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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장기향청(長鬐鄕廳) 답통문(答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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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장기향청
작성지역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작성시기 1840
형태사항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40년 장기향청(長鬐鄕廳) 답통문(答通文)
1840년 장기향청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옥산서원에서 단청을 입히는데 염료로 쓰는 뇌록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데 대해 답변을 한 것이다. 이 답변에서 장기향청은 먼저 지난봄에 있었던 옥산서원의 화재를 거론하며 자신들이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함께 근심하고 걱정했었다는 인사의 말을 건넸다. 이것은 의례적인 인사로 볼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요청한 물건과 관계된 것이기에 또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1839년(헌종 5) 1월 28일에 있었던 화재로 10칸이나 되는 강당인 구인당이 전소되었고, 이 건물을 중건하면서 단청을 입히는데 필요한 염료인 뇌석을 장기현에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장기 현감이 옥산서원을 방문했을 때 도움을 약속했고, 그에 따라 옥산서원에서는 편지를 통해 다시 한번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통문은 바로 옥산서원의 그러한 편지에 답한 것으로 향교의 노비로 하여금 그 뇌석을 져 보낼 계획이라는 답을 주었다.
이 통문에서 보는 것처럼 장기현에서 보내준 뇌록을 재료로 하여 시작된 옥산서원의 단청 작업은 약 15일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옥산서원강당중건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3월 6일에는 고유제를 행하고, 7일에는 경주부윤을 비롯해 영천청송청도경주 인근의 13개 지방관이 참가한 가운데 어제제문판을 걸고,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을 보면 옥산서원의 복구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옥산서원 자신만의 노력과 정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이 통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장기현에서 뇌록을 보내준 것처럼 복구에 필요한 물품이며 금전을 많은 사람과 기관에서 희사하였기에 그러한 일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것을 보면 대부분의 서원이 가문 중심으로 운영되던 이 시기에 도내 전체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당시 영남에 있어서 옥산서원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이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1839~1840년 慶州 玉山書院 求仁堂 重建과 賜額 儀禮」, 이병훈,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40년 1월 7일, 丹靑을 입히는데 필요한 磊碌을 보내달라는 玉山書院의 要請에 대한 長鬐鄕廳의 答通文
[내용 및 특징]
1840년長鬐鄕廳에서 玉山書院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옥산서원에서 丹靑을 입히는데 염료로 쓰는 磊碌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데 대해 답변을 한 것이다. 이 답변의 통문이 보여주는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통문은 먼저 지난봄에 있었던 옥산서원의 화재를 거론하며 자신들이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함께 근심하고 걱정했었다는 인사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에 옥산서원의 여러분들이 불탄 건물을 중건하는데 노력과 정성을 다하여 선현을 받드는 사업을 告由하는 일을 마쳤다는 소문을 들었다. 자신들이 마땅히 달려가서 축하를 해야 했지만 공무에 메이다보니 부끄럽고 한스러운 꼴을 면하지 못했다고 사과의 말을 했다. 이어서 본 통문은 답장의 본론을 이야기했다. 즉 지난번 장기현장기현이 직접 옥산서원을 방문했을 때 단청을 입히는데 쓰이는 진홍색 염료인 뇌석을 보내어달라는 뜻을 이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옥산서원에서 보내온 편지가 도착하여 현령에게 상세히 여쭈니, 관내에 있는 물품 가운데 다음과 같은 수량을 택하여 보름께에 보내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이것을 향교의 노비로 하여금 져 보낼 계획이니 바라건대 양해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서두에 건넨 인사말인 화재는 1839년(헌종 5) 1월 28일에 있었던 求仁堂의 화재이다. 이 화재로 10間이나 되는 講堂이 전소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복구에 들어가 연인원 16,259명과 기부금액 2616兩 2錢이라는 막대한 인원과 자금으로 그 해 12월 26일 원내의 모든 건물에 대한 木役을 끝냈다. 그 후 淸河縣(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의 암자에 거처하는 승려 세 사람을 불러 강당과 그 외의 건물에 丹艧을 발라 단장하도록 하였다. 이 통문에서 옥산서원이 건물을 중건하는데 노력과 정성을 다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막대한 인원과 자금을 투입했다는 것이며, 그 사업을 마쳤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은 또한 건물에 대한 목역을 끝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장기현장기현이 옥산서원을 방문하자 그 때 옥산서원에서는 단청을 입히는데 쓰는 뇌록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장기현 또한 약속했다는 것을 이 통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옥산서원에서는 건물의 목역이 마무리되어갈 쯤부터 단청을 입히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 후손이나 지방관들에게 꾸준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래서 불이 나던 그 해 9월 29일에는 신광면 기일촌에 사는 후손으로부터 白土를, 10월 2일에는 강서면 근곡리에 사는 후손으로부터 靑土를, 그리고 10월 3일에는 영해에 사는 후손으로부터 朱土를 기부 받았다. 그리고 『玉山書院講堂重建日記』에는 "(庚子 正月) 초7일 장기 장기현 成鎭華가 뇌록 10斗를 보내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바로 이 통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뇌록을 보름 때쯤에 보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문에서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그 양이 10두라는 것을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통문에서 보는 것처럼 장기현에서 보내준 뇌록을 재료로 하여 시작된 옥산서원의 단청 작업은 약 15일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옥산서원 강당중건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3월 6일에는 告由祭를 행하고, 7일에는 경주부윤을 비롯해 영천청송청도경주 인근의 13개 지방관이 참가한 가운데 어제제문판을 걸고,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을 보면 옥산서원의 복구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옥산서원 자신만의 노력과 정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이 통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장기현에서 뇌록을 보내준 것처럼 복구에 필요한 물품이며 금전을 많은 사람과 기관에서 희사하였기에 그러한 일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것을 보면 대부분의 서원이 가문 중심으로 운영되던 이 시기에 도내 전체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당시 영남에 있어서 옥산서원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이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옥산서원이 화재로 소실된 강당을 중건하는데 각계각층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았는가를 알게 하는 자료이다. 또한 이로부터 당시에 있어 옥산서원이 도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과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1839~1840년 慶州 玉山書院 求仁堂 重建과 賜額 儀禮」, 이병훈,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40년 장기향청(長鬐鄕廳) 답통문(答通文)

答通
右文爲回諭事 貴院之前春火劫 鄙等雖在遠外 亦有共慮之憂矣 伏聞僉賢
極力殫誠重建之役 今方告訖其在景慕之地業 當趨賀而以公務所縻 未果愧恨
而已 頃者本官親行時 丹艧所礌碌 助施之意前以聞知矣 見今貴簡來到 官
中文諭辱臨陋軒 故商細稟告 則官辭內擇品如數 今望間仰送云爾 則至
於運去之道 使此校隸負送爲計 伏望願諒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庚子(1840)正月初七日長鬐鄕廳留李亨郁
李龍煥
皇甫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