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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양산서원(陽山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840.4772-20140630.Y14501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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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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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홍택규, 양산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4길 32
작성시기 1840
형태사항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40년 양산서원(陽山書院) 통문(通文)
1840년 3월 2일, 양산서원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내는 통문으로 그 내용은 옥산서원에 부조할 5꿰미의 동전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이 통문은 먼저 이 통문은 옥산서원의 화재가 우리 유학에 커다란 재앙이며, 선비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마음이 불타는 것과 같은 탄식이 없을 수 없다는 말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여기서 말하는 화재는 옥산서원의 화재는 1839년(헌종 5) 1월 28일에 있었던 구인당의 소실이다. 이 날의 화재로 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선조이산해가 쓴 사액판, 숙종 때의 전교등서판, 영조 때의 비망기판, 정조 때의 어제제문판과 백록동규판, 그리고 본원원규판, 한석봉이 쓴 구인당양진재해립재라는 3개의 현판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양산서원에서 이 화재를 복구하는 일이 유림의 막중한 일로 다 같이 나아가 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옥산서원에서는 그 해 12월 13일 건물의 낙성을 알리는 치제를 거행하고, 이듬해인 1840년 3월 6일에는 고유제를, 7일에는 경주부윤을 비롯해 인근의 지방관이 참가한 가운데 사액을 내어 거는 식을 거행할 예정이었다. 양산서원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 건물이 다시 우뚝하고 찬란하게 세워지고, 사액이 거듭 내려져서 주변의 경계가 새롭게 고쳐진 경사를 맞이하여 자신들에게 배정된 동전 5꿰미를 드리게 되었으니 받아주면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을 보면 흔히 사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유교의 단체에서 중대한 일이 있을 때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관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상부상조하는 일은 서원의 각종 도록, 치부기, 중수·중건일기, 고왕록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서원이 가문 중심으로 운영되던 이 시기에 양산서원과 같이 낙성에 임박해서까지 기부금을 보내며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당시 영남에 있어서 옥산서원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재해 극복 30년사』, 행정자치부 중앙재해대책본부, 1995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40년 3월 2일, 銅錢 5꿰미를 扶助金으로 玉山書院에 보낸다는 陽山書院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840년 3월 2일, 陽山書院에서 玉山書院로 보내는 通文으로 그 내용은 옥산서원에 扶助할 5꿰미의 銅錢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이 통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부조의 뜻을 전했다. 먼저 이 통문은 옥산서원의 화재가 우리 儒學에 커다란 재앙이며, 선비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마음이 불타는 것과 같은 탄식이 없을 수 없다는 말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유림의 막중한 이와 같은 일에 마땅히 다 같이 나아가 구해야 하고, 감히 자신을 관계없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 하며 옥산서원이 당한 화재에 대한 양산서원의 마음을 전했다. 또한 거리가 멀면 사람의 마음도 쉽게 느슨해진다고 하지만 先賢의 遺業을 계승하는데 그 책임을 옥산서원 여러분들에게만 지울 수 없다고 말하며, 약간의 물품을 돕는데 남들에게 뒤처져서 고을의 힘이 약하고 작기 때문이라고 억지로 말하겠느냐며 부조의 당연함과 그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를 거듭 천명했다. 그러면서 옥산서원의 건물이 다시 우뚝하고 찬란하게 세워지고, 사액이 거듭 내려져서 주변의 境界가 새롭게 고쳐진 慶事를 맞이하여 양산서원의 몇몇 선비들이 발의하여 배정된 동전 5꿰미를 드리게 되었으니 받아주면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옥산서원의 화재는 1839년(헌종 5) 1월 28일에 있었던 求仁堂의 화재이다. 이 화재로 10間이나 되는 講堂이 전소되어 이에 대한 책임으로 재임이 쫓겨나고, 그곳을 지키던 종 다섯은 태형을 받고 쫓겨났다. 특히 이 날의 화재로 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宣祖李山海가 쓴 賜額板, 숙종 때의 傳敎謄書板, 영조 때의 備忘記板, 정조 때의 御製祭文板과 白鹿洞規板, 그리고 本院院規板, 韓石峯이 쓴 求仁堂兩進齋偕立齋라는 3개의 현판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옥산서원영남의 首院으로 소장품들 또한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이 통문은 옥산서원의 화재가 사문의 큰 액운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 통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옥산서원은 불탄 건물을 새롭게 건립하고, 조정에서는 불탄 현판을 다시 사액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데는 결코 옥산서원 자신들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옥산서원에서는 화재를 당하자 곧바로 2월 1일에 중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여 鄕內 校院에 통문을 내고, 2월 13일에 西岳書院에서 수백여 名이 참석한 鄕會를 개최하여 重建役事를 담당할 任司를 결정하고 그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은 후손들로부터 각출하거나 鄕中과 道內의 각 校․院․祠와 문중 등의 기부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향교에는 30兩, 향청과 사마소에는 10兩 등의 기부금을 배정하였다. 본 통문에서 배정된 동전 5꿰미를 보낸다는 것은 바로 옥산서원에서 양산서원에 기부를 부탁해서 보내온 것이다. 이처럼 도내 각 서원과 향교 등에서 십시일반으로 보내온 기부금들이 합쳐져서 불탄 건물을 중건하는데 소요된 막대한 인원과 자금을 충당할 수 있었다. 『求仁堂重建日記』『鄕中錢入記』, 그리고 『道內錢入記』에 따르면 당시 건물 중건에 동원된 役丁은 총 16,259명이며, 鄕中과 道內로부터 기부를 받은 금액은 도합 2616兩 2錢이었다. 이 통문을 보면 흔히 斯文이라고 일컬어지는 유교의 단체에서 중대한 일이 있을 때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관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상부상조하는 일은 서원의 각종 都錄, 置簿記, 重修·重建日記, 考往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통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양산서원에서는 건물이 중건되고 사액이 내려진 후, 즉 화재로 인한 피해가 거의 복구된 이후에 기부금을 보내왔다. 이러한 사실은 먼저 당시의 사정이 기부금을 거두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데는 통문의 내용을 보면 남의 일이기 때문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즉 1839년(헌종 5) 8월에 전국에서 165명의 사망자와 민가 7,350호의 파손 또는 유실을 가져온 대홍수와 같은 것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양산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들이 3월을 전후로 기부금을 보내온 것은 이 달에 낙성을 알리는 행사, 즉 1840년 3월 6일에는 告由祭를 행하고, 7일에는 경주부윤을 비롯해 인근 지방관이 참가한 가운데 사액을 내어 거는 式을 거행할 예정이었기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당시 대부분의 서원이 가문 중심으로 운영되던 이 시기에 도내 전체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당시 영남에 있어서 옥산서원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어려움에 처한 校院들에 서로 어떤 도움을 주고받았는지를 알게 하는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양산서원과 같이 낙성을 알리는 1840년 3월을 전후로 하여 여러 서원들이 기부금을 보내온 것을 보면, 당시에 영남에서 옥산서원이 차지하는 위상을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재해 극복 30년사』, 행정자치부 중앙재해대책본부, 1995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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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40년 양산서원(陽山書院)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奉諭事 伏以貴院劫燼 誠斯文之一大厄會 凡在縫掖之列者 孰無焚如之歎哉 惟當齊殾赴
救之彈 誠從事之不敢自外於儒林重役 而遠地人情易緩而難銳 肯構賢者之責一任於貴鄕僉君子 而如干
助物亦在人後 烏可以鄙鄕各所之力綿强爲之辭耶 於焉堂宇臭奐輪 恩額重宣 山阿改觀 遠邇同慶 玆起
一二儒生 謹心五緍銅 依排奉呈 俯領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庚子三月初二日義興陽山書院會中洪宅圭
朴在淳
朴南璣
洪秉周
朴章源
洪秉一
洪宅憲
洪秉朝
申相虎
洪夏澗
申相龜
朴慶佑
洪箕一
申相震
朴致秀
朴升秀
洪夏旭
李魯敬
朴在周
朴顯鳳
洪孝修
金在浩
朴天壽
李馨垕
洪秉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