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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봉정회소(鳳停會所)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840.4717-20140630.Y145010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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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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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이오수, 유철조, 이효순, 봉정회소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
작성시기 1840
형태사항 크기: 61.6 X 96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40년 봉정회소(鳳停會所) 통문(通文)
1840년(헌종 6) 3월 16일 봉정회소에서 경주부 내의 교원으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퇴계의 문집을 중간하는데 드는 비용을 배분하기 위해 의성향교에서 도회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이 통문은 먼저 도산집의 중간에 대한 논의가 한 해가 지나고 해가 바뀌었으나 지금까지 결말이 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세상의 어려운 일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때문이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에 오직 이 일에만 전념할 수 없도록 하는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발생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일 때문에 선현을 위한 사업이 지체된다는 자신들의 정성이 미진한 것이라며 지금의 상황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어서 이 사업을 주관해오던 여러 어르신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서로 힘써 도모해서 일을 하지 않으면, 후세의 사람들이 지금의 자신들을 옛사람보다 못했다고 평가할 것이 두렵다며 서둘러 사업을 시행할 뜻을 밝혔다. 그래서 봉정사의 모임에서 대략적인 계획을 마련하여 한편에서는 목판을 운반해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원본을 옮겨 베껴서 인쇄하는 일이 차례로 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런 큰일을 하는 데는 자신들을 포함한 몇 개의 군에서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할 수 없는 일이라며 비용의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 비용은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함께 해결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일을 하는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모여서 멋대로 비용을 분담시킬 수 없어 금년 8월 20일에 의성향교에서 도회를 개최하게 됨을 알린다고 하였다.
이 통문에서 시행하려고 하고 있는 퇴계의 문집 중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600년(선조 33) 처음 간행된 후 여러 차례 중간이 있었다. 이 통문이 발행되고 나서 3년 뒤인 1843년(헌종 9)에 도산집 계묘본이 간행되었다. 따라서 이 통문은 계묘본의 간행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계묘본의 간행을 위해 영남의 사림들은 수시로 모임을 갖고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다. 그 결과 계미본은 그 이전의 도산집들과 비교했었을 때 일신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대동문화연구』 「책판 제작의 사회·문화적 의의」, 柳浚弼,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承政院日記』,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40년 3월 16일, 退溪의 文集을 重刊하는데 드는 비용의 배분을 위한 道會의 開催를 慶州府 內의 校院에 알리는 鳳停會所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840년(헌종 6) 3월 16일 鳳停會所에서 慶州府 內의 校院으로 보낸 通文으로 그 내용은 退溪의 文集을 重刊하는데 드는 비용을 배분하기 위해 義城鄕校에서 道會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이 통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통문은 먼저 陶山集의 중간에 대한 논의가 한 해가 지나고 해가 바뀌었으나 지금까지 결말이 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는 도산집을 중간한다는 계획이 세워지기는 했지만 그 계획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에 옮길 것인가를 두고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세상의 어려운 일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때문이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에 오직 이 일에만 전념할 수 없도록 하는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발생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일 때문에 先賢을 위한 사업이 지체된다는 자신들의 정성이 未盡한 것이라며 지금의 상황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어서 이 사업을 주관해오던 여러 어르신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서로 힘써 도모해서 일을 하지 않으면, 후세의 사람들이 지금의 자신들을 옛사람보다 못했다고 평가할 것이 두렵다며 서둘러 사업을 시행할 뜻을 밝혔다. 그래서 鳳停寺의 모임에서 대략적인 계획을 마련하여 한편에서는 목판을 운반해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원본을 옮겨 베껴서 인쇄하는 일이 차례로 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런 큰일을 하는 데는 자신들을 포함한 몇 개의 郡에서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할 수 없는 일이라며 비용의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 비용은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함께 해결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일을 하는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모여서 멋대로 비용을 분담시킬 수 없어 금년 8월 20일에 의성향교에서 도회를 개최하게 됨을 알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여러분이 회의에 많이들 오셔서 자리를 함께하여 비용분담의 문제를 논의해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시행하려고 하고 있는 퇴계의 문집 중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최초로 퇴계의 문집을 간행하려고 시도한 것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1571년(선조 4)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月川 趙穆을 중심으로 한 그의 제자들이 易東書院에 모여 遺文을 정리하는 한편, 각처에 있던 제자들은 각자 정리한 초고를 역동서원으로 보내왔다. 그리고 柳成龍의 요청에 따라 宣祖는 『退溪集』校書館에서 간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따라 퇴계의 손자인 李安道가 어느 정도 정리된 草稿를 가지고 서울로 왔으며, 이 원고를 가지고 유성룡을 중심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제자들이 임금에게 볼일 수 있도록 編輯과 校正, 그리고 淨書 작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원고는 여러 가지 이유로 완성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임금이 열람할 계획도 무산되었다. 이후 그 원고는 禮安에 거주하던 조목의 주도로 편집이 이루어지고 여러 사람의 교정을 거쳐 1584년(선조 17)에 『退溪先生文集』이라는 이름의 草本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 초본에는 퇴계의 모든 저작이 수록되었는데, 심지어 손으로 쓴 詩稿 중에 퇴계가 잘라낸 부분도 別集 등으로 편입시켜 놓았다. 이렇게 다소 체계적이지 못한 초본은 수차례의 회합을 거치면서 여러 의견들을 조정하여 1588년(선조 21)에 中草本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己丑獄事와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으로 간행 작업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것이 간행된 것은 1600년(선조 33)으로 陶山書院에서 조목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까닭에 이때 간행된 것은 유성룡의 견해를 받아들여 刪絶을 거친 중초본이 아니라, 조목 자신이 편집한 초본이었다. 이것이 초간본인 庚子本이다. 이에 유성룡은 改刊을 의논하며 실제로 그의 제자인 鄭經世가 교정을 하기도 했지만 간행에 이르지는 못했다.
경자본 이후에 간행된 본집은 모두 도산서원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으며, 그 계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경자본에서 발견된 오류를 교정하여 그 부분만을 다시 파거나, 교정이 어느 정도 완료된 후 전체를 다시 판각한 庚子本類이다. 다른 하나는 重刊本類로 이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이른바 ‘中本’과 1724년(경종 4)의 甲辰本, 그리고 1843년(헌종 9)의 癸卯本이다. 먼저 ‘중본’은 그 판본의 존재에 대해서만 언급하였을 뿐 그 간행의 시기나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그 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갑진본은 경자본의 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은 본으로서 처음으로 頭註가 보태어져 판각되었다. 마지막으로 계묘본은 영남의 전체 士林이 완정한 본을 만들기 위해 교정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결과 실제로 문집도 이전의 것들에 비해 일신되었다. 이 계묘본은 갑진본처럼 두주가 보태어져 판각되었으며, 전체적으로 板式이 엄격하고 글자체도 똑똑하고 발라서 당시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 통문이 발행되고 나서 3년 뒤인 1843년도산집 계묘본이 간행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이 통문에서 통고한 봉정사의 회합이 개최되어 비용분담에 대한 논의가 원만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841년 2월 8일 安東鄕會所에서 발행된 통문을 보면 역시 도산집 중간을 모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계묘본은 영남의 전체 사림이 완정한 본을 만들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했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협력과 노력이 있었기에 계묘본은 그 이전의 도산집들과 비교했었을 때 일신된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지금까지 간행된 퇴계의 저작 가운데 1843년에 간행된 癸卯本이 그 계획의 단계에 어떤 일이 있는가를 알게 자료이다. 그리고 계미본의 간행에는 영남지역의 士林 전체가 협조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케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대동문화연구』 「책판 제작의 사회·문화적 의의」, 柳浚弼,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承政院日記』,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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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40년 봉정회소(鳳停會所)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 伏以陶山集重刊之論 經年閱歲 究竟無期 雖緣世故之苦相纏絆 而吾黨衛道之誠 亦恐有多小
未盡處也 況向來主事諸公 次第零謝 苟不惕然相勉圖 所以及今敦事 則安知後之視今 不猶今之視昔耶 生等爲是
之惧 玆於鳳寺之會 畧有排布 一邊運板 一邊寫本 剞劂之役 亦將次第而始矣 然而如許大役 有非生等數郡之所可獨
擔者 窃料僉尊之合力共濟 必無遠邇之殊 而生等一方之會 未敢私自分排 仰告爻數 以今年八月二十日 定道會子義城鄕校
伏願僉尊濟濟來會 以爲合席爛商之地 千萬幸甚
右文通
慶州管下列邑校院
更子三月十六日鳳停會所公事員幼學金鎭坤
金重學
曹司幼學權璋
李賢坤
製通進士李五秀
會員前郡守柳喆祚
幼學金百行
柳厦祚
李彙綗
金驥壽
李亨秀
柳琢文
李蓍秀
柳希文
金璟燦
金靜壽
金建壽
柳致昇
李鉉成
金瀚壽
李顔德
李基煥
金永祚
金萬衡
金南燦
柳信祚
權翊度
柳龍祚
校理李孝淳
別檢李彙圭
幼學權喆孚
權欽
李章儒
李彙廷
李彙寅
柳靜祚
李彙倫
金檜壽
柳致祚
金瑛燦
李彙璿
金道明
鄭來任
鄭之一
柳煥祚
張九鶴
權玉必
申正欽
金相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