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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호계서원(虎溪書院) 답통문(答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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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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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김희소, 호계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84-3, 84-4
작성시기 1812
형태사항 크기: 64.8 X 127.2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12년 호계서원(虎溪書院) 답통문(答通文)
1812년(순조 12) 2월 14일 옥산서원의 통문에 대한 호계서원이 답한 통문으로 그 내용은 표은 김시온의 제향시설에 건립하자는 발의에 대해 호계서원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 통문은 먼저 김시온이 아름다운 행실과 우뚝한 절개로 모든 사람에게 격려가 되고 영원한 모범이 되는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병자호란 때 의병의 부장이 되었으나 임금이 항복하는 것을 보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숭정처사를 자처하며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기 때문이다. 이 통문은 그의 이러한 행적을 제나라노중련송나라육수부에 비견되는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또한 그는 실천을 독실하게 하여 학문에 대한 조예가 정밀하고 깊었는데, 그것이 문장과 덕을 세우는 사업에서 발휘되고 절개 있는 행실의 기상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영남의 유자라면 모두가 추모하는 마음이 있지만, 끝내 그를 제향 할 곳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사림에 크게 흠이 되는 일이라고 반성하였다. 그런데 옥산서원에서 맨 먼저 김시온의 안식처에 대한 의논을 제기한 것은 선현을 존중하여 받들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 일을 하는데 있어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호계서원에서 대제를 지내는 날에 여론을 두루 모아 함께 모여 안건을 의논할 계책을 세웠다. 그리고 잠시 3개월쯤 기다렸다가 호계서원이나 사빈서원에서 도회를 개최하여 이 일을 서로 의논하여 확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김시온은 그 충절에 있어 빼어나 이 통문이 발행된 19세기 초에는 서원에 배향될 인물로 손색이 없다. 옥산서원에서는 바로 그의 이런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먼저 김시온의 고향에 있는 호계서원에 제향 할 시설의 건립을 제안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리고 그가 은거하던 곳의 이름을 딴 도연서원이 지어진 것을 보면 옥산서원의 제안이 사림의 호응을 얻어 결실을 맺은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자료를 보면 도연서원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직접적인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호곡집』도연서원 추향시 일기』를 보면 그 대강의 건립 연도를 추정할 수 있다. 이 두 기록에 따르면 도연서원의 건립은 이 통문이 보내진지 10여년 뒤인 1823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김시온은 그 이전에 경절사에 제향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경절사가 승원하여 도연서원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壺谷集』, 柳範休,
『국역 조선시대 서원일기』,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2007
「경상도 書院‧祠宇의 건립추이와 제향인물의 성격」,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12년 2월 14일, 瓢隱 金是榲의 祭享施設을 建立하자는 玉山書院의 通文에 대한 虎溪書院의 答通文
[내용 및 특징]
1812년(순조 12) 2월 14일 玉山書院의 通文에 대한 虎溪書院의 答通文으로 그 내용은 瓢隱 金是榲의 祭享施設을 건립하자는 發議에 대해 虎溪書院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 통문에서 밝힌 호계서원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이 통문은 먼저 김시온이 아름다운 행실과 우뚝한 절개로 모든 사람에게 격려가 되고 영원한 모범이 되는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그가 한편으로 陶淵이라 하고, 다른 한편으로 무덤에는 崇禎日月이라 띠를 두르게 한 것은 진나라가 황제를 칭하자 동해에 투신자살한 魯仲連금나라에 쫓기는 배안에서도 어린 황제에게 『大學章句』를 강론한 陸秀夫과 훌륭함을 다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가정에서 얻은 것이며, 강의하여 가르치는 이치는 자신의 마음에 근본 하는 것이었다. 또한 性情의 사이에서 실천을 篤實하게 하여 학문에 대한 조예가 정밀하고 깊었는데, 그것이 문장과 덕을 세우는 사업에서 발휘되고 절개 있는 행실의 氣像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것은 김시온의 行錄 가운데 사실을 기록한 것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해 우리 영남의 儒者라면 어찌 追慕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지만, 끝내 그를 제향 할 곳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사림에 크게 흠이 되는 일이라고 반성하였다. 그런데 옥산서원에서 맨 먼저 김시온의 안식처에 대한 의논을 제기한 것은 선현을 존중하여 받들고자 하는 마음은 도모하지 않아도 같은 것인 것을 알겠다. 그러나 이 일을 하는데 있어 힘이 약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호계서원에서 大祭를 지내는 날에 여론을 두루 모아 함께 모여 안건을 의논할 계책을 세웠다. 그리고 잠시 3개월쯤 기다렸다가 호계서원이나 泗濱書院에서 道會를 개최하여 이 일을 서로 의논하여 확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거론되고 있는 김시온1598년(선조 31)에 호계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臨河面 川前里에서 태어났으며, 호계서원에 제향 되고 있는 鶴峯 金誠一와는 義城金氏로 一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통문에서 그의 학문이 가정에서 얻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큰아버지인 金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才智와 行實로 이름이 자자하였다. 그런 그가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副將이 되었다. 그러나 노모를 부탁할 길이 없어 행군을 못하다가 임금이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사실을 사당의 선조에게 고하고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후 스스로 ‘崇禎處士’라 하면서 經書와 性理學에 전념하여 諸子百家의 書를 두루 섭렵하였다. 어머니의 삼년상을 끝낸 1640년(인조 18) 臥龍山 아래의 陶淵 상류에 초막을 짓고 홀로 유유자적하며 조용히 책을 보면서 玩索하였다. 이 통문에서 그의 행실과 절개가 모든 사람에게 격려와 모범이 된다는 것은 이때 보여준 그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때의 결실을 끝까지 지켜 자신의 무덤에 ‘崇禎處士之墓’라고 쓰게 한 것이다.(『國朝人物考』卷39, 蔭仕) 그는 평생 禮學을 깊이 연구하여 고금의 禮書와 諸家의 註疏에 정통하여 이를 책으로 편집하다가 완성되기 전에 사양하여 저술을 그쳤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다시 詩를 지어 즐기지 않고 "말이 많으면 道를 해친다."고 하여 배우는 자와 말을 할 때는 그 大義를 거론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할 뿐이고 또한 문자의 말단에 메이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이 통문에서는 성정의 사이에서 실천을 독실하게 하여 학문에 대한 조예가 정밀하고 깊었다고 한 것이다. 이 통문이나 남은 자료를 통해서 볼 때 김시온에게 있어 가장 빼어난 점은 그의 忠節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이 통문이 발행된 19세기 초에는 서원에 배향될 인물로 손색이 없다. 옥산서원에서는 바로 그의 이런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먼저 김시온의 고향에 있는 호계서원에 제향 할 시설의 건립을 제안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리고 그가 은거하던 곳의 이름을 딴 陶淵書院가 지어진 것을 보면 옥산서원의 제안이 사림의 호응을 얻어 결실을 맺은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자료를 보면 도연서원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직접적인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壺谷集』陶淵書院 追享時 日記』를 보면 그 대강의 건립 연도를 추정할 수 있다. 먼저 『호곡집』의 연보를 보면 1823년에 사림에서 서원을 건립하지는 의논이 있었고, 부속 건물의 편액은 호곡 柳範休가 지었으며, 봉안문과 常享文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도연서원 추향시 일기』를 보면 김시온의 제자인 錦翁 金學培를 추가로 배향하자는 의논이 元位, 즉 김시온의 위패를 봉양하기 시작한 12년 뒤인 1834년岐陽書堂의 통문으로 도연서원에 보내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보면 김시온의 위패가 처음으로 모셔진 것이 1822~3년쯤으로 서원의 건립 또한 그 시기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기록에 따르면 도연서원의 건립은 이 통문이 보내진지 10여년 뒤인 1823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김시온은 그 이전에 景節祠에 제향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경절사가 陞院하여 도연서원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가정을 제기하는 것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1693년(숙종 19)에 김시온김학배도연서원에 제향하였다.’는 주장은 잘못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위의 두 기록에 근거해 보면 처음에는 陶淵 인근에 경절사를 건립하여 김시온만을 獨享하다가, 1823년경에 승원하고, 그 후 1834년김학배를 추향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19세기 초반 서원의 건립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면서, 또한 金是榲를 配享할 곳을 건립하자는 의논이 맨 처음 제기한 곳은 그의 고향인 安東가 아닌 慶州 玉山書院이었다는 것을 밝혀주는 자료이다.
『壺谷集』, 柳範休,
『국역 조선시대 서원일기』,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2007
「경상도 書院‧祠宇의 건립추이와 제향인물의 성격」,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12년 호계서원(虎溪書院) 답통문(答通文)

答通文
右文爲回諭事 伏以 瓢隱金先生(金是榲)㦤行卓節 實爲激勵乎 百世儀表乎 一方陶淵一曲宛帶崇禎日月 則直與魯連之滄海 秀夫之赤日 幷美爭
光矣 盖先生之學得之於家庭 講授之餘本之於身心 性情之間踐履篤實 造詣精深 發之爲文章德業 著之爲節行標致 則
先生行錄中 記實一款可考矣 第魚臺記夢之後 凡吾南冠儒服儒者 夫孰無羹墻之慕 而終未遑俎豆之所 此豈非士林之一大欠典
耶 何等貴院僉君子首發揭處之論 尊奉之心不謀而同矣 豈可以事力之綿綴 有所持重哉 玆於本院享禮之日 愽採輿論
以爲齊會議案之計 而似此鄭重有矣 輕擧姑待數三月後 定道會於鄙院 或泗濱等地 以爲商確之地 未知如何
僉尊等垂察焉
右文答
玉山書院
壬申(1812)二月十四日虎溪書院都有司生員金熙紹
齋有司幼學李寅建
製通幼學李周八
寫通幼學朴宗潤
齋員幼學李尙珌
金星龜
李宇直
金養性
金尙珞
金道九
李顯秀
朴悌元
李斗樞
安寶
李顯發
安世應
金周燮
權漢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