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9년 9월 16일, 孫宗老의 祭祀를 지낼 祠堂을 건립하기 위한 會合의 개최를 玉山書院에 알리는 丹溪祠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829년(순조 29) 9월 16일 丹溪祠에서 玉山書院로 보낸 通文으로 그 내용은 左承旨에 추증된 孫宗老의 祭祀를 지낼 祠堂을 건립하기 위한 會合을 개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통문은 이러한 회합을 갖게 된 구체적인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통문에 따르면 樂善堂 손종로를 위해 제사를 지낼 사당에 대한 논의는 이미 몇 해 전 鄕會의 자리에서 정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라 오는 11월 7일을 吉日로 택하여 행사를 거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날에 앞서 고하니 많은 사람들이 와서 모임의 자리를 빛내주었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거론하고 있는 손종로는 右參贊을 지낸 孫仲暾의 玄孫이다. 그는 어려서는 문학에 뜻을 두었으나 장성하여서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1618년(광해군 10) 광해군이 仁穆大妃를 西宮에 유폐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과감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농사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다 1634년(인조 12)에 다시 벼슬길에 나서 藍浦縣監이 되었다. 하지만 都體察使 金瑬로부터 그가 현감으로서 치적이 없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에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러나 이천에 이르러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게 되자 雙嶺에 주둔하고 있는 慶尙左兵使 許完의 막하에 들어가서 활약했다. 그리고 쌍령의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아군이 뿔뿔이 흩어지자 꼿꼿이 선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러한 공로로 訓練院正에 추증되었고, 1784년(정조 8)에는 왕명으로 忠臣旌門이 세워졌다.
이 통문을 보면 손종로에 대한 추모의 논의는 이미 몇 해 전부터 있었고, 그 실행을 이 통문이 발행된 1829년에 시작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추모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증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1816년(순조 16) 8월 26일 吏曹와 禮曹에서 손종로의 충절에 대해 추증을 더할 것을 청하자 순조가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때 훈련원정에서 이 통문에서 말하는 좌승지로 加贈된 것을 계기로 그에 대한 추모 사업이 논의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추모 사업에 단계사, 즉 안동권씨인 權復興을 배향하는 곳에서 나선 것은 그의 출생지가 바로 단계사가 있는 강동면으로 주변에 그의 高祖父인 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이 있으며, 慶州孫氏는 그 지역의 유림을 형성하는 慶州李氏‧安東權氏‧迎日鄭氏들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보면 당시로서는 손종로가 祭享人物로 크게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9세기가 되면 이전부터 시작된 제향인물의 濫設과 疊設로 院祠의 수가 조선 초기에 비해 크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제향인물의 질적 저하도 동시에 가져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첩설과 남설이 횡횡하던 조선 후기라고 하더라도 손중로에게는 서원의 제향인물로는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道學的 淵源이나 學問宗師가 없는 무과출신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손종로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제향인물로 거론이 되었고, 서원이 아닌 사우에 배향이 되었다. 그가 배향된 사우는 경주시 강동면 검단리에 위치한 丹皐祠이다. 그곳에는 사당인 尙忠祠를 비롯해 不愧齋, 此若門 등의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講堂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 1991년 차약문과 丹山齋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樂善堂 孫宗老의 祠宇인 丹皐祠가 건립된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면서, 또한 19세기에 건립되는 사우의 전형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경상도 書院‧祠宇의 건립추이와 제향인물의 성격」,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