宋相奭
鄭炫鍾
李潤昌
金炳鎭
鄭在基
此亦中
收錢一款悉
有中間經推之弊
自去院揀任◉近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