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장기향청(長鬐鄕廳) 답통문(答通文)
1840년 장기향청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옥산서원에서 단청을 입히는데 염료로 쓰는 뇌록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데 대해 답변을 한 것이다. 이 답변에서 장기향청은 먼저 지난봄에 있었던 옥산서원의 화재를 거론하며 자신들이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함께 근심하고 걱정했었다는 인사의 말을 건넸다. 이것은 의례적인 인사로 볼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요청한 물건과 관계된 것이기에 또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1839년(헌종 5) 1월 28일에 있었던 화재로 10칸이나 되는 강당인 구인당이 전소되었고, 이 건물을 중건하면서 단청을 입히는데 필요한 염료인 뇌석을 장기현에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장기 현감이 옥산서원을 방문했을 때 도움을 약속했고, 그에 따라 옥산서원에서는 편지를 통해 다시 한번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통문은 바로 옥산서원의 그러한 편지에 답한 것으로 향교의 노비로 하여금 그 뇌석을 져 보낼 계획이라는 답을 주었다.
이 통문에서 보는 것처럼 장기현에서 보내준 뇌록을 재료로 하여 시작된 옥산서원의 단청 작업은 약 15일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옥산서원강당중건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3월 6일에는 고유제를 행하고, 7일에는 경주부윤을 비롯해 영천‧청송‧청도 등 경주 인근의 13개 지방관이 참가한 가운데 어제제문판을 걸고,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을 보면 옥산서원의 복구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옥산서원 자신만의 노력과 정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이 통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장기현에서 뇌록을 보내준 것처럼 복구에 필요한 물품이며 금전을 많은 사람과 기관에서 희사하였기에 그러한 일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것을 보면 대부분의 서원이 가문 중심으로 운영되던 이 시기에 도내 전체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당시 영남에 있어서 옥산서원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이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1839~1840년 慶州 玉山書院 求仁堂 重建과 賜額 儀禮」, 이병훈,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