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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단계사(丹溪祠)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6+KSM-XF.1829.4713-20140630.Y14501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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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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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이정엄, 이정기, 이태상, 단계사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작성시기 1829
형태사항 크기: 66 X 106.5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29년 단계사(丹溪祠) 통문(通文)
1829년(순조 29) 9월 16일 단계사에서 옥산서원으로 보낸 통문으로 그 내용은 좌승지에 추증된 손종로의 제사를 지낼 사당을 건립하기 위한 회합을 개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낙선당 손종로를 위해 제사를 지낼 사당에 대한 논의는 이미 몇 해 전 향회의 자리에서 정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라 오는 11월 7일을 길일로 택하여 행사를 거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날에 앞서 고하니 많은 사람들이 와서 모임의 자리를 빛내주었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거론하고 있는 손종로우참찬을 지낸 손중돈의 현손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인목대비서궁에 유폐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과감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농사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다 1634년(인조 12)에 다시 벼슬길에 나섰다가 병자호란 때 쌍령의 전투에서 전사하여 훈련원정에 추증되었고, 1784년(정조 8)에는 왕명으로 충신정문이 세워졌다. 이러한 조건에서 보면 당시로서는 손종로가 제향인물로 크게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도학적 연원이나 학문종사가 없는 무과출신자였기 때문에 손종로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제향인물로 거론이 되었고, 서원이 아닌 사우에 배향이 되었다. 그가 배향된 사우는 경주시 강동면 검단리에 위치한 丹皐祠이다.
「경상도 書院‧祠宇의 건립추이와 제향인물의 성격」,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29년 9월 16일, 孫宗老의 祭祀를 지낼 祠堂을 건립하기 위한 會合의 개최를 玉山書院에 알리는 丹溪祠의 通文
[내용 및 특징]
1829년(순조 29) 9월 16일 丹溪祠에서 玉山書院로 보낸 通文으로 그 내용은 左承旨에 추증된 孫宗老의 祭祀를 지낼 祠堂을 건립하기 위한 會合을 개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통문은 이러한 회합을 갖게 된 구체적인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통문에 따르면 樂善堂 손종로를 위해 제사를 지낼 사당에 대한 논의는 이미 몇 해 전 鄕會의 자리에서 정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라 오는 11월 7일을 吉日로 택하여 행사를 거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날에 앞서 고하니 많은 사람들이 와서 모임의 자리를 빛내주었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거론하고 있는 손종로右參贊을 지낸 孫仲暾의 玄孫이다. 그는 어려서는 문학에 뜻을 두었으나 장성하여서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1618년(광해군 10) 광해군仁穆大妃西宮에 유폐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과감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농사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다 1634년(인조 12)에 다시 벼슬길에 나서 藍浦縣監이 되었다. 하지만 都體察使 金瑬로부터 그가 현감으로서 치적이 없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에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러나 이천에 이르러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게 되자 雙嶺에 주둔하고 있는 慶尙左兵使 許完의 막하에 들어가서 활약했다. 그리고 쌍령의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아군이 뿔뿔이 흩어지자 꼿꼿이 선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러한 공로로 訓練院正에 추증되었고, 1784년(정조 8)에는 왕명으로 忠臣旌門이 세워졌다. 이 통문을 보면 손종로에 대한 추모의 논의는 이미 몇 해 전부터 있었고, 그 실행을 이 통문이 발행된 1829년에 시작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추모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증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1816년(순조 16) 8월 26일 吏曹와 禮曹에서 손종로의 충절에 대해 추증을 더할 것을 청하자 순조가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때 훈련원정에서 이 통문에서 말하는 좌승지로 加贈된 것을 계기로 그에 대한 추모 사업이 논의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추모 사업에 단계사, 즉 안동권씨權復興을 배향하는 곳에서 나선 것은 그의 출생지가 바로 단계사가 있는 강동면으로 주변에 그의 高祖父인 손중돈을 배향하는 東江書院이 있으며, 慶州孫氏는 그 지역의 유림을 형성하는 慶州李氏安東權氏迎日鄭氏들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보면 당시로서는 손종로가 祭享人物로 크게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9세기가 되면 이전부터 시작된 제향인물의 濫設과 疊設로 院祠의 수가 조선 초기에 비해 크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제향인물의 질적 저하도 동시에 가져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첩설과 남설이 횡횡하던 조선 후기라고 하더라도 손중로에게는 서원의 제향인물로는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道學的 淵源이나 學問宗師가 없는 무과출신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손종로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제향인물로 거론이 되었고, 서원이 아닌 사우에 배향이 되었다. 그가 배향된 사우는 경주시 강동면 검단리에 위치한 丹皐祠이다. 그곳에는 사당인 尙忠祠를 비롯해 不愧齋, 此若門 등의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講堂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 1991년 차약문과 丹山齋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樂善堂 孫宗老의 祠宇인 丹皐祠가 건립된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면서, 또한 19세기에 건립되는 사우의 전형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경상도 書院‧祠宇의 건립추이와 제향인물의 성격」,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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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29년 단계사(丹溪祠)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告事 惟我贈左承旨孫公先生 祭社之論 已定於年前鄕席 將以今十一月初七日涓吉行事 玆敢先期
奉告 望須濟濟來臨 以光會席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己丑(1829)九月十六日 丹溪山長 幼學孫星灝
有司孫鍾五
會員進士李鼎儼
幼學孫星應
生員李鼎基
幼學孫星元
孫鍾遠
黃履瓚
生員李泰祥
幼學李民祥
鄭潤玉
生員李耆祥
幼學孫鍾曉
孫鍾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