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6월, 臨北面 三峴里에 거주하는 柳頤欽 등이 자신들의 先山에 偸葬한 朴勗伊가 그 사실을 조사하는데 방해하고 조작하여 공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를 바로잡고 그 묘소를 移掘해가게 해줄 것을 安東府使에게 호소하는 上書
내용 및 특징
1888년(고종 25) 6월, 臨北面(지금의 안동시 임동면) 三峴里에 거주하는 柳頤欽 등의 全州柳氏들이 安東府使에게 올린 上書로 그 내용은 그들의 先山에 偸葬한 朴勗伊이라는 자가 그 사실을 조사하는데 사람들을 동원해 위협하여 공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조작하였으니 이를 바로잡고 그 묘소를 移掘해가게 해줄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이 상서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주유씨들은 박욱이라는 자가 安東府 東後面 佳流村(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가류리)에 있는 선산에 투장을 하자 소송을 제기하여 관청에서 파내어가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박욱이라는 자가 다시 그곳에 葬事를 지내자 두 번이나 상서를 올렸고, 이에 이미 파내어가라고 한 무덤에 다시 장사를 지냈는지, 그리고 마땅히 금해야 할 곳에 장사를 지내는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를 소상히 살펴서 보고하라는 題音이 내려졌다. 그래서 공문이 그 산 아래의 동네에 도착하는 날 공정하게 조사하여 보고될 수 있도록 처분을 내리는 곳에 공손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박욱이와 3~40명의 사람들이 사납게 외치면서 떼거지로 몰고 와서 치고 밟고 하였다. 洞民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박욱이의 친척이나 이웃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형을 측량하는데 한결같이 박욱이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하여 그가 손수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步數를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아래위의 뫼 구덩이를 반으로 하여 전후의 옛 무덤들 중에 하나의 뫼 구덩이만을 인정하니 한 자[尺]가 반 자가 되었다. 사실을 바꾸고 어지럽히는 것이 이와 같으니 그 나머지 잘못된 것은 일일이 예를 들 수가 없어 공정한 판결을 하는 법정에 문서를 바칠 수가 없었다고 전주유씨들은 하소연을 하였다. 그래서 전주유씨들은 문서에 서명을 하지 않고 돌아와 곧장 관청에 나아가 사유를 아뢰고 다시 소송을 제기하려 하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완악한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측량하지 못하고 관청의 명령을 받는데 소홀히 한 죄는 전주유씨 자신들에게 있고, 관청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 또한 심히 미안하여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제 1개월이 지나니 분통과 울분이 더욱 사무치게 되었다. 그래서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문서를 묶어서 소송을 제기하니, 안동부사께서는 잘 살피시고 당장에 투장한 묘소를 파내어가게 해줄 것을 전주유씨들은 호소하였다.
이 상서는 1888년 4월에 올린 상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당시의 상서에서는 박욱이가 전해에 관청에서 파내어가라고 판결한 묘소에 다시 장사를 치른 것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에 안동부사는 1850년에 투장했다고 하는 것은 이미 40년이나 오래된 것이니 그대로 두고 전해에 이굴하라고 한 묘소에 대한 지시가 시행되었는지, 그리고 새롭게 장사를 지낸 곳이 전주유씨의 묘소와 너무 가까운 것은 아닌지 상세히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洞長과 里任에게 내린 것이다. 지금의 이 상서는 바로 그 지시에 따라 동장과 이임이 전주유씨의 선산에서 실제적인 조사를 하는 과정에 있었던 일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는 내용이다. 이 상서의 내용을 보면 박욱이라는 자는 사람들을 모아 勢를 과시하며 자기의 뜻대로 조사가 이루어지도록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당한 조사에 동의할 수 없었던 전주유씨들은 조사한 서류에 서명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온 후 1개월이 지난 뒤에 조사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상서를 올린 것이다.
이 조사에서 핵심은 박욱이가 투장했다고 고소된 묘소와 예전부터 있었던 전주유씨들의 묘소 사이의 보수였다. 이 보수가 바로 墓域을 확정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조선이 건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가장 넓은 묘역을 차지하는 계층이 종친 1품으로 사면 각 100보로 한정하고, 최하의 품계인 6품은 50보로 제한하였다. 그러던 것이 주자학이 보급되고 『주자가례』에 따른 예절이 시행되면서 묘역 또한 사대부들에게 크게 유리하게 확대되었다. 왜냐하면 『주자가례』에서는 관직의 고하에 따라 차등을 둔 의례보다는 사대부 공통의 의례를 기본이념으로 하였으며, 또한 지세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는 산술적 거리보다는 풍수의 지세에 따른 좌청룡‧우백호를 수호의 범위로 삼는 ‘龍虎守護’를 지향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1676년(숙종 2) 3월에 이 법이 공인되고, 영조대에 이르러는 『續大典』에 정식 법조항으로 확정되었다. 그래서 사대부의 묘역범위는 현실적으로 200보까지로 확정되게 되었다. 전주유씨와 박욱이의 묘역 시비에서 항상 그 거리가 200보 안에 들었기 때문에 박욱이가 언제나 패소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박욱이가 이번에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위협을 가하면서 한 자[尺]를 반 자로 줄인 것은 보수를 늘여서 200보의 규정을 벗어나기 위한 계책이었다. 그렇게 측정한 결과 두 묘소의 사이가 200보가 넘은 것으로 짐작이 된다. 조사한 문서에 전주유씨들이 서명을 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 이러한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보면 서로 묘역을 확보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는 바로 묘소가 산지를 소유하는 권리의 근거가 되며, 그 권리는 묘지 주변의 산지에서 산출되는 이익, 즉 산림의 산출물인 땔감, 재목, 흙 등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독점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주유씨들은 박욱이가 자신들의 선산에 묘소를 쓰는 것을 한사코 막으려하고, 그와 반대로 박욱이가 강압적으로 자의 길이를 줄여가면서까지 전주유씨 선산에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묘소를 통한 산림의 사적인 점유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더욱이 사대부들에게는 묘소를 통해 산지를 소유하는 길이 폭넓게 열려져 있어 그 고장에서의 위세와 영향력으로 그 소유를 넓혀나갔다. 하지만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산의 근처에 살고 있는 일반 서민들은 땔나무 등의 일로 생계를 보충해야 했다. 이러한 까닭에 산림을 둘러싼 대립이 계층 또는 계급적 대립의 양상을 띠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전주유씨와 박욱이 사이의 시비 또한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경우의 한 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묘역을 둘러싼 시비, 즉 山訟은 서로간의 경제적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기 때문에 비록 계층이 차이나는 집단 간의 시비라고 해도 어느 한쪽의 편을 쉽게 들어줄 수 없었다. 그래서 안동부사도 이 상서에 대해 "가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소송을 하면 관리를 파견하여 부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라는 題音을 내려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全州柳氏와 朴勗伊 사이에 있었던 山訟과 관련된 여러 자료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지는 특징은 산송의 당사자들 사이에 대립의 양상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자료이다. 이 자료와 함께 이 소송과 관련된 그 밖의 上書와 所志, 그리고 招辭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한다면 조선 후기에 있어서 산송이 진행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그 진행이 어떻게 전개되고 처결되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 山訟과 사회갈등 연구』, 김경숙,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고문서연구』33, 「조선후기 산송과 상언‧격쟁」, 김경숙, 한국고문서학회, 2008
『東方學志』77, 「조선후기 山訟과 山林 所有權의 실태」, 김선경,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