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 10월 20일, 魯庵 金宗一의 文集을 刊行하는데 도움을 요청하며 玉山書院에 보낸 禾北洞社 會中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850년(철종 1) 10월 20일 禾北洞社 會中에서 玉山書院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魯庵 金宗一의 文集을 刊行하는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화북동사 회중에서 옥산서원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 까닭과 그 도움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통문에 따르면 노암 김종일은 옥산서원에서 배향하고 있는 晦齋 李彦迪의 고향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충성과 절개, 그리고 명분과 의리는 그 밝기가 해와 별과 같다고 했다. 그는 어려서 梧峯 申之悌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또한 鄭經世, 張顯光, 李命俊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그 결과 중후하기가 산악과 같으며 지금의 세상에서는 얻기 어려운 사람이라거나, 생사의 큰일을 당해서도 그 절개를 빼앗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나이 스물이 되기 전에 이미 東岳 李安訥와 詩文을 주고받았는데 그 詩 속에 그의 志操와 절개 그리고 仁德과 功業이 들어 있어 일찍이 그가 성취한 文學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여러 번의 上疏를 올렸는데 이것은 宋代의 문신인 胡銓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 비교되며, 그의 禮論은 朱子도 극찬한 賈公彦의 註釋에서 어긋나지 않았다. 龍洲 趙絅와 眉叟 許穆와 함께 그 시대의 공론을 세워 시행하였다. 그리고 瀋館에서 왕세자를 모시고 호위하며, 雲溪 鄭雷卿와 온갖 고행을 맛보며 충성과 의리를 굳건히 지켜내었다. 이러한 일들은 人事의 벼리가 되고 세상의 도리를 돕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명성을 날리며 30여 년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불행히도 그 당시의 무리들에게 미움을 받아 끝내 세상에 경륜을 크게 시행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향리에 돌아와서도 심하게 아프지 않으면 책을 덮지 않고 性命과 理氣를 공부하는 즐거움에 침잠하였다. 그래서 그가 평생토록 부끄러운 바가 없고 마음이 잘못된 것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공부의 힘이라고 그 자식들을 가르치며 말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의 후손들이 외자식으로 여러 代 동안 운세가 막히고, 여러 차례 화재를 겪으면서 글이 모두 흩어져 거의 없어져버렸다. 그래서 여러 선배들의 문집에서 널리 수집하여 조각이 나서 떨어져나간 것들을 대략 수집하여 겨우 몇 권의 책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이들을 板刻하여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하기를 도모하고자 한다.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한번 모여 발간을 할 임원과 체제를 정하는 의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옥산서원에서부터 이러한 일을 한다는 통지의 글을 통문으로 알려서 일을 성사할 수 있게 해준다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노암 김종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안강 사릿골(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 출신이다. 이 통문의 서두에서 그가 회재의 고향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9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 3년을 마친 후 신지제의 문하에 나아갔다. 그리고 1625년(인조 3) 과거에 급제하여 六曹의 郎官을 두루 거친 후 司諫院 正言이던 1628년(인조 6) 대신들의 잘못을 규탄하다 사직당한 간관을 구제하는 상소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퇴하였다. 그 후 복직이 되어서도 제주도로 귀향 간 仁城君 아들 삼형제의 죄를 용서를 두고 권신들과 상소로써 다투었다. 그리고 병자호란에서 나라의 일을 그르친 金鎏, 尹昉 등의 죄상을 상소하였다. 이 통문에서 그의 상소를 송대의 문신인 호전과 비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김종일이 이 병자호란에서 화친을 주장한 자들의 잘못을 성토한 것은 호전이 금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한 자들의 목을 벨 것을 주청한 그 정신이 서로 같다는 것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昭顯世子가 瀋陽에 볼모로 잡혀갈 때 司書로서 수행하여 그 곳에서 살며 조선을 헐뜯는 譯官 鄭命壽의 죄상을 폭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송환되어 영덕으로 귀양을 갔다. 이 통문에서 심관에서 왕세자를 모시고 호위하며 정뇌경과 온갖 고행을 하며 충성과 의리를 굳건히 지켜내었다고 하는 것은 이때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1660년(현종 1) 慈懿大妃의 服制를 短喪으로 하자는 宋時烈의 무리들과 다르게 허목과 함께 삼년상을 주장하다가 유배되었는데, 이 통문에서 조경, 허목과 함께 그 시대의 공론을 세워 시행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김종일의 행적은 이 통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道學的 淵源, 學問從事, 功績, 忠節 등의 조건에서 보면 서원에 배향될 인물로서도 손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院祠에 제향 되지 못한 것은 후손들의 물질적 여건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 통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김종일의 후손들이 외자식으로 여러 代 동안 운세가 막혔기에 선조에 대한 추모 사업을 뜻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문집을 간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문집의 간행 역시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거기에도 상당한 인원과 시간이 소요되며 적지 않은 자금이 들어간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하는 곳은 다른 곳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화북동사 회중에서는 어느 정도의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옥산서원에서 통문을 통해 이 문제를 유림에 공론화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한 요청은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김종일이 바로 옥산서원이 자리하고 회재의 고향인 안강 출신이며, 옥산서원이 도내의 首院으로 사림에 그 영향력이 크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옥산서원은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크게 힘을 보탠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러한 추측은 바로 현존하는 『魯庵集』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862년 8권 4책의 목판본으로 발행된 『노암집』을 보면 옥산서원에서 이 문집을 간행을 위해 두루 힘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통문에서 한 가지 확실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이 통문을 보낸 화북동사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추측하건대 그의 고향인 안강읍 노당리를 중심으로 한 경주 일대의 어느 곳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선조에서부터 후손들이 줄곧 이곳에 거주해왔기 때문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魯庵集』의 간행 경위를 알게 하는 자료이면서 19세 중엽 이후 先祖를 추모하는 사업의 一面과 당시에 옥산서원이 士林에 대해 지닌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대동문화연구』 「책판 제작의 사회·문화적 의의」, 柳浚弼,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경상도 書院‧祠宇의 건립추이와 제향인물의 성격」,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