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4월, 臨北面 三峴里년에 거주하는 柳頤欽 등이 자신들의 高祖母 묘역 내에 偸葬한 朴勗伊를 처벌하고 그 묘소를 移掘해가게 해줄 것을 安東府使에게 호소하는 上書
내용 및 특징
1888년(고종 25) 4월, 臨北面(지금의 안동시 임동면)三峴里에 거주하는 柳頤欽 외 48명의 全州柳氏가 連名하여 安東府使에게 올린 上書로 그 내용은 그들의 高祖母가 안장된 묘역의 白虎脈 가까운 곳에 朴勗伊이라는 자가 偸葬하였으니 그를 처벌하고 그 묘소를 移掘해가게 해줄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이 상서를 올리기까지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이 상서를 올린 全州柳氏들의 선산이 安東府 東後面 佳流村(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가류리)에 있으며, 그 곳에는 대사간을 지낸 柳正源의 부인인 淑夫人 宣城李氏의 묘소가 있다. 그런데 이 상서를 올리기 전해인 1887년 5월 14일 그 산 아래에 거주하는 박욱이라는 자가 숙부인의 묘역 안 백호맥 가까운 곳에 투장을 하였다. 그 땅은 작년에 관청에서 파내어가라는 땅이고, 그 묘소 또한 관청에서 파내어가라는 묘소였다. 그 땅의 모양과 거리가 법의 규정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마땅히 금한 것이고, 묘소를 파내어가라고 하는 것은 이미 결정된 문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파내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곳이기에 다른 사람도 감히 엿볼 수 없는 곳임에도 투장을 한 박욱이라는 자가 파내어가야 할 묘소에다 다시 매장을 한 것이다. 이러한 일은 전임 府使가 막 떠나고 새로운 부사가 아직 부임하지 않았을 때 저지른 것으로 한편으로는 소송에서 이기려고 애쓰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의로 저지른 범죄였다. 박욱이의 온갖 놀라운 악행은 작년에 처음 투장할 때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전주유씨들은 연명한 訴狀을 품고서 안동부에 들어갔으나 마침 부사가 서울에 간 날이어서 이제야 와서 호소하게 되었다고 이 상서는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박욱이의 잘못을 열거하였다. 그에 따르면 박욱이는 관리들이 오늘 묘소를 파내어가라고 하면 그는 내일 매장을 할 만큼 법을 무시하는 것이 심각하다. 이렇게 한다면 관청의 법이 시행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소송을 할 필요조차 없게 될 것이라고 상서에서 주장했다. 그리고 박욱이가 이전에 허위로 꾸며서 자신들의 묘소가 산록 위에 있다고 말하지만, 그 묘소라는 것은 경술년(1850)에 투장한 것으로 파내어가라고 한 관청의 지시에 응하겠다고 다짐을 하고서도 파내어가지 않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박욱이가 이 묘소를 파내어가지 않겠다고 완강히 버티어서 세월이 흘러 자취가 희미해졌지만 전주유씨들의 분노와 원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미 패소한 묘소를 의지해서 步數를 계산해서 점차 침범해 들어오고 있다. 박욱이의 이러한 흉악하고 간교한 처사에 전주유씨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전에 있었던 문서들을 모아서 호소하니, 안동부사께서는 박욱이를 체포하여 엄한 형벌로 다스리고 경술년과 작년에 투장한 묘소를 함께 파내어가게 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전주유씨의 선산인 안동부 동후면 가류촌의 뒷산을 두고 그 산 아래 거주하는 박씨 사이에 벌어지는 산송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그 시초는 이 상소가 있기 38년 전인 1850년이었다. 이 상소에서 경술년에 투장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시작이었는데, 그 당사자는 가류촌 뒷산 아래에 사는 朴尙文이라는 사람이었다. 이 투장에 대해 전주유씨들이 암행어사와 안동부사에게 네 번의 상서를 올린 끝에 승소의 판결을 받고, 박상문은 그 해 4월 5일 안으로 투장한 묘소를 이굴해가겠다는 다짐을 하고서 그 소송은 일단락되었다. 이 상서에서 박욱이가 산록 위에 있다고 하는 묘소가 바로 그 당시에 투장한 것이며, 전주유씨들이 관청의 지시에 응하겠다고 다짐을 하고서도 파내어가지 않은 것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1885년에 지금의 피고인인 박욱이가 투장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전주유씨들은 곧장 고소를 한 끝에 그해 10월 이 투장의 배후자로 지목된 朴萬俊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그해 12월 안으로 이굴해가겠다는 다짐을 하고서 이 소송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이듬해인 1886년 5월에 이굴해가겠다는 묘소를 대충 허물고는 다시 새롭게 투장했다는 상서를 전주유씨들이 안동부사에게 제출하였다가, 곧바로 투장한 朴致成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니 선처를 해달라는 상서를 안동부사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888년에 다시 박욱이가 투장했다는 이 상서가 안동부사에게 제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하나의 사건이 해결되지 않고 끝없이 되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상서에서 전주유씨들이 판결에서 오늘 묘소를 파내어가라고 하는데 내일 매장을 할 만큼 법이 무시된다면 관청의 법이 시행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소송을 할 필요조차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山訟에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산지 소유권에 대한 조정의 정책에 가장 큰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에서는 "산림과 천택은 백성들과 함께 공유한다[山林川澤與民共之]"라는 이념 아래 원칙적으로 산림의 사적인 점유에 대해 강력하게 금지하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 이 정책은 산지의 개인적 소유를 묘소에만 허용하고, 그 묘소의 범위 또한 후기로 갈수록 사대부에게 유리하게 확대되어졌다. 조선의 건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최고위층인 종친 1품이면 사면 각 100보로 한정하고, 그 나머지는 일정한 비율로 감하여 최하층인 6품은 50보로 하였다. 하지만 『주자가례』가 보급되면서 그에 따라 관직의 고하에 따라 차등을 둔 의례보다는 사대부 공통의 의례를 지향하고, 또한 지세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는 산술적 거리보다는 풍수의 지세에 따른 좌청룡‧우백호를 수호의 범위로 삼는 ‘龍虎守護’를 허용하였다. 그 결과 1676년(숙종 2) 3월에 사대부 先山의 용호 내 養山處에 타인이 묘를 쓰지 못하게 함으로써 용호수호를 법적으로 공인하게 되었다. 이어서 영조대에 이르러 『續大典』에 정식 법조항으로 확정되었다. 그래서 사대부의 묘역범위는 현실적으로 200보까지로 확정되고, 이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 상소에서 步數를 계산해서 점차 침범해 들어오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법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이렇게 묘지를 근거로 산지의 소유를 인정받게 되면 그 산의 산출물, 즉 즉 땔감, 목재, 흙 등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독점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박욱이가 투장을 하려고 하고, 전주유씨들이 투장을 막으려는 가장 큰 이유였다. 이렇게 묘소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자원이 되자 이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감시와 관리가 함께 이루어져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이 마구 침범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소유임을 인정받지도 못한다. 묘소를 통해 산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養山과 禁山을 통해 관리를 하고, 墓直이나 墓戶를 두어 타인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감시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조선 후기로 올수록 산림의 소유권은 자신이 점유한 산림에 대해 다른 사람의 이용을 배제할 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 이 상서에서 50명에 가까운 전주유씨들이 연명으로 서명하여 올린 것은 바로 자신들의 세력을 간접적으로 과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묘지가 경제적 이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쉽사리 판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안동부사는 가류촌의 洞長과 里任에게 경술년에 투장한 것은 40년이나 오래된 것이 그대로 남겨두고 작년에 투장했다가 이굴해간 곳과 마땅히 금지해야 할 곳에 너무 가까운지에 대해 잘못된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명하고 자세히 살펴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洞長과 里任에게 내렸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전주유씨들이 그들의 선산인 安東府 東後面 佳流村 뒷산에 朴勗伊에 투장한 사실을 안동부사에게 고소하기 위한 것이다. 이 소송과 관련된 자료로는 이것 외에도 上書와 所志, 그리고 侤音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이 상서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 산송은 이미 185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그와 관련된 상서와 소지, 그리고 고음 등도 남아 있다. 따라서 이것들을 종합해서 비교 고찰하면 조선 후기에 있어서 산송이 어떻게 진행되고, 처결되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 山訟과 사회갈등 연구』, 김경숙,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고문서연구』33, 「조선후기 산송과 상언‧격쟁」, 김경숙, 한국고문서학회, 2008
『東方學志』77, 「조선후기 山訟과 山林 所有權의 실태」, 김선경,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3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