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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840.4713-20140630.Y145010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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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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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남양홍, 금익렬, 서악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2길 23
작성시기 1840
형태사항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40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1840년(헌종 6) 1월 4일 서악서원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서악서원 자신들의 강안에 들어있는 유생들의 명단을 옥산서원에 넘겨주면서 그들을 옥산서원의 유안에 넣어줄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서악서원의 이러한 행동은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자기 학교 학생들의 명부를 다른 학교에 넘겨주며 그 학교의 학생인 것처럼 해달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서악서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측면에서 상당히 굴욕적인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서악서원옥산서원 사이에는 지역적 근접성을 넘어선 역사적 유대관계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만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었다.
두 서원의 이러한 관계는 먼저 그들의 설립 기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악서원1563년(명종 18) 서악정사라는 이름으로 맨 처음 건립될 당시 경주부에는 옥산서원은 물론 여타의 서원이 아직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악정사경주지역의 사론을 주도하였던 것은 물론 회재의 위패도 그곳에 별묘의 형태로 봉안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1572년(선조 5) 옥산서원이 건립된 이후에도 지속되어 두 서원은 서원운영의 기본 규약이 되는 원규를 같이하고 원안을 합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록까지도 함께하면서 경주의 향론을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이 통문에서 보는 것처럼 서악서원이 자신들의 강안에 들어있는 유생들의 명단을 옥산서원에 넘겨주는 것은 굴욕적인 행위가 아닌 오랜 유대관계에서 오는 자연스런 행위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악서원옥산서원에 의존하는 것은 단순히 오랜 유대에서 오는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1700년(숙종 26) 용산서원이 건립되면서 그 동안 서원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었던 경주최씨들이 빠져나가고, 18세기 이후부터 경주의 사림은 각 지역별, 문중별, 파계별, 당색별로 그 분립이 확산되면서 서악서원은 자체적으로 서원을 운영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처럼 자신들의 유생 강안을 옥산서원에 넘겨주고 그곳의 유안에 옮겨줄 것을 부탁하거나 임사가 가능한 사람들의 명단을 맡겼던 것이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2
『龍山書院』, 이수환, 집문당, 2005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40년 1월 4일, 西岳書院에서 자신들의 儒生 講案을 드리니 玉山書院의 儒案에 옮겨줄 것을 당부하는 通文
[내용 및 특징]
1840년(헌종 6) 1월 4일 西岳書院에서 玉山書院로 보낸 通文으로 그 내용은 서악서원 측의 講案에 들어있는 儒生들의 명단을 옥산서원에 넘겨주면서 그들을 옥산서원의 儒案에 넣어줄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서악서원의 이러한 행동은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자기 학교 학생들의 명부를 다른 학교에 넘겨주며 그 학교의 학생인 것처럼 해달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서악서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측면에서 상당히 굴욕적인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서악서원옥산서원 사이에는 지역적 근접성을 넘어선 역사적 유대관계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만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었다.
두 서원의 이러한 관계는 먼저 그들의 설립 기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악서원1563년(명종 18) 慶州府尹 李楨과 士林의 公議로 仙桃山 아래에 西岳精舍라는 이름으로 맨 처음 건립되었다. 당시 慶州府에는 옥산서원은 물론 여타의 서원이 아직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악정사경주지역의 士論을 주도하였던 것은 물론 晦齋의 位牌도 그곳에 별묘의 형태로 奉安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572년(선조 5) 말 옥산서원이 건립되고, 그 이듬해에 회재의 위패가 그곳으로 移安되면서 그 해 12월에 監司 金繼輝의 啓達로 곧장 賜額을 받았다. 그에 반해 서악서원은 임진왜란 이후인 1600년(선조 33)에 중건되면서 서원으로 승격하고, 1623년(인조 1)에야 사액을 받았다. 이처럼 그 설립에 있어서는 서악서원이 먼저였지만, 서원으로 승격하거나 사액을 받는 것은 옥산서원이 먼저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위상에는 차이가 있었다. 더군다나 옥산서원은 그 주향자인 회재가 東方五賢으로 文廟에 종사되자 安東陶山書院, 晉州德川書院과 함께 영남학파의 3대 서원으로서 경주권 사림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경주지역에서의 영향력에 있어서도 당연히 차이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차이로 해서 두 서원이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협력하는 관계로 나아갔다. 다시 말해서 두 서원은 서원운영의 기본 규약이 되는 院規를 같이하고 院案을 合錄하였을 뿐만 아니라, 薦錄까지도 함께하면서 경주의 鄕論을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이 통문에서 보는 것처럼 서악서원이 자신들의 강안에 들어있는 유생들의 명단을 옥산서원에 넘겨주는 것은 굴욕적인 행위가 아닌 오랜 유대관계에서 오는 자연스런 행위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악서원옥산서원에 의존하는 것은 단순히 오랜 유대에서 오는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악서원의 점차적인 몰락에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곳의 몰락은 1700년(숙종 26)에 龍山書院의 건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동안 서악서원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던 慶州崔氏들이 자신들의 조상인 崔震立을 배향하는 용산서원으로 대거 옮겨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산서원豊川任氏, 英陽南氏, 谷山韓氏 등과 연계하면서 서악서원을 제치고 廣川을 중심으로 경주부의 남쪽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성장하면서 북쪽의 옥산서원에 맞서는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게다가 경주지역의 사림은 18세기 이후부터 각 지역별, 문중별, 파계별, 당색별로 그 分立이 확산되어 갔다. 그 시기에는 新鄕내지 老論系 유림들이 宋時烈을 배향하는 仁山書院이나 門中 院祠를 건립하여 그곳의 운영에 집중하였다. 따라서 서악서원은 자연히 유림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통문이 발행되던 19세기 중반이 되면 享祀를 지낼 수 없을 정도로 人的 構成이나 財政的 側面에서 열악한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악서원은 자체적으로 서원을 운영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처럼 자신들의 유생 강안을 옥산서원에 넘겨주고 그곳의 유안에 옮겨줄 것을 부탁하거나 任司가 가능한 사람들의 명단을 맡겼던 것이다. 물론 지리적으로 보면 용산서원이나 여타의 서원들이 더 가까워 그러한 곳과의 교류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악서원옥산서원을 제외하고 경주에서 가장 먼저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서의 위상과 자존감이 다른 서원이 아닌 옥산서원과의 교류를 지속시켜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서악서원옥산서원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살아남으면서 다시 한번 경주 남쪽을 대표하는 유림들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결코 과거와 같은 성세를 이루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19세기 중반 西岳書院玉山書院의 交流關係를 알려주는 자료이면서, 동시에 서악서원이 서원으로서의 사정이 많이 열악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2
『龍山書院』, 이수환, 집문당, 2005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40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本院儒生講案修錄奉呈 望願移錄於
貴院儒案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庚子正月初四日西岳書院院長生員南鴻陽
齋任幼學李公祥
會員李基發
崔柱普
韓公揆
琴益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