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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도남서원(道南書院) 회중(會中)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870.4725-20140630.y14501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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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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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이능용, 도남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도남2길 91
작성시기 1870
형태사항 크기: 60.2 X 91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70년 도남서원(道南書院) 회중(會中) 통문(通文)
1870년(고종 7) 윤10월 20일, 도남서원 회중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우산서원을 복원해달라는 상소를 올리기 위한 회합을 다음해 1월 21일에 개최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우산서원은 우복 정경세를 주벽으로 하고 입제 정종로를 추배하는 서원이기에 영남의 이름난 인물들을 배향하는 병산서원, 임천서원, 회연서원, 동락서원과 동일한 규모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산서원은 이들 서원과 다르게 사액을 받지는 못한 처지에서 이렇게 훼철을 당하게 되어 참으로 애통하고 절박한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제향인의 위패를 매안하는 날에는 바로 대궐문에 나아가 호소하자는 의론이 일어 각자 임무를 분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대동소를 발의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이때는 어쩔 수 없이 그러했으나 이미 추진된 일이라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선비들의 사기가 떨쳐 일어나지 않아 대동소의 일은 이제 다시 바랄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일을 이렇게 되도록 버려둔다면, 우리 사림은 끝나게 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에 다시 대동소를 발의하게 되었다고 이 통문의 의도를 밝혔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내년 1월 21일에 聞慶의 新院에서 회합을 가지기로 정하였으니 도내의 여러분들이 모두들 와주었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은 미사액 원사의 훼철이 시작된 1868년(고종 5) 직후에 발행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새로운 원사에 대한 금령과 남설 되고 복설된 원사에 철폐령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고종 때의 철폐령은 이전과는 다르게 철저하고도 집요했다. 그래서 1871년 서원철폐령 이후에는 문묘종사인과 충절대의인을 배향한 47개 사액원사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18세기 이후 사환의 길이 막힌 영남 남인에게는 일문을 모아서 동족간의 연결과 결속을 도모하는 구심점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우산서원을 복원하려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보다 큰 흐름으로 연결되었다. 다시 말해서 1871년에는 전국에 문묘종사인과 충절대의인을 배향하는 47개 원사만을 남기고 모두 훼철하라는 더욱 엄한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영남의 유생들은 도남서원호계서원을 중심으로 소회를 열고, 4월 28일에는 의성향교에서 정경세의 후손인 정민병을 소수로 선출하여 서원훼철에 반대하는 10,027명이 서명을 붙인 만인소를 올렸던 것이다.
『만 사람의 뜻은 천하의 뜻 만인소』,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한국국학진흥원, 2007
「경상도 書院·祠宇의 건립추이와 제향인물의 성격」,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70년 閏10월 20일, 興宣大院君의 書院撤廢令으로 毁撤된 愚山書院을 復原해달라는 上疏를 올리기 위한 會合을 玉山書院에 알리는 道南書院 會中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918년 9월 10일, 陽山書堂에서 玉山書院로 보내온 通文으로 그 내용은 圃隱 鄭夢周를 새로이 主壁으로 세우고 敬齋 洪魯를 비롯한 洪氏의 세 賢人을 配享하는데 동의하는지에 대해 문의해온 것이다. 양산서당에서 옥산서원에 이러한 문제로 문의하게 된 내력을 이 통문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통문에 따르면 陽山홍로가 은거하여 머물던 곳이며, 그의 후손인 虛白堂 洪貴達寓菴 洪彦忠가 대를 이어 살아온 마을이다. 그래서 거기에 서원을 세우고 모두 함께 祭享을 해온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최근 4~50년 사이에 그곳에는 들풀만 무성하게 자란 것을 보면 유림과 관계된 자라면 통한의 마음이 없을 수 없다. 또한 홍로文忠公 포은 정몽주 문하의 빼어난 제자로 학문의 연원이 확실하고, 절개와 의리가 서로 들어맞는 것이 하늘의 해와 별처럼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文敬公 許珙가 젊은 날에 쓴 글과 文肅公 蔡濟恭가 새긴 금석문에 남김없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홍로가 벼슬을 그만둘 때 쓴 書帖 중에서 스승과 제자가 의리를 지켰다는 글을 얻었다. 이를 쓴 종이와 그 墨痕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이것은 하늘과 신령이 도우신 것으로 자손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斯文의 경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몽주의 후손들이 양산에다 포은을 주벽으로 하고 홍씨의 세 현인, 즉 홍로홍귀달, 그리고 홍언충을 배향하는 석채례를 거행하자는 의견을 편지를 통해 보내왔다. 그리고 龍仁深谷, 開城崧陽, 晉州玉山, 永川臨皐, 善山金烏洛峯도 동시에 따르겠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이에 대해 양산서당의 사람들은 異議가 없었으나, 이 일이 유림의 의론과 관계되는 일이기에 이렇게 알리게 되었다. 그러니 옥산서원에서 빠르게 한 말씀을 회답하여 선현을 추모하는 정성을 실현할 수 있게 해준다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이 통문은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양산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있는 것으로 양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홍로가 이곳을 거처로 삼은 것은 고려가 점점 혼란해지자 병을 핑개로 사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일찍이 성리학과 고금의 가례, 그리고 『伊洛淵源錄』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리고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5세에인 1390년(공양왕 2)에 대과에 급제하여 정몽주의 추천으로 翰林學士가 되었다가 門下舍人으로 승진하였다. 이 통문에서 홍로정몽주 문하의 빼어난 제자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 후 李穡曺敏修를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홍로는 이들을 적극 변호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라는 점점 더 어려움 혼란 속으로 빠져들자 고향인 군위로 돌아와서는 "신은 나라와 함께 망하겠습니다. 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홍로가 보여준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후세 사람들로부터 出處가 바르고 志節이 굳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 통문에서 홍로를 학문의 연원이 확실하고 절개와 의가 서로 들어맞는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홍로 이후 군위缶林洪氏 가운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름을 떨친 사람이 홍귀달이다. 그는 1460년 과거에 급제하여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며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연산군의 생모 尹妃를 왕비에서 일반인으로 폐하고 쫓아내는 모의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하고, 戊午士禍 직전에 열 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연산군에게 간하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좌천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성격이 강직해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 또한 능한 재주도 겸비하였다. 그리고 이 통문에서 말하는 또 다른 홍씨인 홍언충홍귀달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에 못지않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글을 올려 임금에게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관작을 빼앗기고 도성 밖으로 추방되는 형벌을 받았다가 다시 유배의 형벌을 받았다. 그리고 홍언충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빼어났다. 이 세 홍씨는 1786년(정조 10)에 양산서원의 건립과 함께 配享되었다. 이 통문에서 양산에 서원을 세우고 제향해온지 오래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원이 건립되고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월철폐령으로 서원의 모든 건물이 훼철되었다. 그 후 1896년(건양 1) 양산서당이 건립되면서 이듬해인 1897년(광무 1) 훼철된 강당이 중건되기는 했지만 옛날의 면모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 최근 4~50년 사이에 그곳에는 들풀만 무성하게 자랐다고 말한 것이다. 이처럼 선현을 추모하는 사업이 지지부진한 때에 정몽주의 후손들로부터 이 통문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제안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통문의 내용만을 보면 선현을 제향하자는 논의는 홍씨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정씨들로부터 나온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 통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용인의 심곡서원, 개성숭양서원, 진주옥산서원, 영천임고서원, 선산금오서원낙봉서원은 모두 정몽주를 주벽으로 제향하고 있거나 그와 연관이 인물들을 배향하는 서원들이다. 이것을 보면 당시에 정몽주의 후손들이 자신의 선조와 관계된 서원들을 서로 연결하여 함께 재건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당시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진지가 거의 50년에 가까워지면서 훼철된 서원들이 하나둘씩 복원되고 있는 시기였다. 따라서 문중 서원들은 일족의 단결과 사회적 영향력을 위해서도 서원의 복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정몽주의 후손들이 양산서원의 홍씨들에게 서원의 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석채례를 제안한 것이다. 이것은 정몽주의 후손들에게 뿐만 아니라 홍씨들에게도 모두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홍씨들은 통문을 돌려 유림의 公議 아래 선조의 선양사업을 펼치려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1920년대를 전후로 하여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서원이나 사우를 복원하거나 중건하려고 돌리는 통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통문이 보여주는 특징은 그 제안이 서원을 관리하는 문중에서 나선 것이 아니라 그 서원과 연관 인물의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정몽주와 같이 전국적으로 명망을 지닌 선현을 둔 후손들은 자신의 선조를 선양하기 위해 그와 연관 여러 서원들에 함께 선양할 것을 제안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 사람의 뜻은 천하의 뜻 만인소』,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한국국학진흥원, 2007
「경상도 書院·祠宇의 건립추이와 제향인물의 성격」,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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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70년 도남서원(道南書院) 회중(會中)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 伏以愚山書院 惟我愚伏老先生主享之院 而立齊先生躋配之所也 其建設之意 事體之重 盖與屛山
臨川檜淵東洛諸先生 本院同一規模 幷峙嶠南 而特以未及蒙額 遭此撤毁 此鄙等所以尤切痛迫處也 乃於埋龕
之日 卽發叫閽之論 至爲爬任之擧 而未及治發大同疏 論適會 此時此乃正當道理 所以鄙等始停旣張之絃 亟趨同
的之勃矣 惜乎士氣不振 誠意莫伸 荏苒之間 星霜屢遷 而大同之擧 今不可復望 則嗚呼吾林其可終已乎 鄙等於此
益篤袒胸之志 復發()()()()()()動天聽 轉霜爲霈 雖非草茅淺誠所可預必 而所恃好還者天也 人欲天從 則亦安知其必無
所成也哉 往在
肅廟朝 防禁令甲不啻截嚴而旋復有宣額之院
英廟朝撤毁嚴敎何等 申複而乃蒙復設之恩 則盖緣皇鑑孔昭 曠感有別 然其時在下之人 苟不警咳於紸纊之下 則亦安得
以致此盛德之下究也哉 鄙等今日之擧 非敢爲求可求成之計 惟盡我正誼明道之規 以贊不遠之復 以翼斯道之盛 故有進無退
不厭乎一會再會 遂至薦出首任播錄遠邇 以爲敦疏西上之計 而但恨物力凋殘措備未易遷延 至今可愧者誠薄 然見今歲色
垂暮 衷情愈鬱 不忍復踰今年 而窮各跋涉實難容易 玆以明年正月二十一日 遂定發行會所於聞慶新院 伏願道內
僉君子濟濟來臨 以爲()()()()()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庚午(1870)閏十月二十日道南書院會中公事員幼學李能容
姜來永
盧正秀
曺司幼學金尙東
趙命基
曺秉灝
製通幼學金在遠
李起源
會員幼學金復善
趙運榮
呂思哲
蔡永禹
康采魯
李奎正
柳厚睦
高大亨
姜大永
黃獻周
姜福
權斗永
金弘健
金兢洙
宋鎭澤
金孝植
蔡周祐
金永載
權瀗
金揚秋
高彦秀
李圭一
李敍敎
趙東秀
孫必秀
李憲敎
姜懋馨
趙東翰
李汶九
趙樟
金祖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