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11월, 朴萬俊이 全州柳氏 先山에 偸葬한 事實을 是認하고 移掘해갈 期限에 대해 다짐한 侤音
내용 및 특징
1885년(고종 22) 10월, 臨北面(지금의 안동시 임동면) 三峴里에 거주하는 柳頤欽 등의 全州柳氏가 자신들의 선산인 安東府 東後面 佳流里(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뒷산에 朴勗伊가 투장했다는 소송에 대해 피고 중의 한 사람인 朴萬俊이 이 사실을 시인하고 언제 이굴해가겠다고 다짐한 侤音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죄인 나이 47세의
박만준은 사실을 진술하건대, 자신이 曾祖父 묘소의 아래에 叔父를 埋葬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三山에 거주하는 柳氏 집안사람들이 그 묘소가 자신들의 先山으로부터 150步가 떨어져 있고, 앉으나 서나 모두 보이는 곳으로 이굴해갈 것을 재촉하는데 대해 이의가 없다. 그래서 이번 12월내로 이굴해가라고 기한을 정한 관청의 판결에 응할 것이다. 만약 이 기한이 지나면 엄히 다스려지고 무덤을 옮겨갈 것을 재촉 받게 될 것이다.
전주유씨들이 박만준으로부터 이러한 다짐을 받기까지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암행어사와 안동부사에게 각기 두 차례의 상서를 제출하였다. 이 소송의 내용을 전주유씨들이 제출한 상서들을 근거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전주유씨들이 자신의 선산에 투장했다고 소송을 제기한 대상은 박만준이 아니라 박욱이이었다. 이들은 사촌 간으로 박만준이 안동부의 都司令이다. 이 진술서를 보면 박욱이의 배후가 바로 박만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진술서도 박만준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리고 박만준이 증조부의 묘소 아래에 숙부를 매장하였다고 진술한 것은 이미 30여 년 전인 1850년에 朴尙文이라는 자가 이곳에 매장하였다가 전주유씨들로부터 투장을 하였다고 소송을 당한 그 묘소와 관련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묘소를 쓴 것을 두고 전주유씨들이 1850년에 이굴해가겠다고 다짐을 하고서도 그대로 둔 채 조금씩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박만준이 전주유씨의 선산에서 150보 떨어진 곳에 매장을 하였다고 시인한 것은 곧 자신이 전주유씨의 선산에 투장한 것을 시인한 것이며, 이 소송에서 자신의 패소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에 마련된 묘역의 법안에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건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최고위층인 종친 1품이면 사면 각 100보로 한정하고, 그 나머지는 일정한 비율로 감하여 최하층인 6품은 50보로 하였다. 하지만 『주자가례』가 보급되면서 그에 따라 관직의 고하에 따라 차등을 둔 의례보다는 사대부 공통의 의례를 지향하고, 또한 지세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는 산술적 거리보다는 풍수의 지세에 따른 좌청룡‧우백호를 수호의 범위로 삼는 ‘龍虎守護’를 허용하였다. 그 결과 1676년(숙종 2) 3월에 사대부 先山의 용호 내 養山處에 타인이 묘를 쓰지 못하게 함으로써 용호수호를 법적으로 공인하게 되고, 영조대에 이르러 『續大典』에 정식 법조항으로 확정되어 사대부의 묘역범위는 현실적으로 200보까지로 확정된 것이다. 따라서 박만준이 전주유씨의 고조모이자 柳正源의 아내인 淑夫人 宣城李氏의 묘소에서 150보 떨어지고 앉으나 서나 모두 보이는 곳에 묘를 쓴 것은 白虎脈을 침범한 것으로 법을 어긴 것이 된다.
박만준의 이 고음으로 이 소송은 전주유씨들의 승소로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이 소송의 결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1850년의 소송에서도 박상문이 이굴해가겠다는 다짐을 하고서도 그냥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냥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山訟에 있어서 당사자가 아닌 제3자, 즉 소송에서 이긴 산지의 소유자라고 해서 함부로 남의 묘소를 이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산송이 패소자로부터 자신의 패소를 인정하는 고음을 받고서도 또다시 소송이 제기되어 길게는 몇 십년간 이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인 것으로 생각된다.
자료적 가치
이 侤音은 전주유씨와 朴勗伊 사이에 있었던 山訟을 일단락지은 자료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송에 대한 이전의 상소들뿐만 아니라, 이후의 상소와 소지들 또한 남아 있다. 이것을 보면 패소자의 진술서가 곧 소송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고음과 함께 이전과 이후의 상서와 소지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면 조선후기에 빈번하게 일어났던 산송의 전말을 연구하는데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후기 山訟과 사회갈등 연구』, 김경숙,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고문서연구』33, 「조선후기 산송과 상언‧격쟁」, 김경숙, 한국고문서학회, 2008
『東方學志』77, 「조선후기 山訟과 山林 所有權의 실태」, 김선경,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