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8월 17일, 玉山書院의 火災에 대한 對策을 論議하기 위해 道會의 개최를 알리는 檜淵書院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839년(헌종 5) 8월 17일 檜淵書院에서 玉山書院로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옥산서원의 火災에 대해 對策을 論議하기 위해 達城鄕校에서 道會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회연서원에서 화재의 피해 당사자인 옥산서원에 보낸 이 통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통문은 먼저 유교에 옛날부터 많은 있었지만 옥산서원의 화재와 같은 없었다는 말로 위로를 건넸다. 그런데 자신들은 그 화재의 소식을 어렴풋한 소문으로 듣다가 나중에는 士友들이 입으로 전하는 것을 들었지만, 끝내 문자로 알리는 것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들은 어찌 된 일인지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에 들으니 소식을 전하는 글이 중간에서 지체되어서 그런 것인데, 아직도 자신들은 받아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같은 집안의 액운을 전하는 것이 이렇게 더딘 것을 탄식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강당이 타서 재가 산더미 같아 지척을 오르내리는데도 자욱한 먼지가 날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막중한 扁額을 잿더미 속에서 들여와야 하니 경황이 없이 얼마나 다급하겠냐며 옥산서원의 처지를 염려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옥산서원 여러분의 정성과 고생으로 堂宇를 새롭게 지어 크고 넓은 집을 이미 이루었다고 하니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본다고 불탄 건물의 복구를 축하했다. 그런데 우리 道內의 선비들이 지금까지 한번도 이 일에 대해 의논하지 않고, 그리고 편액을 고쳐 거는 일에 이르러서는 정중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도연서원에서는 모임을 갖고 다음 달, 즉 9월 26일 달성향교에서 도회를 개최하여 한 차례 회의를 가지기로 했으니 모두들 와서 큰일에 함께 힘을 합해주면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옥산서원의 화재는 1839년(헌종 5) 1월 28일에 있었던 강당 求仁堂가 전소된 것이었다. 구인당은 1572년(선조 2)에 처음 창건한 후 화재가 일어나기 전까지 268년 동안 한번도 重修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화재가 일어나던 그 해 1월 26일 굴뚝에 문제가 생겨 수리를 하였는데, 이틀 뒤인 28일 밤에 건물과 바닥 사이의 빈틈으로 불길이 쓰며들어 10間이나 되는 講堂이 전소되었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재임이 쫓겨나고, 그곳을 지키던 종 다섯은 태형을 받고 쫓겨났다. 특히 이 날의 화재로 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宣祖 때 李山海가 쓴 賜額板, 숙종 때의 傳敎謄書板, 영조 때의 備忘記板, 정조 때의 御製祭文板과 白鹿洞規板, 그리고 本院院規板, 韓石峯이 쓴 求仁堂․兩進齋․偕立齋라는 3개의 현판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옥산서원은 영남의 首院으로 소장품들 또한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옥산서원의 화재가 斯文에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중건하는 일이었다. 옥산서원에서는 화재를 당하자 곧바로 2월 1일에 중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여 鄕內 校院에 통문을 내고, 2월 13일에 西岳書院에서 수백여 名이 참석한 鄕會를 개최하고 강당 중건을 위한 협조를 도내 사림들에게 요청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이후 4월 15일에는 安東 虎溪書院에서 옥산서원의 復額과 기부금의 분배를 논의하기 위해 5월 15일에 개최한다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화재로 인한 피해가 워낙 막대하여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옥산서원 자체에서뿐만 아니라 인근 서원에서도 통문을 돌렸다. 하지만 이 통문에서 보는 것처럼 그 통문들이 곳곳에 빠짐없이 전달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야 소식을 알게 된 영남의 북부지역에서는 이 통문에서 보는 것처럼 옥산서원에 도움을 주기 위해 9월 26일에 달성향교에서 도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이 도회는 科時를 잠시 기다려 영남의 좌‧우도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논의하려고 개최지 또한 달성향교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도회를 통해 道內의 각 校․院․祠과 회재의 후손들, 그리고 鄕中과 門中 등의 기부로 막대한 중건비용을 충당하게 되었다. 당시 이 役事에서 소요된 인원과 자금을 기록한 『求仁堂重建日記』와 『鄕中錢入記』, 그리고 『道內錢入記』에 따르면 건물 중건에 동원된 役丁은 총 16,259명이며, 鄕中과 道內로부터 기부를 받은 금액은 도합 2616兩 2錢이었다.
이러한 도움으로 화재가 일어난 바로 그 12월 13일 건물의 낙성을 알리는 致祭가 거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빠른 시일에 강당을 복구할 수 있었던 것은 옥산서원과 後孫家에서 800兩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초기에 내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화재가 일어난 지 10일만인 2월 8일부터 벌목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8월 7일에 기와를 덮기 시작하여 15일에 마칠 수 있었다. 이 통문에서 옥산서원 여러분의 정성과 고생으로 당우를 새롭게 지어 크고 넓은 집을 이미 이루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통문에서 강조한 것 중의 하나인 再賜額은 7월부터 시작되었다. 生員 南鴻陽을 狀頭로 구인당의 火變에 대한 사유와 이후 경주 사림들의 힘으로 중건의 공역을 부담한 사실을 적은 上書를 前承旨 李淵祥을 통해 경상감사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8월 22일에 이연상은 옥산서원이 거듭 사액될 근거로 타원의 복액 사례를 정리하여 보냈다. 9월 7일에는 과거를 치른 道儒 500여 명이 복액을 위한 상서를 작성하여 감영에 보내 禮曹에 啓達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9월 27일 巡營에서는 옥산서원에 관문을 보내와 額號 네 글자는 해당 관서에서 선사하여 보내온다고 하고, 御製祭文은 영문에서 선사하여 판에 새겨 걸도록 했다고 전해왔다. 그래서 이듬해인 1840년 3월 7일 경상감사와 경주부윤을 비롯해 영천‧청송‧청도 등 경주 인근의 13개 지방관이 참가한 가운데 거행된 落成式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 통문에 의해 개최된 도회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경상우도에 속하여 옥산서원과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던 도동서원과 靈山都廳 등에서 부조금을 보내온 것은 달성향교에서 경상좌‧우도의 교원이 함께 회합을 가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당시 대부분의 서원이 가문 중심으로 운영되던 이 시기에 도내 전체가 관심을 갖고 화재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은 당시 영남에 있어서 옥산서원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한 증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1839년에 있었던 옥산서원의 화재를 돕기 위해 道內의 校院들이 어떤 모습들을 보였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또한 이를 위해 옥산서원과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던 慶尙右道에 속하는 達城鄕校에서 道會가 개최되었다는 것은 당시 옥산서원의 강당을 중건하는 일이 거도적인 일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1839~1840년 慶州 玉山書院 求仁堂 重建과 賜額 儀禮」, 이병훈,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