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843년 금시술(琴詩述) 등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843.0000-20140630.Y1450101145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금시술, 김매수, 정지락
작성시기 1843
형태사항 크기: 59 X 94.4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43년 금시술(琴詩述) 등 통문(通文)
1843년(헌종 9) 5월 15일 금시술 등이 경주의 향교와 서원에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퇴계의 유집을 간행하는데 배당된 기부금이 납부되지 않아 일을 폐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의 납부를 독촉하는 것이다. 이 통문은 먼저 퇴계의 유집을 중간하자는 의론에 대해 경상도 전체가 한 목소리로 찬성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이 책의 간행이 퇴계와 연관된 사람들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남 사림의 자발적인 요구에 의한 것이기에 그 이후의 일도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퇴계의 유집이 그 담긴 큰 뜻에 비해 이를 간행하는데 필요한 자금이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은 도산서원퇴계의 후손 가운데 수령이 된 사람들, 그리고 안동예안 두 고을의 사림들이 자신의 힘에 따라 물자를 내어놓은 것으로 판각할 널빤지 2,000개를 구했으며, 30권에 달하는 원본의 등사를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간행하는데 모자라는 돈은 여러 고을에 배정하여 시작하는 날에 정중히 부탁을 했고, 덕산과 옥산으로부터 여러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인을 모집하여 솜씨를 보이게 한지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약속한 돈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 곳에서도 소식이 없었다. 경주부로 말할 것 같으면 옥산서원과 몇몇 집안이 돈을 보내온 것을 제외하고는 한마디 도움의 말도 없었으며, 감영의 여러 고을 중에는 오직 청하현 한 곳만이 사람을 보내어 힘을 보탰을 뿐이라고 하였다. 지금 장인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어 경비가 날로 많아지고 있는데, 物力이 없어 일을 거두어들이면 수천의 돈을 들인 앞서의 공로를 모두 버려야 하고, 빈손으로 역사를 독려하게 되면 2,000개의 목판을 판각하는 일을 계속할 수 없다며 다급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러면서 배당된 기부금을 납부하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먹기에 달려있을 뿐이라는 말로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 관하의 여러 고을에 빠르게 통고하여 이번 달 안으로 배당된 금액이 유집을 출간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게 해준다면 유림의 영광이자 행운이며 일을 마칠 수 있는 관건이라는 말로 다시 한번 분발을 촉구했다.
이 통문에서처럼 퇴계의 유집을 간행하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리고 이 통문에서 말하는 유집은 1843년에 간행된 퇴계의 유집인 계묘본이다. 이 통문이 발행된 바로 그 해에 유집이 간행되었다는 것은 이 통문에서 호소한 배당된 기부금의 납부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록 자금을 모금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는 했지만, 이의 간행에는 영남 사림 전체가 물심양면으로 협력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여러 사람의 노력과 협력에 의해 유집이 간행되었다는 것은 간행 그 자체가 사회‧문화사적 의의를 지니며, 학문과 지식의 파급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 정만조 외 6명, 글항아리, 2009
『陶山書院 古典籍』, 한국국학진흥원, 도서출판 성심,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43년 5월 15일, 退溪의 遺集을 重刊하는데 배당된 寄附金의 납부를 慶州 校院에 독촉하는 琴詩述 등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843년(헌종 9) 5월 15일 琴詩述 등이 慶州 校院에 보낸 通文으로 그 내용은 退溪의 遺集을 간행하는데 배당된 寄附金이 납부되지 않아 일을 폐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의 납부를 독촉하는 것이다. 이 통문의 내용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통문은 먼저 퇴계의 유집을 重刊하자는 의론에 慶尙道 전체가 한 목소리로 찬성하였다는 사실을 굳이 자세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은 이 책의 간행이 퇴계와 연관된 사람들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남 사림의 자발적인 요구에 의한 것이기에 그 이후의 일도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大地가 만물을 싣고 바다가 온갖 물줄기를 모두 받아들이듯 학문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퇴계의 유집이 그 큰 뜻에 비해 이를 간행하는 데는 힘, 즉 資金이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이 통문의 설명에 따르면 지금까지는 도산서원퇴계의 후손 가운데 守令이 된 사람들, 그리고 安東禮安 두 고을의 士林들이 자신의 힘에 따라 物資를 내어놓은 것이 거의 수천이 넘는 금액인데 이것으로 판각할 널빤지 2,000개를 이미 구했으며, 30권에 달하는 原本의 謄寫를 이미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간행하는데 모자라는 돈은 여러 고을에 배정하여 시작하는 날에 정중히 부탁을 했고, 德山과 玉山으로부터 여러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匠人을 모집하여 솜씨를 보이게 한지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약속한 돈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 곳에서도 소식이 없었다. 慶州府로 말할 것 같으면 玉山書院와 몇몇 집안이 돈을 보내온 것을 제외하고는 한마디 도움의 말도 없었으며, 監營의 여러 고을 중에는 오직 淸河縣 한 곳만이 사람을 보내어 힘을 보탰을 뿐이라고 하였다. 지금 장인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어 경비가 날로 많아지고 있는데, 物力이 없어 일을 거두어들이면 수천의 돈을 들인 앞서의 功勞를 모두 버려야 하고, 빈손으로 역사를 독려하게 되면 2,000개의 목판을 판각하는 일을 계속할 수 없다며 다급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이어서 사람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지난날에 퇴계의 유집을 간행할 때의 사례를 언급하였다. 본 통문에 따르면 최초로 퇴계의 유집을 간행한 것은 萬曆 庚子年, 즉 1600년(선조 33)으로 당시는 임진왜란 때문에 모든 것이 탕진된 나머지 처음에는 公的으로든 私的으로든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멀고 가까운 곳에서 소문을 듣고 경비를 도와주어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일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퇴계의 제자들 문집 속 여기저기에서 살펴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다시 현재의 상황으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옛날과 지금이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에는 오래된 선비의 집안들이 서로 우뚝하게 마주보고 있으며, 고을마다 학궁이 고루 퍼져있고, 태평시대의 文物이 성대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이것은 경자년에 처음 간행할 때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배당된 기부금을 납부하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먹기에 달려있을 뿐이라는 말로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 管下의 여러 고을에 빠르게 통고하여 이번 달 안으로 배당된 금액이 유집을 출간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게 해준다면 儒林의 榮光이자 幸運이며 일을 마칠 수 있는 關鍵이라는 말로 다시 한번 분발을 촉구했다.
이 통문에서처럼 퇴계의 유집을 간행하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 최초로 퇴계의 문집을 간행하려고 시도한 것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1571년(선조 4)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月川 趙穆을 중심으로 한 그의 제자들이 易東書院에 모여 遺文을 정리하는 한편, 각처에 있던 제자들은 각자 정리한 초고를 역동서원으로 보내왔다. 그리고 柳成龍의 요청에 따라 宣祖『退溪集』校書館에서 간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따라 퇴계의 손자인 李安道가 어느 정도 정리된 草稿를 가지고 서울로 왔으며, 이 원고를 가지고 유성룡을 중심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제자들이 임금에게 볼일 수 있도록 編輯과 校正, 그리고 淨書 작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원고는 여러 가지 이유로 완성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임금이 열람할 계획도 무산되었다. 이후 그 원고는 禮安에 거주하던 조목의 주도로 편집이 이루어지고 여러 사람의 교정을 거쳐 1584년(선조 17)에 『退溪先生文集』이라는 이름의 草本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 초본에는 퇴계의 모든 저작이 수록되었는데, 심지어 손으로 쓴 詩稿 중에 퇴계가 잘라낸 부분도 別集 등으로 편입시켜 놓았다. 이렇게 다소 체계적이지 못한 초본은 수차례의 회합을 거치면서 여러 의견들을 조정하여 1588년(선조 21)에 中草本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己丑獄事와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으로 간행 작업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것이 간행된 것은 1600년(선조 33)으로 陶山書院에서 조목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본 통문에서 최초로 간행했다고 하는 퇴계의 유집이 바로 이것이며, 당시의 어려운 환경이란 또한 위에서 말한 그런 역사적 사건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간행된 것은 유성룡의 견해를 받아들여 刪絶을 거친 중초본이 아니라, 조목 자신이 편집한 초본이었다. 이것이 초간본인 庚子本이다. 이에 유성룡은 改刊을 의논하며 실제로 그의 제자인 鄭經世가 교정을 하기도 했지만 간행에 이르지는 못했다.
경자본 이후에 간행된 본집은 모두 도산서원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으며, 그 계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경자본에서 발견된 오류를 교정하여 그 부분만을 다시 파거나, 교정이 어느 정도 완료된 후 전체를 다시 판각한 庚子本類이다. 다른 하나는 重刊本類로 이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이른바 ‘中本’과 1724년(경종 4)의 甲辰本, 그리고 1843년(헌종 9)의 癸卯本이다. 먼저 ‘중본’은 그 판본의 존재에 대해서만 언급하였을 뿐 그 간행의 시기나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그 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갑진본은 경자본의 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은 본으로서 처음으로 頭註가 보태어져 판각되었다. 마지막으로 계묘본은 영남의 전체 사림이 완정한 본을 만들기 위해 교정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결과 실제로 문집도 이전의 것들에 비해 일신되었다. 이 계묘본은 갑진본처럼 두주가 보태어져 판각되었으며, 전체적으로 板式이 엄격하고 글자체도 똑똑하고 발라서 당시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 통문이 발행되던 해인 1843년퇴계의 유집인 계묘본이 간행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이 통문에서 호소한 배당된 기부금의 납부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납부는 강요가 아닌 자발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통문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퇴계의 유집 간행은 경상도 전체가 한 목소리로 요청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금을 모금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는 했지만, 이의 간행에는 영남 사림 전체가 물심양면으로 협력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여러 사람의 노력과 협력에 의해 유집이 간행되었다는 것은 간행 그 자체가 사회‧문화사적 의의를 지니며, 학문과 지식의 파급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퇴계의 유집 가운데 계묘본을 간행하는데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이다. 또한 그 당시에 문집이 간행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 정만조 외 6명, 글항아리, 2009
『陶山書院 古典籍』, 한국국학진흥원, 도서출판 성심,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43년 금시술(琴詩述) 등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 伏以我老先生遺集重刊之論 實出於一道之同聲 則生等更不必覼縷 而第伏念地偩海涵之帙 有事鉅力綿之憂 ▣▣▣▣▣▣▣
院及本孫數家之爲守宰者 安禮兩邑之爲士林者 隨力出物 幾至數千餘金 二千板梓木已具矣 三十卷謄本已成矣 若干贏餘又可爲刊 排布之▣▣▣▣
手之價 自有列邑排錢之數 而生等猶且鄭重於始事之日矣 卽因▣▣章甫 自德山玉山來獲聞 僉君子銳意敦束之敎 故募工試手 今已三箇月矣 仄竢遠
近 漠無聲息 雖以貴府言之 玉山本所及數家門 錢之外 更無一言之相 及營下諸邑 則獨有淸河一縣之委人致力而已 見今工徒雲集 經費日廣 欲以無物而撤工
則數千金前功盡棄 空手而蕫役 則二千板工價無繼 是非斯文之大運氣 而吾林之極憂悶者乎 昔在萬曆庚子年間 始刊玆集 時當龍蛇蕩殘之餘 初無公私預備之物
而遠近聞風 助費雲委 不朞年而工告訖 今於門下諸賢遺集中 可按而考也 雖曰古今不相及 而顧今儒賢古家喬木相望 列邑學宮碁布星羅 升平文物之盛視 庚
子初刊時又何如也 惟在僉君子用意之如何耳 玆因宣域侑祭之會 有此竭聲之呼 伏願僉君子先自大府飛告管下諸邑 以爲今月內依排數領 臨於刊所 則實爲儒
林之光幸 竣事之關捩 僉須諒察幸甚幸甚
右文通
慶州校院癸卯五月十五日公事員幼學琴詩述
李家榮
製通生員金邁銖
幼學李進燮
寫通幼學李鍾基
李宗稷
會員幼學鄭之洛
金養休
柳聲祚
鄭來任
柳致韺
成復魯
進士李五秀
幼學權命夏
金養九
前▣▣▣鎭華
幼學裵郁周
南基重
金永耆
進士金昺銖
金昌銖
幼學金濟漢
權宗益
金道明
蔡周虎
吳載民
正言金禹銖
幼學朴漢章
柳禎鎭
李文稷
琴樂源
生員吳光一
幼學金濟洛
柳宅鎬
金斗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