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1840년(헌종 6) 1월 4일 서악서원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서악서원 자신들의 강안에 들어있는 유생들의 명단을 옥산서원에 넘겨주면서 그들을 옥산서원의 유안에 넣어줄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서악서원의 이러한 행동은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자기 학교 학생들의 명부를 다른 학교에 넘겨주며 그 학교의 학생인 것처럼 해달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서악서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측면에서 상당히 굴욕적인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서악서원과 옥산서원 사이에는 지역적 근접성을 넘어선 역사적 유대관계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만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었다.
두 서원의 이러한 관계는 먼저 그들의 설립 기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악서원이 1563년(명종 18) 서악정사라는 이름으로 맨 처음 건립될 당시 경주부에는 옥산서원은 물론 여타의 서원이 아직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악정사가 경주지역의 사론을 주도하였던 것은 물론 회재의 위패도 그곳에 별묘의 형태로 봉안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1572년(선조 5) 옥산서원이 건립된 이후에도 지속되어 두 서원은 서원운영의 기본 규약이 되는 원규를 같이하고 원안을 합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록까지도 함께하면서 경주의 향론을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이 통문에서 보는 것처럼 서악서원이 자신들의 강안에 들어있는 유생들의 명단을 옥산서원에 넘겨주는 것은 굴욕적인 행위가 아닌 오랜 유대관계에서 오는 자연스런 행위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악서원이 옥산서원에 의존하는 것은 단순히 오랜 유대에서 오는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1700년(숙종 26) 용산서원이 건립되면서 그 동안 서원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었던 경주최씨들이 빠져나가고, 18세기 이후부터 경주의 사림은 각 지역별, 문중별, 파계별, 당색별로 그 분립이 확산되면서 서악서원은 자체적으로 서원을 운영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처럼 자신들의 유생 강안을 옥산서원에 넘겨주고 그곳의 유안에 옮겨줄 것을 부탁하거나 임사가 가능한 사람들의 명단을 맡겼던 것이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2
『龍山書院』, 이수환, 집문당, 2005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