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4월 28일, 玉山書院에 扶助할 돈 7兩을 보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靈山都廳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840년 4월 28일, 靈山都廳에서 玉山書院로 보내는 通文으로 그 내용은 옥산서원에 扶助할 돈 7兩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이 통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부조의 뜻을 전했다.
이 통문은 먼저 옥산서원이 건물을 重建하고 賜額을 고쳐달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幼學에 성대한 일이고, 많은 선비들이 높이 받들 일이라는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서 영산도회 자신들은 옥산서원에서 祭享을 올리는 날 마땅히 나아가서야 했지만, 길이 멀고도 아득하여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고 사죄의 말을 하였다. 또한 영산도회에서는 자신들이 그렇게 제향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賢人을 수호하는 道理에 흠결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자책하였다. 이어서 자신들의 고을인 靈山縣(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향교와 서원들로부터 부조금 7냥을 거두어 옥산서원에 보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옥산서원이 큰일에 힘써 노력하여 많은 선비들의 여망에 부응해주면 고맙겠다는 말을 전하였다.
이 통문의 서두에 언급한 옥산서원의 건물 중건과 사액의 게양은 바로 1839년(헌종 5) 1월 28일에 있었던 求仁堂의 화재를 극복하고 예전의 면모를 되찾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의 화재로 옥산서원은 10間이나 되는 講堂이 전소되는 막대한 손해을 입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날의 화재로 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宣祖 때 李山海가 쓴 賜額板, 숙종 때의 傳敎謄書板, 영조 때의 備忘記板, 정조 때의 御製祭文板과 白鹿洞規板, 그리고 本院院規板, 韓石峯이 쓴 求仁堂․兩進齋․偕立齋라는 3개의 현판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렇게 막대한 손실을 일으킨데 대한 책임으로 재임이 쫓겨나고, 그곳을 지키던 종 다섯은 태형을 받고 쫓겨났다. 화재로 소실된 소장품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옥산서원은 영남의 首院이었기에 이 화재는 전체 유림에 관심의 대상이었고, 그리고 화재를 극복하고 옛 면모를 되찾은 것은 또한 전체 유림에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도 이러한 일을 우리 유학에 성대한 일이고, 많은 선비들이 높이 받들 일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옥산서원이 영남의 수원이라고는 하나 소실된 강당을 중건하여 예전의 면모를 회복할 만큼 재력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옥산서원에서는 화재를 당하자 곧바로 2월 1일에 중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여 鄕內 校院에 통문을 내고, 2월 13일에 西岳書院에서 수백여 名이 참석한 鄕會를 개최하여 重建役事를 담당할 任司를 결정하고 중건역사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은 후손들로부터 각출하거나 鄕中과 道內의 각 校․院․祠와 문중 등의 기부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그에 따라 향교에는 30兩, 향청과 사마소에는 10兩 등의 기부금을 배정하였다. 본 통문은 바로 옥산서원에서 기부를 요청하는 통문을 영산현의 교원에 보내졌고, 그에 따라 영산현에서는 임시도 도청을 구성하여 배당된 기부금을 거두어 보낸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영산도청에서처럼 각계각층에서 보내온 기부금은 『求仁堂重建日記』와 『鄕中錢入記』, 그리고 『道內錢入記』 등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기록에 따르면 옥산서원이 구인당을 중건하고 예전의 면모를 회복하는데 동원된 役丁은 총 16,259명이며, 鄕中과 道內로부터 기부를 받은 금액은 도합 2616兩 2錢이었다.
이 통문을 보면 흔히 斯文이라고 일컬어지는 유교의 단체에서 중대한 일이 있을 때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관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상부상조하는 일은 서원의 각종 都錄, 置簿記, 重修·重建日記, 考往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비록 이렇게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관례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평소 교류가 있거나 아니면 혼인 등을 통한 혈연적 유대가 있을 때 이루어졌다. 그러나 영산현은 慶尙右道에 있으면서 옥산서원과는 평소 거의 왕래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 통문에서 강당의 낙성을 알리는 致祭의 날에 길이 멀고 아득하여 참석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둘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산현에서 도청을 구성하여 옥산서원을 돕기 위해 모금을 한 것은 옥산서원의 강당을 중건하는 일이 향내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도내의 관심사로 부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서원이 가문 중심으로 운영되던 이 시기에 도내 전체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당시 영남에 있어서 옥산서원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한 증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어려움에 처한 校院들이 서로에 대해 어떤 도움을 주고받았는지를 알게 하는 자료이다. 또한 이러한 상부상조가 평소 서로간의 교류가 있던 교원들 사이에 이루어진 것을 감안하면, 慶尙右道에 위치하고 평소 교류가 드물었던 영산도청에서 보내온 이 통문은 당시 옥산서원의 강당을 중건하는 일이 거도적인 일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